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벤야민이 영화라는 새로운 복제예술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영화는 ‘진품명품’의 아우라(aura)가 없다는 것, 즉 서울의 극장에서나 미국 할리우드의 극장에서나 어디서건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는 영화가 상영될 수 있다는 민주적 특성이 첫째요, 특유의 편집을 거쳐 움직이는 몽타주 화면이 관객들의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음악도 그럴까? 음악이 음반이나 라디오로 무한 복제되어 청중에게 전달될 때, 벤야민이 영화에서 기대한 그러한 잠재력이 실현될 수 있을까?

 

실상 20세기의 음악은 복제기술에 지배당했고, 장르를 불문한 ‘음반의 시대’가 되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모티브이자 배경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술복제시대’의 음악이다.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커다란 여객선에서 태어나 자란 영화 속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는 음반산업과 미국 대중음악이 음악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20세기의 미학적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핵심적 장면은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의 연주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녹음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음반업자가 가져온 녹음기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데, 우연히 객실 창문에 비쳐 보인 갑판의 소녀에게서 얻은 사랑의 감흥을 그는 즉흥적인 피아노연주 속에 담아낸다. 녹음세션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만족한 음반업자는 녹음 원판을 수십만 장으로 복제 판매하여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겠다고 장담하지만, 기계적으로 재생된 자신의 연주를 듣고 놀란 나인틴 헌드레드는 녹음 원판을 가로채 가져간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남긴 말은 “나 없이 내 음악이 떠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그에게 음악은 ‘지금-여기’의 아우라가 있는 직접성(immediacy)을 통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것,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 이율배반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연주가 담긴 녹음 원판을 폐기하지 않고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복제되기 전단계의 녹음 원판에는 아우라가 남아있다는 뜻일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라이브 연주에서 결여되었던 무엇, 즉 부족한 아우라를 마저 채우기 위해 그 녹음 원판을 이용한다. 녹음의 순간 그의 연주에 영감을 주었던 창밖의 소녀, 그 소녀가 미처 그의 음악을 듣지 못한 것이다.

 

주저와 망설임과 몇 번의 실패 끝에 나인틴 헌드레드가 처음으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여객선이 목적지인 미국의 항구에 닿아 소녀가 배에서 막 내리려 할 때였다. 승객들 속에서 어렵사리 소녀를 발견한 그는 오래 전 같은 배에서 만난 적이 있는 그녀의 아버지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인사를 건넸고, 아버지가 전했던 비밀의 언어로 뜻이 통한 소녀는 답례로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해준다. 뒤늦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녹음 원판을 그녀에게 전해주려 하지만, 인파 속에 밀려 멀어져가는 소녀는 안타깝게 소리칠 뿐이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피아니스트의 전설
 

아쉬움이 남았지만, 소녀는 배에서 내렸고 그녀의 입맞춤으로 소통은 이루어졌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제야 씁쓸한 표정으로, 하지만 미련 없이, 녹음 원판을 부수어 휴지통에 내던진다. 이것이 배위에서 일생을 살다 간 어느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다. 그러니까, 그 전설은 ‘재즈의 왕’ 젤리 롤 모튼을 가볍게 제압했다는(물론 영화적 설정이다) 그의 초인적 연주 실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음악의 아우라, 음악을 통한 직접적 소통 그 자체가 ‘기술복제시대’의 전설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서진 원판은 누군가에 의해 접착제로 복원되고, 그러한 전설조차 음반으로 전해진다는 것이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20세기 음악의 역설이다.

 

어느덧 21세기는 ‘포스트 음반시대’가 되었다. 사이버 공간에 편재하는 디지털 음원은 기술복제의 전혀 다른 차원을 그려내고 있으며, 음반산업이 수명을 다했음을 직감한 자본은 발 빠르게 대규모 라이브 공연과 음악축제 기획으로 향하고 있다. 음반조차 전설이 된 21세기에 나인틴 헌드레드가 살아있다면 또 어떤 혼란을 느낄까?

 
 

아르떼365 최유준 음악평론가

글 | 최유준 (음악평론가)

서울대와 동아대에서 음악미학과 음악학,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월간 객석> 등의 지면을 통해 음악평론가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사업단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과 대중문화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사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비평적 노력을 해왔다. 저서로 『음악문화와 감성정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지식인의 표상』, 『비서구 세계의 대중음악』, 『아도르노의 음악미학』, 『뮤지킹 음악하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