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계기로 방문한 ‘문화숨’(성남시 수정구 태평4동)은 길고 가파른 경사의 꼭대기에 있었다. 초행길이라 이쪽저쪽 고개를 돌려보면서 올라갔는데 왼쪽엔 영장산 자락에 단풍이 든 나무들이 즐비하고, 오른쪽엔 좁은 골목들을 따라 빽빽이 모여 있는 집들이 보였다. 조금 일찍 도착해 1층 사무실(주민 커뮤니티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자, 어느새 환한 웃음을 담은 황정주 문화숨 대표가 들어왔다. 이곳은 단풍도, 집들도, 웃음도 그리고 어떤 기대까지 가득한 곳일 거라는 첫인상과 함께 대화를 시작했다.
동네에 필요한 숨구멍되기
“삶에서 누구나 자기만의 숨구멍이 있잖아요. 우리가 하는 문화예술 활동이 일상에서 누군가에게는 찰나가 될지라도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창립 멤버 다섯 명이 함께 ‘문화숨’ 이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 황정주 문화숨 대표
문화숨은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을 살리는 커뮤니티 디자인을 수행한다. 사회적협동조합으로 2013년에 설립하여 올해로 10년차다. 황정주 대표는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에서 활동하면서 문화예술과 지역에 대한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에 선배의 제안을 받고 성남 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성남문화재단의 <우리 동네 문화공동체 만들기>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공부해온 내용을 현장에서 실현해보면 어떻겠냐”는 선배의 제안이 프로젝트 매니저(PM) 활동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성남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사회적경제 창업 1기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황정주 대표는 PM 활동을 통해 지역문화에 대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났고, 이들과 사회적경제 창업팀에 함께 도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사회적경제’라는 것은 잘 몰라도 스스로 자립적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목표가 선명했기 때문에 창업 컨설팅을 통해 단체의 형태와 방향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 논의를 거쳐 사회적협동조합으로 결론을 맺으며 과정을 마칠 즈음에는 문화숨을 포함한 6개 단체가 선정되었고, 그중에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문화숨이 유일하다.
“이 동네에서만 10년을 활동했어요. 그저 우리가 지역에서 필요한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찬찬히 동네를 바라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봤어요”
성남은 분당, 판교 등 대표적인 신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하지만 문화숨이 자리 잡은 태평동처럼 오래된 삶의 흔적들을 빼곡하게 간직하고 있는 동네 역시 공존하고 있다. 사실 태평동은 성남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동네였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 신도시가 아니라 구도심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의 변화는 문화숨의 활동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문화숨은 태평2동·4동의 <평안한 마을> 프로젝트와 성남 1기 신도시 사업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서현 시범단지의 <서현 시그널>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변화를 기록하고 사람들과 연결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동네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곳들이 있잖아요. 오래된 이발관, 오래된 책방도 있고. 성남의 초창기에는 양말 공장, 니트 공장 등 수공예 공장이 많이 있었어요. 양말 공장 사장님들의 인생 스토리를 가지고 저희가 낭독 뮤지컬을 만들어 사장님들하고 같이 공연한다거나 오래된 헌책방 어르신의 이야기들을 담아서 그림책으로 만든다거나 오래된 이발관 원장님과 문화숨의 수공예 조합원들을 연결해서 오브제 작업을 한다거나. 그분들의 스토리를 모아 작업을 하는 일들을 해마다 해오고 있어요.”
  • 20~30대 청년 대상 프로그램 <동네생활 #가보자고>
관계 맺기 장치
문화숨 활동에 대해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20~3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보자고>는 3개월 동안 드로잉과 사진으로 자신만의 감각을 펼쳐내는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스킬을 배우는 게 아니라 동네를 탐색하면서 주민과 인터뷰도 하고 내가 꼽는 최애 장소를 발견해보는 관계 지향적인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당근마켓 동네생활’을 통해 참가자들을 모집하였고, 이 교육을 통해 만난 청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드로잉 동호회, 사진 동호회를 통해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하고 인접해 있다 보니 청년들 대부분이 거주지보다 외지에서 여가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문화숨의 문화예술교육은 우리 지역에서 재밌게 놀아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어요. 동네에서 충분히 놀 수 있는, 마을의 고리가 되는 문화예술교육을 만들어내고 싶었죠.”
