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관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2003년 초 봄, 신촌 도로 위에서였다. ‘학교는 죽었다’는 선언적 명제에 불을 밝힌 낙서로 가득한 앰뷸런스를 탄 윤여관 선생님과 나는 나란히 정지 신호에 대기 중이었다.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나란히 출발해 다른 길로 헤어졌지만, 도로 위에는 그 앰뷸런스가 남긴 메시지가 바퀴자국처럼 남아있었다.
윤여관 선생님은 오랫동안 충북지역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시며 아이들과 함께 ‘작품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수업’을 만들어 오셨다. 학생부 교사 등의 경험을 통한 ‘자기 반성’과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식으로 지금은 학교를 떠나 작업을 통해, 여행학교를 통해 아이들과 만나고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현재는 청소년 문화작업자들과 함께 ‘교실에몽’(교실과 도라에몽의 합성어)이라는 제목의 광주 비엔날레 전시를 준비 중이다.
‘문제아’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
신정수| 윤여관 선생님이 해오신 일과 그에 따른 다양한 직함들을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선생님에 관해서 들어온 수식어들만 나열해 봐도 대 여섯 개는 될 것 같습니다. 미술교사에서 작가, 미니버스 운전사, 여행학교 기획자, 평화의 바람 행사에서 퍼포먼스를 하신 것까지 선생님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이력과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자신을 설명하신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윤여관| 자기를 설명해달라는 것이 늘 제일 어려운 질문입니다. 음, 저는 ‘준비가 덜 된 혁명가’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그 전에는 제도권 학교에서 정해진 과목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교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학생과’에서 7-8년 정도 근무했거든요. 그래서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불리는 아이들과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새벽에 쫒아가서 이야기하고, 밤늦게 잡아두고 이야기하고, 그 즈음에 아이들과 ‘과목’으로 만나서는 한계가 있고, ‘문제아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180도 방향을 틀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마음은 틀었는데 ‘습관화된 극단성’이라든가 폭력성 같은 것은 습관이어서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것들을 내 몸에서 빼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신정수| 제가 작년 신촌 도로 위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옆 차선에서 정지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선생님의 멋진 미니버스를 보고 저와 제 친구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녕하세요! 사진 찍어도 될까요?’라고 인사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윤여관| 아, 네 기억나요. 그 분이시군요!
신정수| 선생님의 멋진 미니버스에 관해서 소개해주시겠어요? 덧붙여 선생님의 ‘차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윤여관| 우선, 제가 자연미술 내지는 생태 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이 15년 쯤 되었어요. 그런 작업을 쭉 해오며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지금도 사실은 혼란스럽습니다. 감각적으로는 차가 굉장히 좋거든요. 하지만 타이어, 브레이크 라인, 연료를 때야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환경 문제를 생각하게 되요. 머릿속으로는 ‘차가 악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감각적으로는 ‘필요악’이라고 정리를 해요. 아직도 좁혀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차를 처음 샀을 때에는 저도 차를 닦기도 하고 깔끔하게 유지했는데, 제가 살던 집이 흙집이라 차 안이 굉장히 지저분해졌어요.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어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차를 열심히 닦아 깨끗한 차들을 보면 ‘저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차를 닦아 보니까 물도 많이 들고, 기름도 흘러나가고, 그 물이 여과도 안 되고 그래서 저는 거의 세차를 안했어요. 그러고 살다가 지금의 차를 발견했어요. 앰뷸런스를 처음 본 순간 ‘저건 뭐가 되겠다’ 싶어서 가지고 있던 경차와 트럭 한 대를 팔아서 이 것을 샀어요. 일 년 정도 타고 다니다가 이것을 어떻게 꾸밀까를 고민하던 그 때쯤에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정수|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윤여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답답한 점도 많고, 문제도 많이 느껴 강한 메시지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학교는 죽었다’라고 앰뷸런스에 표현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까, ‘삼베를 붙여볼까?’, ‘삼베를 붙이고 검은 리본을 붙인 후 학교는 죽었다고 쓸까?’ 고민을 하던 중에 어느 날 학교에 모의고사가 있었어요. 수업시간을 빼고 모의고사를 보는데 저는 그것을 반대하며 ‘내 수업에서는 불법으로 모의고사를 볼 수 없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저만 저항하고 다른 반은 다 시험 보는데 제 수업만 수업하고, 결국에는 시험을 다 보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 개인적으로 싸워서는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한 학년 시험 본 OMR 카드를 가져다가 차에 붙였어요. 아이들 이름과 답도 적혀있는 OMR 카드를요. 그리고 앰뷸런스 앞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곳에 ‘학교는 죽었다’고 썼더니 장례차가 되었지요. 그 차를 1회 참실 보고대회(참교육 실천 보고 대회)에 첫 선을 보였어요. 그 때 저는 지금처럼 머리를 박박 깍은 상태였는데 구멍 뚫은 교복을 입고 한 겨울에 그 위에 올라가서 퍼포먼스를 했어요. 무척 추웠지요. 참실 보고대회 왔던 선생님들이 그 차에 자기 이름 쓰고 메시지를 적었어요. 학생들도 많이 썼고요.
