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보편적 복지 혹은 복지국가 담론을 둘러싼 논의와 쟁론이 갈수록 달아오르고 있다. 하여 유권자가 다수당과 대통령을 어찌 선택하든 복지의 파고(波高, wave height)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 파고가 문화예술계에 쓰나미 재앙이 되어 폐허 뒤의 재창조로 가게 될지 아니면 문화예술계가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혁신적 기회가 될지는 의식적인 준비 여하에 달려있다. 요컨대 지금 저기서 태풍의 눈으로 커지며 다가오는 복지의 회오리는 문화예술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문화예술인의 사회복지를 보장하라
단적인 예를 들자면 문화예술계에 꽤 오래된 이슈 하나가 ‘얼떨결에’ 해소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의 신 빈곤에 허덕이는 문화예술인의 사회보장 문제이다. 지금까지 대응은 이랬다. 문화예술이 갖는 본연의 가치와 사회에 끼치는 근원적 영향이 있으니 문화예술인 사회보장제도를 특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접근이 주였다. 실제로 몇 번 국회에서 여야 합의까지 갔었지만 입법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2003년 조각가 구본준 씨 교통사고 사망과 올해 초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 고독사 등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매번 거론된 프랑스나 독일의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언제나 남의 떡에 불과했다.
왜 이랬던 걸까? 문화예술인의 사회보장을 향한 여론 호응이 미미하고 조직적 로비도 부재해서지만, 실은 문화예술계 스스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에서 거듭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거듭 실패했는가? 역설적이게도 문화예술계가 그 동안 공적 지원 제도 안에서만 서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말은 문화예술이 시장에서 상업적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판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문화예술이 산업이냐 아니냐는 논쟁을 떠올릴 이유도 없다. 공적 지원 제도에만 의존하느라 문화예술계가 ‘사회적인 것 The social ‘의 창조에 대한 감각, 감성, 문화가 심각하게 퇴화한 것이 본질적인 사안이다.
‘사회적인 것’이란 시장으로 작동하는 사적private영역, 국가가 매개하는 공적public영역, 공통의 준거로 움직이는 공동commons영역 등에 두루 걸쳐 있다. 이중에서 문화예술계는 세금을 거둬 분배하는 국가의 공적 영역에만 과도하게 치우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사회문화적 여건도 있었으나, 요는 보편적 복지의 등장으로 공공영역에서 문화예술인 사회보장제도 건은 이제 특별 사안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의 일환으로 해소되고 마는 중대한 상황 변화가 코 앞에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임금 같은 정책을 도입한다면 여기서 문화예술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복지 보장 이후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그렇다면 복지 국가의 도래 이후 문화예술계는 복지 그 이상의 무엇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보편적 복지의 흐름에서 문화예술인과 비 문화예술인의 구분은 상당히 무의미해질 터라, 문화예술인들은 그간 망각했거나 도외시했던 ‘사회적인 것’의 창조라는 차원에서 응답하는 길 말고는 딱히 길이 없지 싶다. 아니 이 길을 지금부터 개척하려고 해야 복지의 파고가 문화예술계에 혁신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예술계는 ‘사회적인 것’을 공부하고 실험하고 몸과 마음을 바꿔나가려고 해야 한다. 문화예술에는 본디 ‘사회적인 것’이 내재해 있다는 식으로 본원적이고 근원적인 수사를 사용하기 전에 말이다. 왜냐하면 양극화의 뒤안길에서 다가오는 복지의 시대에 문화예술계는 문화예술계에 속한다고 느끼지 않는 다수의 사회적 지지와 응원을 새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급부상한 ‘사회적인 것’ 담론이 하늘 아래 새롭다고 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사적 영역의 서비스와 공동 영역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개척되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가 유독 공적 영역에선 규제의 대상이라는 점을 보면, 문화예술계가 소셜 네트워크 문화에서 얼마나 둔감하고 왜소한지 자문할 줄 알아야 한다. 시장에선 이미 남발되기 시작한 소셜 시리즈의 끄트머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문화예술계의 ‘사회적인 것’이 현재의 빈곤한 상태 그대로라면 자칫 문화예술은 상품과 서비스의 장식에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그때 공적 영역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의 기준을 지금과 달리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쓰나미 재앙이다. 