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너비의 작은 책으로부터 시작된 계기였다. 그 책은 우연히 눈앞에 나타나 예술이 주는 즐거움만을 추구하던 나에게 멈추어 생각해 볼 질문을 던져주었다. 1902년 독일, 카푸스라는 열아홉 살의 젊은 학생은 입대를 앞두고 대시인 릴케에게 자신이 쓴 시를 보내며 비평해 줄 것을, 자신의 앞날에 대한 조언을 청한다. 그리고 릴케는 답장을 보내온다. 이렇게 시작된 서신 왕래는 1908년까지 이어졌고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문학도들뿐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편지라는 형식은 당시 나에게 마음속 뒤편으로 미뤄두었던 답답함과 굳이 끄집어내어 고민하고 싶지 않던 현실의 상황을 살피는데 유효한 접근이었다. 그렇게 품게 된 하나의 질문 ‘어떻게 하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예술 행위를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릴케의 서신은 내 삶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질문에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수많은 릴케를 만났고, 살아있는 서신을 왕래했으며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질문이 이끄는 현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 <만질 수 있는 이야기>
  • <나무들의 밤>
코로나가 극심하던 2020년 여름, 경기도 안산의 청소년들과 만나 이전과 이후의 변화된 삶을 주제로 <만질 수 있는 이야기> 작업을 했다. 당시 학생들이 품고 있던 사회적 이슈가 청소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연극 작업은 그들의 몸을 고정(fixing) 하거나 저장(preserving) 혹은 보존(conserving)하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경험의 역동적인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다음 해 진행했던 <나무들의 밤>에서는 유휴공간으로 남겨진 안산 지역의 역사를 ‘나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해석한 작업이었다. 나무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가교역할을 해주고 학생들은 익숙하던 일상의 공간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관점과 그곳에서 보이지 않던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도전과제를 갖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작업은 행위를 통한 의미의 발견, 행위로 인한 성찰적 사고, 행위와 함께 변화된 삶을 추구한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현장 안으로 발을 디딜 때면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의외성과 예상을 벗어나는 변주로 인해 늘 긴장감을 품고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든든한 조력자처럼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예술교육가의 물성이다. 진행이 매끄럽기 위해 필수적으로 챙기는 다양한 물성이 있지만, 영감(inspire)을 주는 물성은 그 성질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영감의 어원에서부터 출발해 보기로 했다. INSPIRARE, ‘숨을 불다’ 혹은 ‘숨을 불어 넣어 주다’ 나를 숨 쉬고 숨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것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닮고 싶은 – 나무
스물여섯 여름, 공연을 몇 시간을 앞두고 무대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횡돌기가 골절되었고 다시 두 발로 걷는데 12주란 시간이 걸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몸과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때였다. 한결같음에 갈증을 느끼던 때였는지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부터는 인근의 공원에 나가 나무를 찾았던 것 같다. 왜 나무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같은 곳에서 기다려주는 나무가 고마웠다. 몇 시간이고 서서 바라보고 만져보고 속엣말을 주절거리고 나면 기울어있던 마음에 약간은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로부터 생겨난 습관인 것 같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지금도 난 나무를 즐겨 찾는다. 먼 곳에서 바라보면 분간이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개성으로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는 사람과 참 닮았다. 그런 나무에도 이름이 있으면 좋으련만, 받은 것은 무한한데 주는것은 미미해서 때론 애석하기만 하다. 나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나무가 품은 이야기와 신화 그리고 나무가 대변하는 상징을 듣고 있으면 경외심마저 든다. 내 것이라 말하기엔 익살스러운 농담 같지만, 자주 찾는 나무 하나 품고 사는 삶은 고단한 일상에 꽤나 큰 숨결을 불어 넣는다.
나누고 싶은 – 요리
어렸을 적부터 복스럽게 먹는다는 소리가 듣기 좋아 다양하게 ‘맛’을 취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호텔‧조리학을 전공하고 관련된 자격증도 취득하고 2년간 취사병으로 군 생활한 것을 보면 당시 나름 진지하게 맛과 요리를 고민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만들어 먹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레시피를 들춰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필요한 식자재와 용구는 무엇일지 상상해본다. 뜨거운 불과 기름, 뾰족한 칼날 앞에 당당히 서서 주어진 시간까지 몇 가지의 요리가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한다. 준비하는 과정부터 결과물이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너무 요란해도 안되고 주변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며 뜨거운 것은 뜨겁게 차가운 것은 차갑게 완성되어야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하는 모든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 순간에 살고 있어야 한다.
이상하리만치 요리는 내 작업과 닮았다. 물론 이전만큼은 아니겠지만 가끔 해방감을 느끼고 싶을 때 잠시 단절하고 요리하며 스스로와 소통하곤 한다. 이 세상에 다양한 명상법이 존재하겠지만 요리하는 순간은 나에게 숨결을 불어 넣는 나만의 ‘요리 명상’(cooking meditation) 시간이다. 식사한다는 것이 일상의 잦은 행위라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의 내가 있게끔 만들어준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떠올려 본다면 단연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숨결이 가장 먼저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품이 많이 들고 정(精)과 성(誠)이 담긴 요리를 할 적에는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 무엇을 나누고 싶은지, 왜 나누고 싶은지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먹고 나면 눈앞의 유형은 사라질 테지만 시간을 보내고 기억을 남기며 정성이 담긴 무형의 마음은 오래도록 머무를 것이다.
함께하고 싶은 – 공동체
내 일과 작업이 즐거운 이유는 사람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오고 가며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크기도 형태도 만남의 속도도 경험의 정도도 모두 다른 다양한 공동체가 마치 하나의 고유한 마을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유목민이 되어 그들과 함께 유랑을 떠난다. 겉도는 유목민의 삶이 아닌 안전한 고요의 마을에 온 것처럼 마음이 정겹고 편안하다. 성향상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분위기보다 덩그러니 혼자 있기를 즐겨 하는 편인데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고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작은 연대를 만들어내는 다부진 공동체는 웃음과 진지함 속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전제하고 있어 늘 먼저 손을 내밀게 된다. 그래서일까 잠시 타지에 나와 홀로서기를 이어가고 있는 요즈음 내밀고 붙잡고 끌어당겨 주던 수많은 손과 손의 온기가 그립다. 크고 작은 공동체가 도처에 즐비하며 작당을 모의하고 고민을 함께하던 그 환대의 품은 내가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숨결이었다.
나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주로 느낌과 관련이 있다. 내가 가진 재산 목록 1호는 경험이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 느낌은 진화해 왔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느낌은 대체로 내가 살아오며 만났던 기억으로부터 기인한다. 닮고 싶은 나무, 나누고 싶은 요리, 함께하고 싶은 공동체까지 종합해 보면 닮고 싶었던 누군가가 있었고 나눔을 받았던 누군가가 있었으며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울창한 숲을 이뤄보고 싶다. 이름 없는 나무가 아닌, 각자 고유한 기억과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숲을 일구고 싶다. 그래서 세상엔 명(明)만이 아닌 암(暗)도 공존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실천하고자 애쓰는 젊은 예술교육가를 많이 만나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하는 작은 실천이 사람의 숲을 울창하게 일구는 자양분이고 싶다.
안용세
안용세
창의적인 움직임과 시민연극 그리고 사회 참여 예술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드라마를 기반으로 아동과 청소년 그리고 일반 시민의 삶을 반영시키고자 한다. 현재 지역사회와의 상생 방안을 모색하며 예술교육실천가의 삶을 펼치고 있다.
홈페이지 an-yongse.com
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