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다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얼마 전, 고정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디제이가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나? 혹은 있었던가?’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 먹기라도 한 듯, 먹먹하고도 막막하기만 한 짧은 순간이 가까스로 지나갔다. “딱 하루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면 좋겠지만…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고작 하고 싶다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라니. 생방송 중에 준비되지 않은 상황을 모면하려 불쑥 터져 나온 대답이었지만, 정말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게 언제던가 싶었다. 그런 좋은 시절(?)이 정말 있기라도 했던 걸까.

‘영화가 일이다!’ 문화부 기자의 애환
지난해 신문사에서 8개월가량 영화 담당을 했다. 영화 분야를 맡았다고 하니 다들 부러워했다. “우와, 영화 실컷 보면서 월급도 받으니 얼마나 좋겠어!”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신작 영화란 영화는 모조리 공짜(!)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할까. 시사회장을 쫓아다니며 영화 보는 일은 틀림없이 대단히 신 나는 일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접하기 어려운 여러 나라의 예술 영화부터 정신 혼미하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까지. 그러나 웬걸. 많게는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그저 편하게 보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눈을 스크린에 꽂아 두고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하나 고민하면서 봐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장면과 줄거리는 때로 섞이고 엉켜 기사 마감을 앞두고 복기하기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일주일에 최소 5편, 많게는 10편을 훌쩍 넘는 영화를 봤으니 어림잡아 아무리 적게 잡아도 8개월 동안 200편 정도는 본 셈이다.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가끔은 졸음을 참아가면서 또 바로 전에 본 영화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면서.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영화 담당 기자가 되기 전 약 5년 동안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영화도 못 보는 처지에 연극, 뮤지컬, 공연 등을 누리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랬다. 영화 담당 기자가 됐을 때 아들 녀석은 막 다섯 살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가 함께 마지막으로 영화를 봤던 게 녀석이 태중에 있던 즈음, 아내의 배가 남산만 한 만삭이었을 때니 아이 낳고 5년 동안 영화 한 편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조잘대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영화관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다른 공연장이나 미술관 따위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돌이켜 보니 아내와 함께 본 마지막 영화는 심야로 두 편을 이어 봤던 기억이다. 당분간은 마지막이려니, 설마 그럴까 싶으면서도, 그리 예측하고 두 편 정도는 봐둬야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의기투합했던 것 같다. 그러다 영화 담당이 되어 8개월간 200여 편을 봤으니, 5년 못 본 영화를 모두 다 벌충하고도 남은 셈이다. 그 후, 짧은 영화 담당 시절을 마치고 벌써 1년이 지났다. 역시 아직도 아내와 함께 영화다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나만 해도 그렇다. 8개월간 200편의 영화를 머릿속에 꾹꾹 쑤셔 넣은 뒤, 영화 담당을 그만두고도 한참이나 영화를 즐기지 못했다. 사실 영화관이야 서너 번은 좋이 갔다. 바야흐로 여섯 살이 된 아들은 영화 보기를 즐긴다. 우리 부부의 영화관 행차는 오롯이 아들 덕택이다. 그리하여 ‘라푼젤’, ‘꿀벌 하치의 대모험’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영화관에 앉아 아들과 함께 팝콘을 먹으며 보았다. 감상이라기보다는 ‘견딤’에 가까운 영화 관람을.
