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는 음악, 눈 앞의 그림, 읽고 있는 소설 장면에 빠져들어 마치 그것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 가져본 적 있나요? 무엇인가 모방하는 것을 넘어 그것에 나를 맡김으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 – 철학자 아도르노는 ‘미메시스(mimesis)’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와 비슷하지 않나요?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는 예술도 미메시스의 영역으로 설명합니다. 예술은 자신의 목적과 이해관계에 갇혀 바동거리던 우리를 다른 사람, 다른 사물, 지금까지 나와 관련도 없던 다른 세상을 향해 열어 놓기 때문이죠. 오늘 칼럼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호랑나비 유충은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택한다.

 

자연세계는 의태로 가득 차 있다. 흑나방은 붙어있는 나무와 똑같은 색깔로 몸을 바꾸고, 문어의 몸은 순식간에 주변 색으로 변한다. 나뭇가지 모양의 자벌레나 해초같은 돌기를 가진 해마, 활엽수 잎처럼 생긴 나뭇잎 벌레는 태생적으로 서식지 주변 사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호랑나비 유충은 새 똥의 모습을, 어떤 나방의 날개 무늬는 맹수의 눈을 닮았다. 너구리나 주머니 쥐는 천적을 만나면 죽은 체 해 위기를 모면한다. 포식자로부터 몸을 보호하거나 먹이를 얻기 위해 이 동물들은, 자신의 형태나 색깔, 행동을 자신이 아닌 것에 맞춘다. 주변 환경에 대립하기보다는 그들과 유사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인간도 의태를 하지 않았을까? 공포나 전율을 느낄 때 소름이 돋는 건, 가시나 털을 세워 위험에서 벗어나던 의태의 흔적은 아닐까? 경악스러운 대상이나 사건 앞에서 몸이 굳어지는 건, 죽음을 모방해 위기를 모면하던 먼 과거의 신체적 기억이 아닐까? 그런데 왜 지금의 인간은 주변 환경과 자연을 파괴하며 살게 되었을까?

 


테오도어 아도르노(오른쪽)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왼쪽)와 함께 대표적인 독일의 비판이론가이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그 문명사적 전환을 “미메시스 mimesis”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모방하다/흉내내다”는 뜻을 갖는 이 단어는 ‘의태(mimcry)’와 어원은 같으나 더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동물의 행동이나 소리를 흉내 내는 제의적인 춤, 신이나 죽은 영혼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주술사의 신들림은 문명의 초기, 인간이 행하던 미메시스적 실천들이다. 비가 오기를, 누군가의 병이 낫기를,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벌이던 춤과 제의를 통해 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모방하며 자연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힘에 영향을 끼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주술적 미메시스는 동물적 의태와는 구별된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의 목적은 거대하고 신비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벗어버린 과학기술의 등장과 함께 자연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그렇게 얻어낸 지식은 자연을 지배하는 막강한 수단이 되었다. 자연의 힘에 위탁하는 대신, 자연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합리성이 미메시스를 대체하면서 자연은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이용되고 지배되는 대상이 되었다.

 

미메시스는 자신이 아닌 것, 자신의 바깥과 타자를 향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상대를 극복하거나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이해타산을 잊고 상대에게 몰두한다. 그에게 가까이 가고, 그를 흉내 내고, 그에게 나를 맡김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내 속에는 나 자신보다 그가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이와는 달리 목적에 매달린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의 목표 속에만 있다. 그에게 모든 것은 그 목적에 유용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나뉜다. 목적 실현에 도움되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건 합리적이지 못한 일로 치부된다.

 

예술은 미메시스의 영역이다. 예술에 진정으로 감동해 본 사람은, 그것이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예술은 자신의 목적과 이해관계에 갇혀 바동거리던 우리를 다른 사람, 다른 사물, 지금까지 나와 관련도 없던 다른 세상을 향해 열어 놓는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향해, 나보다 더 큰 것을 향해 나를 열어주는 확장의 감정이다. 나는, 듣고 있는 음악, 눈 앞의 그림, 읽고 있는 소설 장면에 빠져들어 나보다 더 큰 무엇인가와 하나가 된다. 그 순간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자연과 세계와의 미메시스적 합일의 기억에서 온다.



글 | 김남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과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감성을 통한 세계 인식이라는 미학 Aesthetics 본래의 지향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권력이란무엇인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노동을 거부하라』,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