다 휩쓸려 폐허가 된 뒤에 다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이 시나리오가 문화예술계 외적으로 거대하게 강제되는 ‘파괴적, 단절적 창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때 문화예술은 산업론이나 시장 만능주의 때문이 아니라 공적 영역을 뒤엎을 만큼 다가오는 파고, 즉 ‘사회적인 것’의 재탄생 때문에 폐허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계가 ‘사회적인 것’의 창조에 별로 기여한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유로 말이다. 이것이 기우가 아니라는데 공감하는 이라면 현재의 문화예술계 스스로 자기 혁신의 ‘비파괴적, 연속적 창조’를 착수하고 진행시킬 시간적 여지가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좀 절박해져야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었으면 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때의 주체와 대상 문제이다. 즉 문화예술인 주체가 있고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함께 지속적 관계를 이어가는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무대, 하나의 시간이 ‘사회적인 것’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뜻을 보다 확연하게 보이게 하자면, 그 동안 문화예술의 수혜자, 소비자, 참여자 등으로 호명해온 그 대상은 ‘사회적인 것’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로 덩어리진 단수의 무차별적인 대중(mass, 大衆)이 아니라 서로를 익히 아는 이웃으로서 복수의 소중들(The popular, 少衆)이라는 점이다. 이 소중들 속에 문화예술인이 기거하며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대변인으로서 문화예술의 ‘사회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다시 돌아오면 복지의 파고 속에서 ‘사회적인 것’이 재탄생하는 근대와 탈근대의 여러 맥락이 겹쳐있는 이 전환기에 현재의 문화예술계가 ‘비파괴적, 연속적 창조’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재정립해야 할 자아상이 있다면-근대의 문화예술인이 공적 제도 안에서 권위를 부여받은 교육자가 되거나 시장에서 추앙받는 스타가 되거나 혹은 경계를 넘나들며 아방가르드이자 보헤미안을 자처했다면-그것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에도 계속 웃고 울며 살아갈 이웃의 재발견과 창조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 혁신의 발화 주체로서의 예술인
그런 이웃을 창조했거나 재발견한 문화예술인이 어떤 이웃의 일원이 될 줄 알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방식으로 어떤 이웃의 관계를 더 좋게 바꾸며 삶의 질을 높여낼 수 있다면, 그 임상은 소녈 네트워크를 통해 대중의 의식에도 영향을 주어 사회 전체적으로 혁신의 발화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이자 문화예술계가 자기 정체성의 재정립을 위한 실천적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을 꼽자면 나는1. 지역, 2. 청년과 청소년 그리고 3. 사회혁신의 청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재발견하고 창조해야 할 이웃이 내가 보기엔 어떤 지역에 터를 내리고 사는 어떤 사람들이 아니면 허상에 그친다 싶어서고, 계층으로 보면 청년과 청소년이 어떤 경우에도 배제되지 않는 관계망이어야 미래가 있겠다 싶어서다.
이때 문화예술인이 발화할 사회혁신의 청사진은 신 성장동력 발굴이나 1만 명을 먹여 살릴 1명의 천재 육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의 이웃이 관계를 맺고 개선시켜 나가는 문화의 창조 때문에 만들어지는 무엇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더불어 소셜 시리즈의 원조처럼 등장했던 사회적기업 정책 역시 같은 발상에서 나왔다. 사회적기업의 핵심은 취약계층 고용이나 취약 계층에 한정된 서비스에 있지 않고 이웃의 관계를 혁신적으로 바꿔내고 그 실력으로 경제도 사회도 혁신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예술계가 느끼는 사회적기업 정책이 지금까지는 새로운 공적 지원책의 등장에 머물고 있지만, 실은 문화예술인에게 이웃이 있기는 한지, 나아가 이웃의 관계 혁신이라는 본질적인 문화의 문제를 인식하는지 묻는 것이자, 무엇보다 그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서 자기 자신(의 조직)의 존립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다. 문화예술인 스스로를 ‘사회적기업가’로서 재정의할 절박함과 필요성과 호기심을 얼마나 갖느냐고 말이다. 이는 비영리 일색으로 왔던 문화예술계 단체들의 자기 조직화 관성을 돌아보라는 요구인데, 단적으로 “예술가에게 왠 사회적기업가?”와 같은 본능적 반문에 대해 얼마나 ‘충격적인’ 자답이 나오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충격’이란 것도 나중에 회고할 때 보면 달걀을 세우는 문제 같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달걀 아랫 부분을 살짝 깨뜨려 우선 세울 것인지, 아니면 세울 수 없는 달걀을 세우려다가 속으로 상할지 누군가 와장창 깨뜨려버리게 될지 하는. 혁신은 도전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금세 일상이 된다.
글_ 사단법인 씨즈 상임이사 김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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