30~40대 1인 가구 여성들을 위한 <뜻밖의 만남>은 목공, 뜨개질, 원예, 그림일기, 공간 꾸미기, MBTI 워크숍, 온라인 파티 등을 통해 참가자들 사이의 공통감을 형성하고 동네친구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에게 문화숨 옥상은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아지트가 되어주었고 이후 옥상정원도 유용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뜻밖의 만남> 프로그램은 기수로 나눠 진행되므로 기수별 모임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방구석놀이꾸러미>를 통해 지역 내 예술가와 아이들이 함께 만나 소통하면서 예술친구가 되기도 했다. 주민자치위원회와 협력하여 양말목 걱정인형 키링 만들기, 마을 보드게임 놀이, 우리 동네 컬러링 컵타 놀이, 아기자기 딱지 만들기 등 문화돌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밖에도 어르신 서로문화돌봄 <수공예교실> 등 태평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문화숨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 사이의 관계 맺기 장치다. 특별하게 의도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주민들의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연결, 그 자체다.
“문화예술교육을 표방하여 참가자를 모집하지 않아요. 우리는 마을이나 동네를 연결하는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주로 마을 단위에서 다양한 세대들이 여러 모습으로 연결되기 위한 매개로서 문화예술교육이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의 문화예술교육은 그것이 행해지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지역자원의 문화적 탐색이자 창작의 과정으로 연결되고자 하고 있습니다.”
  • 오히려 좋아 낭독회
  • 보이는 마을, 이야기뮤지엄
같이, 함께, 스스로 자립
문화숨은 지역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주민과 함께 기획단을 꾸리고, 기획단 교육부터 시작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주민들이 기획단 내부에서 해당 사업을 구체적으로 공유하고 지역 탐구도 하면서 당사자이자 참여 주체자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활동하는 주민에게 코디네이터, 마을 디자이너, 마을 강사, 마을 리더, 커뮤니티 디자이너, 생활문화 디자이너, 로컬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역할을 부여하고 활동하는 모든 과정을 같이 공유하고 있어요. 기획단 10명을 이렇게 잘 만들면 그 주변의 지인 10명도 자연스럽게 같이 참여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분들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동안 저희 프로젝트를 통해 이런 과정에 참여한 주민들이 1천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 10%는 문화숨과 현재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민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한 사업 설계와 프로세스를 만들고 있어요.”
이는 개별 프로그램의 참여 인원수가 늘어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문화숨 기획단 출신의 지역주민이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그 이상의 활동을 기대하며 활동비를 희망하는 의견 또한 늘어나고 있다. 단체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는 방안을 기본적으로 고민하고 사례연구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인정받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정책 모임과 정책 행사에 대한 참여도 늘어났다. 활발해진 활동만큼 지역 안에서 공론장을 만들어 의견을 모아가고 있지만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 10년 전 창업을 준비할 때 문화숨이 꿈꾸었던 ‘스스로 자립’을 위한 재원조성은 여전히 절박하고 어려운 과제다.
지역 활동에서 재원조성은 쉽지 않다. 누구나 느끼고 있으니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문화숨의 ‘스스로 자립’ 해결책은 ‘같이, 함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10년 활동을 하면서 지역 내 네트워크가 꽤 늘었다. 100여 개 공동체가 모여 있는 ‘성남 마을공동체 만들기 네트워크’부터 동 단위 ‘태평 울타리 네트워크’까지 각각의 모임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며 마을 안에서 서로 이어지며 연결되고 있다. 네트워크는 많지만 상근활동가와 기획력을 갖추지 못한 단체가 많아 문화숨에 대한 기대가 크다. 문화숨 또한 관계망을 통해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진단해보고 싶을 때 이 네트워크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므로 서로 균형을 맞춰가며 활동하고 있다.
