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설계가 시작된다. 무언가를 짓고 싶어 하는 건축주가 있고, 그/그녀가 들고 온 땅이 있다. 건축주가 원하는 것들에 대해 듣고 대지의 위치를 확인하고 계약을 한다. 처음 할 일은 땅의 모양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땅의 모양”이란 말은 조금 이상하다. 땅이란 끝없이 이어져 지구를 덮고 있는 존재이니 그 울퉁불퉁함의 정도, 기울기 등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의 땅은 네모입니다. 또는 세모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는 땅의 모양을 말하면서 ‘20미터 곱하기 50미터 정도 되는 군요.’ 또는 ‘이 땅은 매우 길고 좁은 모양이라서 오히려 재미있군요.’라고 이야기한다. 이 때 “땅의 모양”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땅 위에 존재하는 권리의 물리적 적용 범위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의 모양, 선으로 표현된 경계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권리의 범위는 지적도를 보면 나와 있다. 남의 땅과 내 땅을 나누는 약속의 경계가 ‘선’으로 그려져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선이란 것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그려진다. 선으로 인해 내 땅과 남의 땅이 나눠지고, 건물의 내부와 외부가 결정되며,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위치가 결정된다. 이렇게 선을 그리며 무언가를 수없이 나누다 보면 공간의 모습은 도면 속에서 모양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집은 결국 나와 바깥 세상을 나누는 경계, 즉 선들이 모여져 만들어진다. 선을 긋고 여기는 나의, 내 가족의 공간이라 외치는 것이다. 선을 긋다 보면 더 굵고 많은 선들을 그어야만 할 이유가 자꾸 생긴다. 빗물은 안으로 들어오면 안되고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찬 기운도 막아야 한다. 남의 시선도 막고 싶다. 그리고 허락 받지 않은 자들의 발길도 차단한다. 여기까지야. 더 들어오지 마.
그어진 선이 나누는 한 편과 그 반대편이 전혀 다른 모습일수록 그 선은 굵고 단단해진다. 밖은 추운데 안에서 따뜻하고 싶다면 벽은 단열재 등등으로 두꺼워져야 한다. 열을 뺏기기 가장 쉬운 창호도 이중유리, 삼중유리를 설치한다. 점점 선은 많아지고 두꺼워진다. 건축을 구성하는 선들이 나누는 것은 찬 바람과 더운 공기만이 아니다. 내부의 ‘우리’와 저 바깥 험한 세상 사이에도 겹겹이 선들이 그려진다. 내 집 밖 도로가 불안할수록 담은 높아지고,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의 개수는 늘어난다. 내 단지와 당신이 사는 단지가 수준이 다르면 굳이 터놓고 살고 싶지 않아진다. 선을 긋는다.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통섭과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이질적인 것들 간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고자 하는 시도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의 단위들을 나누는 선들이 점점 굵고 진해지는 것은 흥미롭다. 사회가 발전하고 살기가 좋아진다면 무언가를 나누는 선들은 얇아지고 넘나들기 편해질만도 한데, 더 굵은 선들을 긋고 또 긋는다.
도시 내 학교 담장을 허물어 효율 높은 공공의 공간이 되게 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지역 내 넓은 공공 공간으로서 주민들이 저녁 운동을 하고, 아이들이 뛰노는 옆에서 주민들이 쉬어가는 쉼터가 되어주고, 늦은 시간에는 주차장이 부족한 곳의 주차난도 해소할 수도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몇 번의 안타까운 사건들 이후 안전을 위해 다시 담장이 생기고 방범을 위해 다양한 보완이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는 선들은 걷어내기 쉬우나 보이지 않는 선은 쉽게 걷어내기 힘들다. 보이지 않는 선들은 언제든 다시 담과 철망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선을 지우려면 선을 사이에 둔 이 쪽과 저 쪽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야 한다.
추운 겨울 실내외 온도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 감기 들기 싫다면 날씨가 조금 더 따듯해지거나 아니면 우리 집의 실내온도를 조금 낮춰야 할 것이다. 차이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차이가 없어지면 저절로 선은 가늘고 옅어질테니.
글 | 건축가 구승회
연세대학교와 Columbia University 건축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 창조건축과 Yamasaki Associates, Inc, 야마사키코리아건축사사무소를 거쳐 현재 (주)크래프트 대표 재직 중.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이며 즐겁게 일하는 것과 행복하게 노는 것에 많이 노력 중. 중소 규모의 일상적 건축을 주로 하고 있으며 근작으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의 집’, 서래 공방, 한남동 657 빌딩, 신사동 589 빌딩, 동해 주택과 양평 주택 등이 있다. 최근 영화의 흥행에 기대어 일상적 건축에 대한 책 ‘건축학개론_기억의 공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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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 이은 구승회님의 건축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정말 너무너무 좋네요. 따스하면서도 세상을 냉철하게 읽어내는 글..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
아.. 이러다 팬이 되어버릴 것 같아요 >ㅁ<
햇빛도 그렇고, 선도 그렇고 건축의 요소와 삶의 요소를 함께 생각하니 재미있죠? 아르떼365는 “추운 겨울 실내외 온도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는 말이 참 새롭게 다가왔어요~온도차가 심하면 공간의 벽도 우리마음의 벽도 두꺼워진다는 생각! 다음번 칼럼도 기대해주세요~
처음엔 건축이야기구나. 어렵겠구나하고 봤는데,
보고나서 생각이바뀌었어요. 인간의삶과 건축의 연계?
간단하지만 교훈을 주는 글입니다^^
맞아요~ 아르떼365도 글을 읽으면서 건축의 요소를 삶의 요소와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