신정수| 그 차를 몰고 학교에도 가셨나요?
윤여관| 네. 학교에서 엄청 싫어했지요. 워낙에 메시지가 강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거든요. 그 차는 부여고등학교에 있을 때 만들었는데, 그 곳에서는 별로 말이 없었어요. 그 다음에 있던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집단적으로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것은 표현의 자유이고 처음으로 문제제기 하시니까 받아들이지만, 두 번째에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하니 말이 없었어요.
신정수| 선생님의 ‘차작업’은 환경과 그리고 선생님이 호흡하시는 학교 등의 현장에서 얻은 철학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동차 문화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동차를 통해 도로에 메시지를 뿌리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선생님이 미술교사로 재직하실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느 잡지에 기고하신 원고를 보았는데, ‘200년 전 김홍도가 그린 ’서당‘ 속의 모습에서 지금보다 더 여유 있어 보이고, 더 자유로워 보이고, 소통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곳에선 회초리조차 자유롭다’라는 말씀을 쓰셨더군요. 그런 말씀을 하신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윤여관| 제가 있던 부여여고는 정문에서 바라보면 시선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면의 구령대를 향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대부분의 학교가 그런 구조인 것 같은데, 교실로 가려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가장 빠른데 아이들을 꼭 돌아가도록 했어요. 부여여고의 경우는 일제시대에 ‘여(女)’ 모양으로 학교를 디자인 한 것이라고 들었어요. 여자 고등학교이니까 ‘여(女)’라는 글자를 건축적으로 응용한 것이라고 이해를 하려고 해도, 많은 학교들이 정문에서 교실을 가려면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거든요. 모든 사람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든 해서 지름길로 가고 싶은데 규칙이라는 힘으로 그 욕망을 막고 있어요. 공간은 사람의 삶을 구조화시키는 그런 힘이 있지요. 몇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서울 교대에서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찍고 ‘교사가 될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면서 어떤 질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냐’고 혼내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반박 글을 쓴 거에요. 있는 질서는 그대로 인정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변화를 바라는 발길은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냐고. 사람들이 가는 길이 ‘길’이 되어야지요. 그 발길을 통제하려고 하는 힘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학교 공간은 대게 ‘일(一)’자 모양으로 양쪽에 교실들이 쭉 늘어서 있지요. 교도소 양쪽에 감방들이 있는 것처럼 그런 구조는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좋은 구조이고, 한눈에 딴 짓을 하나 안 하나를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너무 휑해서 5명, 10명, 50명이 자유롭게 끼리끼리 모이는 공간이 형성되지 못하고 ‘전체’만이 있는 공간이거든요. ‘ㄷ자’로 구부러져, 작은 공간이 많이 주어질 때 자율성도 나온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학교 구조를 보면 ‘전체를 통제한다’는 생각이 건축 개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무식하게 모더니즘을 소화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죠.
