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시대, 평화의 가능성_정수경 미술이론가

6월 6일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귀를 파고드는 사이렌 소리가 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추도하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1분간의 묵념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다. 한반도를 휩쓴 전쟁의 달 6월은 그렇게 전쟁과 평화를 되새기하며 시작되곤 한다.

 

평화를 뜻하는 영어단어 ‘peace’의 어원은 로마어 ‘pax’다. 자연 ‘pax romana’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 말이 가리키는 바, 고대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의 원리는 두 가지다. 정복전쟁의 최소화, 그리고 이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동화정책. 하지만 이 팍스 로마나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평화의 상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듯 이민족 동화정책은 지극히 당연히도 로마 중심이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이민족 고유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억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라면 고유한 정체성을 버리고 얻은 평화에 진심으로 만족하겠는가? 평화는 平과 和가 합쳐진 말이다. 화합이 필요하지만, 먼저 평등이 있어야 한다. 평등은 차이의 인정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팍스 로마나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그래도 20세기 전반까지는 팍스 로마나가 통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동화’보다는 ‘차이’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다문화주의’가 공식적인 국가정책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성적 정체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다원주의’의 열풍이 학문과 예술의 영역을 휩쓸었다.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자유와 해방의 국면을 맞은 듯 보였다. 하지만 전면에서 차이가 증대되는 것과 비례하여 이면에서는 갈등이 배태되었고, 사적인 린치에서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력적 양상으로 귀결되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나는 너와 생각이 틀려.’라는 식의 표현을 쓰는데, 이런 표현이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의 생각 및 가치와 대립되는 생각과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쩐지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만 같고, 한쪽이 맞으면 다른 쪽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에, 다름은 틀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차이의 진정한 수용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데 달려있다.

 

미국의 비교문학연구자이자 철학자인 리처드 로티는 2001년 서울에서 「구원적 진리의 쇠퇴와 문학문화의 발흥」이라는 인상 깊은 강연을 했다. 여기서 로티는 인간의 구원은 차이에 끌어안는 인류공동체를 만드는 데 달렸다고 역설하면서, 그러한 기획에 있어 신과 진리의 무용함과 문학의 유용함을 힘주어 주장했다. 문학이 유용한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가볍게 대해도 좋은 픽션’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의 묘사를 단숨에 거부하지는 않고 일단 두고 보게 만들어 준다. 나아가 훌륭한 문학은 독자의 마음을 끌어들여 주인공의 상황과 입장에 감정이입하게 만듦으로써, 차이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지평을 확대해준다. 공감의 지평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행복의 약속’으로서의 예술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

 
 
뱅크시
 
 

2005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주민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막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을 때, 영국의 거리미술가 뱅크시(Banksy)는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가 그 막막한 장벽에 낙서화들을 그렸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겨눈 총구와 욕설 앞에서 그가 스프레이 라커를 이용해 그려낸 거대한 스텐실 그림들은 양측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림들은 다만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삶에 대한 꿈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장막을 걷어낸다면 그곳에는 초록 식물들이, 아름답고 막힘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지지 않을까. 쿠폰처럼 오려내고, 사다리를 타고, 풍선을 타고 장막을 넘어 아름다운 삶으로 가고 싶은 꿈. 실제로 장막 뒤에 있는 것은 그저 황량한 사막이지만, 뱅크시는 다른 외모, 다른 종교, 다른 정치적 신념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 있는 다르지 않은 꿈을 그려내 보여줌으로써 장막의 잔인함을 그 어떤 르포보다도 생생하게 드러내주었다.

 

차이의 시대, 평화는 다름의 인정(平)과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같음을 발견하여 서로를 끌어안음(和)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정치의 무거움보다는 ‘참을 수 있는 예술의 가벼움’이 어쩌면 더 좋은 길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뱅크시의 그림이 보여주듯, “언제나 희망은 있다.”

 

참고 자료
ㅡ뱅크시 공식 홈페이지 http://www.banksy.co.uk/
ㅡ위키백과 공용 뱅크시 소개 http://commons.wikimedia.org/wiki/Banksy?uselang=ko

 

정수경

글 | 정수경 (미술이론학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이면 좋을지에 대해 미술현장과 이론을 오가며 고민하고 있으며, 고민의 결과를 글과 강의로 풀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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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상 2013년 06월 11일 at 12:37 PM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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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상 2013년 06월 11일 at 12:37 PM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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