임권택 감독의 대표적인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소리’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음악입니다. 그런데 이 두 영화가 판소리와 민요에 대한 미학적 은유보다는 역사적 은유를 좇는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최유준 음악평론가의 칼럼으로 함께 알아볼까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는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 사람’ 에서 ‘서편제’와 ‘소리의 빛’ 두 작품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남도 사람’은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로,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내용적 연관을 이루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다.

 

주인공 동호가 어렵사리 찾은 눈먼 누이 송화의 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북장단을 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명을 넘긴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영화와 소설에서 표현되는 배다른 오누이 송화와 동호 사이의 미묘한 근친적 애정 관계는 “몸을 대지 않는 소리와 장단의 기묘하게 틈이 없는 포옹과도 같은”(이청준, ‘소리의 빛’ 중에서), 말하자면 한국 전통음악과 판소리 특유의 승화된 관능미에 대한 은유적 형상화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가운데 마지막 단편 ‘선학동 나그네’를 마저 영화화하지 못한 데 대한 미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편제’ 이후 14년이나 지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삼아 그의 100번째 작품으로 연출한 영화가 ‘천년학(2007)’이다. ‘천년학’에서는 ‘서편제’ 이후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는 만큼 좀 더 현대로 다가와 있는데, 이 때문인지 근대화 혹은 현대화 과정에서 훼손된 자연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을 통해 은유되는 전통 문화에 대한 상실감이 짙게 담겨 있다.

 

천년학
영화 ‘천년학(2007)’의 마지막 장면. 동호의 환상 속에서 끊겼던 선학동 포구의 물길이 이어지고 눈먼 누이 송화가 소리를 한다.

 

전통음악과 민요는 철새와도 같은 운명을 겪기 마련이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휩쓸고 간 황막한 도시의 풍경에서 더 이상 철새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근대화의 거센 물결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 직선으로 뚫린 신작로 길을 버스로 달려 물길이 끊긴 ‘선학동’으로 누이를 찾아가는 동호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영화 ‘천년학’은 이처럼 판소리와 민요에 대한 미학적 은유보다는 역사적 은유를 좇는다.

 

여기서 눈먼 누이 송화는 순수한 민요(판소리)의 상징적 구현이요, 딸을 눈멀게 한 아버지 유봉은 껍데기만 남은 우리의 전통과 민족적 권위를 나타낸다. 동호는 알 수 없는 강박으로 판소리의 미학(송화의 자취)을 좇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음악사적 은유의 맥락에서 영화 ‘천년학’에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덧붙여 그려지는데, 동호의 동거녀인 단심이다.

 

단심은 동호가 한때 몸담은 유랑 창극1) 단체인 ‘태평양극단’의 여주인공이다. 단심은 극단 내에서 소리의 ‘법제’를 따지는 정통파 판소리 명창 조평세에게도 ‘천박하게 노랑목을 쓴다’고 비난 받기 일쑤이며, 동호를 짝사랑하여 아이를 낳고 그와 동거까지 하게 되지만 오로지 누이 송화를 찾는 데에만 몰두하는 그로부터도 외면만 당하다가 아이를 사고로 잃고 끝내 정신병자가 된다.

 

천년학
영화 ‘천년학(2007)’ 속 창극 장면. 홍단심은 ‘태평양극단’의 프리마돈나이다.

 

영화의 후반부, 중동 건설 현장에 가서 적지 않은 돈을 벌어온 동호가 눈먼 누이를 위해 정성스레 지은 소리공부방에 곱게 차려 입은 단심이 찾아온다.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온 사실을 알길 없는 동호는 옛 동거녀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갓 지은 건축물의 이모저모를 그녀에게 자랑스레 설명한다. 부러움에 찬 눈빛으로 설명을 듣던 단심은 끝내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나도 장님 돼서 이 집에서 살고 싶다.”

 

영화는 집요하게 정통 판소리의 미학을 좇으면서도,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상업화의 맹목적 요구에 굴복한 모습의 혼종적 국악에 대한 동정어린 시각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물길이 끊겨 더 이상 학이 드나들지 않는 ‘선학동’에서 우리는 어떤 판소리, 어떤 민요의 재림을 꿈꾸는 것일까? 돌아올 수 없는 누이의 형상만 좇다가 단심을 돌보지 않은 동호의 모습이야말로 성찰해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은 혹시 아닐까?

 


1)‘창극(唱劇)’은 서양의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등장인물의 역할을 나누고 반주를 다양화하여 대중성을 높인 판소리의 근대화 버전이다.

 

아르떼365 최유준 음악평론가

글 | 최유준 (음악평론가)

서울대와 동아대에서 음악미학과 음악학,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월간 객석> 등의 지면을 통해 음악평론가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사업단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과 대중문화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사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비평적 노력을 해왔다. 저서로 『음악문화와 감성정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지식인의 표상』, 『비서구 세계의 대중음악』, 『아도르노의 음악미학』, 『뮤지킹 음악하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