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저자들은 자기의 호흡에 충실하다. 독자의 호흡을 고려하지 않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렵다. 자기 호흡에 충실하기 때문에 독자는 낯설게 느끼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작품에는 독창성과 깊이가 생겨난다. 자기만의 생각에 철저하다는 것, 그것은 저자에게는 안거할 방을 보장하지만 독자에게는 가혹한 벽으로 다가온다. 고전의 의미와 독해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전의 글쓰기는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다. ‘객관적’일 경우 기존의 사유 관행에 의지하게 되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생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언어문법을 창출하는 데에서 어떤 작품이 ‘고전’으로 평가된다고 할 때, 고전의 글쓰기는 단순히 주관적인 것을 넘어 주체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글쓰기가 출현한다. 하지만 고전의 글쓰기는 ‘결과적으로 주체적’일 뿐 독자에게는 이기적이고 불친절한 글쓰기로 비추어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독일의 근대철학자 피히테는 그의 저서 <지식학>이 너무 어렵다는 독자의 항의에 대해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틈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라고 궁색하게 답변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기방식대로 글을 썼을 뿐 이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그는 오직 자기의 사유세계에만 침잠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주인공을 통해 ‘나는 내 글이 누군가에 의해 읽힐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니체는 한발 더 나아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목에 ‘아무도 위하지 않은, 하지만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정도의 자만은 질병에 가깝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괄호에 묶고 철저히 ‘my way’를 외친다. 그들을 향해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고전의 주체적인 글쓰기에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태도가 감지된다. 하나는 정직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다. 지적인 성실성이라고도 옮길 수 있는 ‘정직’ 앞에서 독자는 감동한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세계가 투명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정직은 글쓰기의 일차적인 덕목이다. 가식과 불성실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왜곡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명’이 특히 실존주의 인문학자들에게 모토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를 통해서만 세계의 가면을 벗겨 실상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직’에 충실하다 보면 ‘치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전의 난해함은 저자의 치밀한 사고의 산물이다. 그들이 고의로 독자에게 불친절했다고 볼 수 없다. 불친절은 그들이 자기만의 사고와 글쓰기에 투철한 결과일 따름이다. 그들은 독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첨하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글을 가공하지 않았다. 사태를 정직하게 묘사, 설명하기 위해 치밀해야만 했고, 그 결과가 독자에게는 난해함과 불친절로 다가온 것뿐이다. 세계는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자 하는 자에게만 정직하게 보여준다고 그들은 믿는다.

 

고전의 정직하고 치밀한 글쓰기는 독자를 좌절과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이다. 대표적인 저자로 헤겔과 프루스트를 들 수 있다. 프루스트는 말년에 병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긴 후 교정지를 넘겨받았을 때, 이전에 썼던 글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교정지 여백에 빼곡히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출판사에 되돌렸고, 이런 일은 수차례 반복되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독서를 싫증나게 하는 도서의 표본이다. 한 편 헤겔 <정신현상학>의 ‘서언’은 본래 이 저술을 마친 후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중에 추가한 것인데, 이 서언은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프루스트의 작품이 문학적 심리의 극한에 접근한다면, 헤겔의 저술은 철학적 사유의 극점을 보여준다. 인간 정신의 한계에 도전한 이들은 사태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에게 정직과 치밀을 요구했고 이는 결국 주체적인 글쓰기로 이어졌지만, 독자는 그로 인해 독해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고전 저자의 독자적인 글쓰기는 저자만의 새로운 언어문법을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새로운 사유로 진입하기 위해 고전의 저자가 겪는 노고는 이후의 인류가 감당해야 할 정신노동을 대신한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지평 혹은 새로운 언어의 문법을 창출하기 위해 그들은 당대의 사회와 지식을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산고의 고통을 견딘다. 벌거벗은 채 세계와 냉정하게 마주한다. 타인의 시선과 욕망은 부차적이다. 초점은 나와 세계의 실상이다. <데미안>의 서두에서 헤세는 고백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우러나는 것에 따라 살고자 했을 뿐인데, 그 길이 왜 이토록 험난했을까?” 세계의 배꼽에 이르고자 했던 고전의 저자들에게 자기만의 글쓰기는 불가피했다. 주체적 글쓰기를 위해 자신과 철저히 정직하게 마주하여 스스로 감내해야 했을 고통과 절망의 노정을 생각하면, 고전 앞에서 독자들은 쉽사리 절망을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충분히 정직하게 쓴 글을 읽는 일은 얼마나 힘들고도 아름다운가!

 

 

 

유헌식의 고전읽기 시리즈
  (1) 고전에서 생각의 건축술을 만나다
 ▶(2) 고전의 주체적인 글쓰기에 대하여
  (3) 나에게 고전은 무엇을 주는가?

 

글 | 단국대학교 교수, 인문고전비평가 유헌식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헤겔의 역사적 사유에 나타난 새로움의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즘은 철학을 넘어 인문학 전반과 예술분야까지 기웃거리고 다닌다. 한국헤겔학회 부회장 겸 <헤겔연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이 일상의 삶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는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1권 고독>,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2권 성장>, <죽음아 날살려라>, <역사이성과 자기혁신>, <한국인의 일상행위에 나타난 의미구조 연구> 등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텍스트해석연구소장 및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