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수습생으로 일하던 옷 수선 가게에 단골 할머니가 있었다. 기성복을 사면 항상 소매가 길어서 줄여 입는다며, 자기처럼 팔이 짧은 사람도 있고, 보통보다 다리가 긴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생긴 모양이 다른데 공장에선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옷만 찍어내는지 모르겠단다. 파는 옷 치수에 대략 내 몸을 맞추는 데 익숙했던 나는, 평소라면 그저 예민하시네, 불편하셔서 어째, 여기고 말았을 할머니의 말을 곰곰 생각해 봤다. 사람의 몸은 다 다른데 고작 ‘대, 중, 소’ 이렇게 단순하게 나눠 옷을 파니 어깨가 불편하고 바짓단이 질질 끌리는 거였다. 같은 일이라도 나는 당연하다고 넘어가지만, 누군가에겐 불편하거나 부당할 수 있다. 나 말고 타인의 감각도 살피며 살자는 얘기는 ‘시민기획단 나침반’(이하 나침반)에서 활동하며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나침반’은 2015년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의 독서토론 진행자 과정을 수강한 시민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책을 읽고 토론하다 보니 작가를 만나고 싶어졌고, 그렇다면 북토크를 기획해 보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 60여 회의 강연을 열었다. ‘감수성 올림: 아프다고 말하기 괜찮냐고 말걸기’ ‘처음부터 다시 연대를 꿈꾼다’ ‘돌봄이 없는 돌봄’ 등 강연 제목만으로도 대략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동료 시민의 약한 목소리, 약한 목소리조차 지우려는 강고한 힘, 그걸 넘어서는 연대와 사랑이다. 이런 주제 곁에서 세상을 보니 매일 무슨 공익 캠페인처럼 올바르거나, 시민단체 활동가처럼 용기 있을 거라 혹시 기대할까 염려도 된다. 사실 우리는 유독 피곤한 날 버스에서 자리 양보할 일 생길까 봐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쓰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장바구니가 없는 날은 비닐봉지를 그냥 좀 주면 안 될까 바라기도 하는 그저 그런 약한 신념의 소유자들이다. 다만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좀 많고, 이 걱정의 근거를 찾고자 책을 읽고, 실천으로 옮겨보고자 애쓰며, 함께 읽는 사람으로 서로의 곁을 살피는 관계,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침반이다.
지난해에는 수원문화재단에서 문화 다양성에 관심 있는 모임을 지원하는 ‘웰컴투 수원’이라는 사업에도 참여했다. 때마침 모임원 여럿이 에세이스트 은유 작가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란 책을 읽고 있었다. 미등록 이주 아동을 인터뷰한 르포인데, 미등록 이주 아동이 겪는 일상 속 불편이 예상보다 컸다.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 국가자격증시험 응시, 통장 개설은 남의 일이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방역 패스 인증을 할 수 없어 말 못할 불편을 겪었다. 뭣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체류 자격을 얻지 못하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밖에 못하더라도 이들은 강제 추방을 당한다. 이것은 이주민으로 겪는 차별을 넘어서는 인권 문제다.
이 책 한 권은 마치 블랙홀처럼 평소 우리가 관심을 두지 못했던 동료 시민의 이야기를 끌어당겼다. 있지만 없다 여기며 거리두기를 했던 이야기들, 이주민, 난민, 성 소수자 등 주제와 관련한 책을 차근차근 읽고 토론할 수 있었다. 인권운동가 미류 작가가 쓴 『난민, 난민화되는 삶』, 기록 활동가 희정 작가의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등의 책을 만났다. 우리 사회 차별과 편견의 허들을 좀처럼 넘지 못하는 주제들, 마음의 장벽이 높은 이야기들인데 함께 토론하며 우리는 변화했다. 잘 몰랐던 것에 대해 인정하고 미안해하며 더 알아가겠다 다짐했다. 주변에서 혹여 이런 주제에 대해 혐오하는 말을 할 경우 그냥 듣고 넘기지 말고, 적어도 우리가 이해한 만큼은 이해시킬 수 있도록 애써보자는 말도 했다. ‘웰컴투 수원’을 마치며 모임원들은 이런 후기를 남겼다.
“약자, 소수자에 대해 쓴 책을 더 많이 보고 시선을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정희)
“일곱 번의 만남을 통해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기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미처 몰랐던 세계에 대해 접근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미숙)
요즘 나침반은 책을 넘어 영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아카데미와 칸이 인정한 한국 영화여서가 아니라,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영화만 한 콘텐츠가 또 없기 때문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란 다큐멘터리는 나이 차가 55살인 할머니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청년 사진작가 JR의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과 사회적 약자의 곁을 지키는 예술 활동이 인상 깊은 영화다. 편견 없고 겸손하며 용감한 바르다의 모습을 보며 저런 어른, 저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공기 탁한 실내에 창을 연 것처럼 때로는 영화가 숨통을 터주기도 한다.
올해 나침반은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인 ‘인디그라운드’의 커뮤니티 시네마 기초지원 단체로 선정됐다. 솔직히 커뮤니티 시네마가 뭔지 잘 몰랐다. 관심 있는 독립예술영화를 멀리 서울까지 가지 않고 수원에서 볼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지원했는데 덜컥 되고 말았다. 영화를 매개로 지역 공동체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쌓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이 커뮤니티 시네마의 정의란 사실부터 요즘 공부 중이다. 공부하며 활동하고 활동하며 공부하기는 우리의 특기이자 숙명 같기도 하다. 첫 공동체 상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밀려난 자리’란 제목으로 재건축에 들어간 둔촌주공아파트의 고양이 이주 프로젝트를 다룬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들의 아파트>, 재개발이 한창인 수원 파장동에서 촬영한 송원준 감독의 <파장동>, 역시 재개발 지역인 신도림이 배경인 양승욱 감독의 <가족의 모양>을 상영하고 제작진과 관객이 대화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고양이와 사람, 약자들이 밀려난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두어야 할까? 그 대답은 물음표로 남겨둔다. 어떤 답이 나올지 가늠해 보며 상영회를 기다린다.
나침반의 모든 배움과 활동이 시작된 지점은 작고 사소한 ‘질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을 수시로 안고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렇게 이주민, 난민, 성 소수자의 입장이 돼 본다. 왜 보고 싶은 독립영화는 서울에서만 상영할까? 그렇게 수원에서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알아본다. 답을 찾는 이 여정을 더 많은 동료 시민과 함께하다 보면 서로의 손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가닿고 조금은 나은 사람,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감히 바란다.
예전에 수선가게에서 만난 할머니가 그랬다. 내 몸에 맞춰 옷을 고쳐 입으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고, 잘 맞게 수선해 주는 내 친구가 참 고맙다고. 앞으로 나침반의 활동도 세상이 정해 놓은 규격에 맞추기보다, 별처럼 다양한 몸에 맞춘 옷처럼 고쳐 입고 쓰는 그런 수선, 그런 수고가 될 수 있을까?
신연정
신연정
시민기획단 나침반 단장. 책과 영화 관련 강연을 기획하고 기록한다.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감수성 올림-아프다고 말하기 괜찮냐고 말걸기> <돌봄이 없는 돌봄> 등을 나침반 단원들과 공동 기획했다. 전 KBS 라디오 구성작가, 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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