‘교실 안에 갇힌 미술’을 넘어
신정수| 선생님께서는 ‘교실 안에 갇힌 미술’이 시각예술이 아닌 ‘미술’에 한정되어 삶과 유리된 미술교육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씀해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미술’과 ‘시각예술’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윤여관| ‘미술(美術)’이라는 용어 자체가 화인 아트(Fine Art)를 일본식으로 번역해서 한국에 들어온 것이에요. 교과서에 미술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미군정 때이거든요. 그 전에는 공작이라든가, 도화 등 다양한 개념이 있었어요. 그 때에도 이미 화인아트(Fine Art)라는 개념은 유럽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컨템포러리(contemporary art) 정도로 남아있었거든요. 아니면 비쥬얼 커뮤니케이션 아트(Visual communication art)라고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미술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은 그렇다 치고, 개념도 지금까지 살아있거든요. 화인아트(Fine Art)라는 말이 그 ‘예술(art) 중에 최고 높은 것’이잖아요. A급 문화를 위해 항상 차별화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존재하는 문화, 시각 문화가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가, 그것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의 것들을 함께 읽으며 근거를 파고들면 ‘미술(美術)’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캐 들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와 연결된 ‘시각 문화’라는 말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가치 지향적으로 미(美)를 설정하고 가치를 쫒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치중립적으로 놓고 각각의 현상과 차원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시각 문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정수| 선생님의 사회와 소통하는 미술 수업, 미술 교육을 넘어서는 시각예술 수업 사례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윤여관| 처음에는 ‘주제그림 그리기’라든가, 아이들의 사회에 대한 시각을 그림으로 풀어본다거나 하는 것들을 해보았어요. 지역문제를 들여다보며 작품을 통해 대안을 구상해보는 수업 등을 해보았어요. 그리고 통합문화적인 것까지 생각해보면 남학생 브래지어 체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방학숙제로 브래지어를 체험해보게 하고, 그것에 대한 느낌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지요. 사용하는 호칭을 바꾸어보면서 호칭문화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 적도 있고요.
신정수| 인터넷으로 ‘윤여관’을 검색해 봤더니, 선생님이 내주신 그 방학숙제가 기사화된 것이 있었습니다. 기사 제목이 ‘브래지어, 불편하지?’였는데요, 선생님의 과제에 대해서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윤여관| 저는 그 때 숙제를 내고 일본의 요코하마 자연 미술전에 가서 보름 넘게 있다 왔어요. 돌아오니 학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많이 왔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교장 선생님 결재도 받은 숙제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의의를 충분히 설명했거든요. 이런 숙제를 낼 테니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하되 못하는 이유를 써서 내면 인정해주겠다. 무작정 안하는 것은 내가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려우니 인정할 수 없다. 그랬더니 아이들 300명 중에 70명 정도가 못하는 이유를 써서 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유, 이해가 가는 이유가 다 있었는데, 대부분 나머지 아이들은 체험하고 사진을 찍어 감상문을 써서 냈어요. 저는 비밀스러운 느낌들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었고, 흔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2회 참실 보고대회에 전시했는데 선생님들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문화민주주의의 꿈
신정수| 사회참여적 주제를 가진 미술수업, 아이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경험을 만드는 미술수업을 해오신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 개인도 평화버스(지난 8월 2일에 있었던 파병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등의 행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계신대요. 선생님의 개인적인 실천과 작업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을 비교할 때 ‘주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이들의 판단력, 주체성을 믿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겨울에 진행하셨던 여행학교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윤여관| 여행학교를 할 때 갈등이 많았어요. 저를 제외한 ‘큰아이(여행학교에 참여한 교사)’들은 생태적 관점이 중심에 있는 분들이셨고, 저는 그것보다는 인권, 개인의 현재 상태가 더 중요하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면서 생태적 관점을 아이들에게 들이대면 튕겨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군것질을 한다거나 떠드는 것을 통제하는데 나중에는 교사들이 군것질을 하기도 하고, 저는 내버려 둬도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여행학교 주제가 ‘인권찾아 삼만리’라고 하면서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하고 있었는데 워낙 격차가 있는 인권, 억압되어있던 부분을 역사를 찾아가보는 것이기 때문에 청소년 인권까지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진행만큼이라도 평등하게 해보자는 차원에서 되도록이면 아이들의 행동을 간섭하지 않고 진행했더니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는 거에요. 다음 날 캠프 진행하는데 졸고, 이소선 할머니(전태일의 어머니)앞에서 졸고 있고. 그것이 예뻐 보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해도 굉장히 만나기 어려운 분인데 좀 더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의 규칙이 있어야겠구나. 하지만 이미 분위기가 해방구처럼 되었으니까, 아이들이 서로 존대말을 하거나 반말을 하는 등 사용하는 언어와 호칭에 평등을 기하자는 등 이런 문화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요. 무엇이든지 해도 되고 집을 떠난 상황에서 해방처럼 느껴지는 경험이었지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오히려 여행학교를 기획했던 사람들이 더 피곤함을 느꼈어요. 지나고 보니 콩나물에 물 주듯이 그런 경험을 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위안이 생겼습니다. 다음번에 다시 프로그램을 기획하라고 하면 느긋하게 하고 싶어요. 하루에 세 개, 네 개씩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소화는 고사하고 정보를 읽는 것만도 힘이 들어 앞으로는 하루에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을 하지 말아야겠구나 생각을 했죠.