휴식조차 사치인 이 시대의 어른들
영화 관람조차 ‘사치’인 이 시대의 어른들은 다른 문화생활은 꿈도 못 꾼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나는 또래 직장인보다 오히려 상황이 나은 편이다. 신문사라는 독특한 기업에 몸담은 나는 공연을 즐기거나 영화를 볼 처지는 안 되지만, 오가며 신간소설을 읽고 간간이 기사나 칼럼 쓰기가 막힐 때는 시집을 들춰 보며 잠시 머리를 식힐 여유도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 혹은 취재 나가는 길에 음악도 듣는다. 어느 날, 뭔가 답답한 문제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에 MP3 음악파일을 다운 받아 들어봤더니 뭔가 개운했다. 내친김에 내게 투자하는 셈 치고 적당히 값나가는 헤드폰을 샀다. 조금 더 개운해진 마음에 값어치를 하는 것 같았다. 읽고 쓰고 생각할 나름의 여유(?)를 지닌 기자라는 직업에 견줘, 보통 회사에 다니는 내 또래의 또 다른 이들은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 딸린 맞벌이 부부의 일상이라는 것이 녹록지 않다. 아침부터 심야까지 일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 조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만도 대견한 일이라고 스스로 손뼉을 쳐 줄 일이다. 그러니 해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란 게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화가 부재한 3040세대의 위기의식

최근 출간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보면 일본을 뒤흔들었던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근 시간 도쿄 지하철에 유독가스를 살포한 이 사건을 접한 일본인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외국에 있었다는 무라카미 씨는 정말로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참사가 일어났는지, 종교라는 이유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사건의 가해자는 물론, 당시 살아남은 피해자를 깊이 인터뷰하며 연구했다. 그는 작가적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사명을 느꼈던 것 같다. 책에 나와 있는 무라카미 씨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 그대로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 최초의 세대가 이 사건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들이라고.
무라카미 씨는 이 세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 설령 수입이 두 배가 되었다 해도 땅값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올라, 사람들은 직장 가까이에서 제대로 된 집을 살 수 없었다. 그들은 훨씬 먼 교외에 집을 마련하고, 매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살인적인 만원 전차에 시달리며 출퇴근하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 시간 외 근무까지 하며 소중한 건강과 시간을 소모했다. 직장 내 경쟁은 혹독해서 유급휴가도 변변히 받을 수 없었다. 밤늦게 귀가하면 아이들은 이미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말과 휴일은 주로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으로 소진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 대한 무라카미 씨의 묘사를 보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최근 우리나라 3040세대의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사회 역시 위기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문제는 사회의 메인 시스템에 ‘노’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활력 있는 서브시스템이 일본 사회에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던 반면, 우리 사회는 당시 일본과는 사뭇 다른 데가 있는 것 같다. 일본과 달리 매우, 때로는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역동적인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우리네 술 문화가 개인의 건강에는 안 좋을지언정 나름의 분출구가 되면서 사회의 건강성을 일부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문화 분출구’가 필요하다
연말 송년회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술’이 빠지지 않는 것 같다. 지나친 음주판에 지친 이들이 뮤지컬이나 공연을 관람하고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하는 쪽으로 송년회 혁명을 시도했으나, 도리어 최근 들어 반동의 바람이 분다는 소식도 들린다. 실컷 폼 잡고 팀원, 부원들과 뮤지컬을 보는 것까진 좋았는데 공연 관람 뒤 뭔가 허전한 마음에 다시 술을 마시게 되더라는 경험칙의 결과란다. 뮤지컬 보는 시간까지 보태 술 먹느라 귀가 시간이 더 늦어지느니, 차라리 뮤지컬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지혜롭다고 합의를 보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보아도 결국 우리에겐 ‘분출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송년 공연 관람조차 피곤한 일이니, 공연 뒤에 남은 허전함이 원래만큼의 술자리로 이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이 사회의 허리를 이루는 3040의 일상은 너무나 피곤하고 힘겹고 지겹다. 오죽하면 연말 꼭 하고 싶은 일을 물으니 부지불식간에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떠올렸겠는가. 그래서 더욱 뭔가 풀어놔야 할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아무리 바뀌려 해도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송년회 문화다. 그렇다면 발상의 전환도 좋겠다. 송년회를 의례와 의식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거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편안한 시공간으로 만들 아이디어는 없을까. 그게 뮤지컬 관람과 저녁 식사보다 더 긴요한 송년회가 될 것 같다. 그것이 휴식이니까. 문화란 결국 생활 속의 여유이고, 여유란 곧 쉼이니까.
글_ 한겨레신문 김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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