“지역 안에서의 네트워크 활동이 모두 수익으로 환원되기는 어렵잖아요. 수익 활동과 네트워크 활동이 겹치면 항상 갈등을 겪어요. 우리는 자립 자생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네트워크 활동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거예요. 우리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거죠. 그럼 저희는 결국엔 네트워크를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 네트워크 모임
  • 성남박물관 시민이짓다 ‘청소년 공론장’
인정해주고 인정받게 한 우리의 자산
호기롭게 네트워크, 비영리 쪽을 선택했지만 재원조성에 있어서는 늘 고민이 많다. 문화숨 통장에는 그래서 (돈이) 넘쳐나는 일은 없다며 황정주 대표가 수줍게 웃는다. 단체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인 재정확보에 쏟는 노력보다 늘 네트워크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화숨의 성과와 성취감은 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토록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것일까.
“네트워크는 우리 활동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언젠가 가까운 인연부터 간접적인 인연까지 우리와 인연을 맺은 관계를 한번 정리해봤는데, 얼추 잡아도 100여 명은 되더라고요. 문화숨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바로 달려와 줄 수 있는 분들이고 지역에서 문화숨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해요. 이것이 우리의 자산이고 성과입니다. 우리를 인정해주고 우리를 인정받게 한 결과물이죠.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면서요.”
문화숨은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만큼 상근활동가도 문화숨 만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문화숨 조합원 중에서 상근활동가가 나오고 상근이 어려우면 다시 조합원으로 돌아가는 순환시스템이다. 충분한 수준의 활동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상근활동가가 될 수 있는 시스템, 이는 부족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시도해 볼 수 있는 방식이라고 황정주 대표는 말했다. 이런 시스템은 조합원의 의사를 대표하는 상근활동가의 의견과 기획자, 창작자, 활동가들로 다양하게 구성된 이사회의 의견이 합쳐지는 정기적이고 촘촘한 기획회의를 통해 만들어지고 순환된다.
문화숨의 방향에 맞는 지원사업을 고민하고 개별사업의 연결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원사업 없이 단체의 재정확보가 아직은 어렵지만 매년 총회를 통해서 올해 사업평가와 내년 사업계획을 논의하고, 문화숨 사업의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워크숍이나 학습, 집중 회의 등을 강화하고 있다. 문화숨은 계속 머리를 맞대고 뭔가 하나씩 시도해 보는 중이다.
“10년 활동하면서 만들어 놓은 건 동네사람들 밖에 없어요. 10년 동안 다양한 공모사업을 해봤죠. 공모사업을 하다 보니 잘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또 다른 공모사업으로 연결되고 이런저런 경력들도 쌓이더라고요. 공모사업 신청을 하면서도 언제까지 공모사업에 의존할 것인가 매번 생각해요. 10년 차가 되니 고민이 더 커져요. 연말 연초에 장기 비전을 새롭게 세우는 워크숍을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토론 안에서 문화숨이 어떤 비전으로, 어떤 도약을 다시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성남의 개발은 현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50년 동안 있었던 동네도 언제 없어질지 모를 상황이라고 한다. 개발은 이주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활동한 문화숨은 이런 변화를 보면서 문화적인 돌봄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하려고 한다. 돌봄이라는 의미도 다각적으로 보고 있다. 기후위기에 직면한 이 지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의 확장이 새로운 공모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지원사업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가 가파른 경사를 오를 때 기차바퀴가 혼자서 헛도는 공전 현상을 방지하지 위해 바퀴와 선로가 맞닿는 부분에 모래를 뿌린다고 한다. 문화숨이라는 기차에게 필요한 모래는 무엇일까. 지원사업일까, 마을 사람들일까. 특별한 노하우나 해결책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은 변함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리를 맞대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놓치기 쉬운, 알고 보면 정답은 늘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금처럼 뚝심 있는 문화숨이 되기를 응원해 본다.
황지원(육끼)
황지원(육끼)
문화기획자, 마을활동가. 이야기청 디렉터. 이야기를 듣고 엮고 잇는 일을 하고 있다. 서울과 고창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인스타그램 @memory.talk.house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 제공_문화숨 (페이스북) @munasum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