신정수| 다음 여행학교의 행선지는 어디인가요?
윤여관| 지금도 여행학교 구상은 하고 있어요. 이번 여행학교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기는 했는데, 좀 느슨한 네트워크 중심의 프로그램에 따라 변형되는 학교를 어렴풋이 상상하고 있습니다. 상을 완전히 그리는 것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신정수| 자식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거든 세계 여행을 보내라는 말도 있지요. 작년에 저도 어느 워크숍에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학교’를 만드는 구상을 했었어요. 버스 한대를 빌려 몇 명의 아이들과 그 안에서 먹고 자면서 버스로 갈 수 있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계획이었습니다. 1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화와 문화가 영감을 주고, 연결이 되어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행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있는 만큼 얻고, 기록할 수 있는 만큼만 기록하자. 이것은 분명 좋은 생각이어서, 후원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들떠있었지요. 이번 광주 비엔날레 작업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윤여관| 광주 비엔날레 다섯 개의 전시관 중에 영어로는 마이너리티(Minority), 우리 말로는 ‘그 밖의 어떤 것’이라는 것이 있어요. 상무대 헌병대였던 곳을 작업공간으로 삼아서 작업을 진행 중인데, 저는 그 중에 영창 부분을 맡았습니다. 처음 보는 순간 학교의 구조가 떠올랐어요. 학교를 축약해서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기획하고 소통하는 점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전에 하자센터의 오로라라는 친구가 하자센터 공용차를 도색할 때 자문으로 참여하면서 만나 작업 제안을 했습니다. 오로라가 중심이 되어서 사람들을 모았고 지금까지 한달이 넘게 회의를 거듭하고 있지요. 다들 할 이야기가 많고 욕심을 내어서 전시 챕터가 4개나 되었어요. 확실히 청소년들은 종합적으로 경험을 하다보니 파티를 하자고 제안해서 교복파티도 하기로 했지요. 이번에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제가 보여주는 방식이 굉장히 극단적이고, 그래서 폭력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생각하지만 함께 작업하는 친구들은 언어와 경험이 분화되어있고 섬세합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어느 수준에서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까 고민도 되지요. 전시 설치를 하면서 조절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작업하는 친구들은 이미 학교를 나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지금 거리에서는 안보이지만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 있고, 그 학교라는 것이 감옥보다 더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 사회에 나오는 대량생산되는 시스템의 관문이다’라는 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어요. 어떤 인권에 대한 자각에 대해서 접근하면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까지 신경을 쓰면서 의견을 조율해가며 작업을 해야지요.
신정수|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학교 안과 밖을 다 경험하시면서 형성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상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윤여관| 아, 역시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에겐 거창한 것은 없고, 제가 사용하는 언어가 워낙 애매해서 애매한 생각뿐입니다. 2대 8 사회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2대 8 사회에서는 자기가 하는 일이 돈과 직결된다 생각하면 노동중독증처럼 열심히 일하는데,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관심이 있어도 뒤로 미뤄두지요. 2명이 8명을 먹여 살리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2명이 8명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2명이 8명을 위해서 위로하고, 울리고 웃기는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이 전부 문화의 영역이거든요. 예술이 아니더라도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활동들이 다 가능성이 있는 영역들인데, 말 그대로 문화에 의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예술적 상상력, 그것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데, 실은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이 안되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것이 경제활동이 될 수 있도록 비집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신정수| 정리하자면, 10명 중에 2명이 전체 10명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화활동을 하면서 굶어죽지도 않고, 나머지 8명과 함께 문화를 잘 향유하고, 감상하는 시각과 귀도 기르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계신 것이죠?
윤여관| 네. 돈버는 것 중심에서 문화로 가치가 옮겨갔으면 해요. 다 자연에서 빌어먹고 사는 것인데요. 문화에 의해서 문화민주주의랄까, 그런 사회가 가능하겠다는 상상을 합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어렵겠지만 시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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