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서 소통과 교류가 일어난다. 공동체 공간에 문화나 예술을 매개로 교류가 일어나고,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주민)의 활동과 경험을 통해 일상의 삶에 ‘틈’이 생긴다. 이 틈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쌓여 그 공동체의 ‘문화’가 된다. 문화란 무엇인가. 작은 혹은 큰 어느 공동체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해되고 즐기게 되는 놀이나 정서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소통은 이 그룹의 성격이 되기도 하고, 결속력을 갖게도 하며, 그 일체감이 확장되어 다른 공동체에 새로운 문화로 전파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힘’을 갖는다.
요즘 우리 모두에게는 숨 쉴 만한 일, 숨 쉴 만한 세상이 필요하다. 문화가, 혹은 예술이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좀 숨 쉴 만한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이러스처럼 전파될 수 있을 만큼 힘을 가진 예술이 우리에게 숨통 트이는 백신을 놔줄 수 있다면 다시 삶의 경이로움을 실감하며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제주에서 일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상상창고 숨’ 박진희 대표를 만나 그간의 활동과 발자취를 들었다.
  • 해안마을 지도
  • 상상창고 숨
마을 식구라는 기적
2013년, 박진희 대표 가족은 아이들이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제주 해안마을에 입주하게 되었다. 학교와 교육에 대한 정보, 마을살이, 제주살이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학부형 모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토박이인 엄마도 이주해 온 엄마도 함께 모여 와인도 한 잔씩 나누는 모임이 즐거웠다. 개인적인 작업을 위해 마련했던 작은 공간은 어느새 동네 엄마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그즈음 모임에서 나온 생산적인 아이디어들을 실현해볼 공간을 마을에서 제안해 주었다. 아이들은 이 공간에 ‘상상창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 터에 자리 잡은 이곳은 해안마을 한복판, 해안초등학교와 마을회관과 마주한 자리다.
엄마들의 모임은 조금씩 체계를 갖추고,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 탐구하며 전 지구적 현실과 우리 삶의 문제들에 대해 지혜를 나누고 실생활에서 변화를 일으켜보는 실천적 모임 <살림공작소>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진 것은 이렇게 연결된 엄마들의 아이들. 어린 친구들이 내 생활 영역보다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눈을 들고 바라보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담장너머 소풍공작단>이라는 그룹이 생겨났다. 우리 집 담장 너머, 우리 마을의 경계 너머 세상을 향한 관심으로 더 큰 ‘나’를 만나보는 소풍놀이가 이어졌다. 집을 넘어선 우리 마을을 답사해보고, 이어서 주변 마을도 탐험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마을 이곳저곳을 오가면 어르신들과도 자연스레 마주치게 된다. 제주 어르신들은 속마음과 달리 표현이 뚝뚝하다. 제주 말끝이 그렇지않아도 짧은데 마지막이 뚝 떨어지는 억양이라 처음 듣는 외지인들은 화내시는 줄 안다. 박진희 대표 역시 초반에는 어르신들을 대하는 일이 실은 조금 무서웠다고 웃으며 회고한다. 그래도 살갑고 싶은 마음으로 노인회관에 자주 가서 손발도 주물러드리고, 이야기도 청해 들었다.
그렇게 듣게 된 마을 이야기들, 70여 년 전 10대 언저리를 사셨던 팔순 넘은 어르신들은 제주4·3 때 소실되었던 마을을 함께 다시 살만한 터전으로 일궈온 동지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주도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밀도 높게 발전한 도시형 지역인 제주시 신시가지 바로 옆 마을이라 변화의 영향 역시 진하게 받는 곳이라는 것도. 평생 밭을 일궈오셨지만, 그 사이 개발이 속속 이루어지면서 꽤 많은 밭이 어느새 집이나 타운하우스로 바뀌어 있다. 어르신들은 시간이 많아졌지만 노인회관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것 외에 다른 놀이를 찾지 못하고 계셨다. 소소한 만남으로 시작된 어르신들과의 교류는 지금까지 이어져 <마을예술학당>으로 발전했고, 뚝뚝 떨어지는 말투는 여전하지만 추운 겨울날 고생한다며 따뜻한 겨드랑이를 내어주시기도 하고, 우영밭(텃밭)에서 거둬온 채소를 한 아름 전해주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박진희 대표는 이렇게 이어져 온 인연, 한 마을에서 지금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식구’라 부른다. 코로나 시대가 되어 가장 아쉬운 것으로 이 식구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꼽을 정도다. 식구(食口). 그저 같은 행정구역 안에 모여 사는 관계에 그쳤을지 모를 이들이 함께 숟가락 담궈 찌개를 퍼먹고 한 솥의 밥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것도 그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 대해 진한 마음과 소중히 여기는 정성을 꾸준히, 정말 꾸준히 가져야 가능한 기적이다. 문화와 예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힘을 갖는다면, 이 ‘관계의 힘’이 만들어내는 것은 일상의 기적과 감사들이다.
<마을예술학당> ‘기억을 기록하기’
함께 꾸준히 만들어가는 변화와 공감
서로 식구가 되는 꾸준한 일, 그 과정에 예술이 개입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세심한 시선과 끊이지 않는 호흡, 그리고 서로의 속도에 합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박진희 대표는 이야기한다. 이 삼박자는 서로에 대한 믿음, 변화의 방향에 대한 공감을 만들어낸다.
<마을예술학당>을 통해 처음 마을 어르신들과 마주 앉았을 때 연필을 손에 쥐는 일을 겁내셨다고 한다. 전술한 대로, 이분들은 한창 배움이 있어야 할 시기에 제주4·3을 겪으셨다. 글을 익힐 기회가 없었고, 그렇게 당신들 손으로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일 없이 80여 년을 살아오신 분들이다. 함께 하고자 할 때 세심한 마음과 준비가 필요했다. 천천히 연필을 손에 쥐고 함께 선을 긋고,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예술가들이 미리 준비한 커다란 해안마을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에서의 삶과 기억, 추억들에 대해 함께 그림으로, 바느질로, 조각으로, 음식으로 기억해보고 기록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 못한다고 이 작업이 끊길 일은 아니었다. 스케치북과 그림 도구를 나눠드리고 일상의 일과 풍경을 다양한 시선으로 떠올려보고 기록할 수 있게 한 분 한 분 도왔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서로의 시간 안에 함께 이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뭐햄신게(뭐하는거냐)’로 시작되었던 낯선 자리는 이제 놀이의 터전이 되었다. 빙떡을 만들어 먹던 이야기는 가사가 되어 해안마을만의 노래 <해안빙떡>이 되었다. 백 년쯤 전 마을 훈장님이 해안동을 보고 감탄하며 썼다고 구전되던 시가 예술인들의 도움으로 다듬어져 <해안자랑가>라는 곡으로 완성되었다. 이 두 곡으로 어르신들과 함께 뮤직비디오도 제작하여 발표하였다. 어르신들의 생신과 마을의 대소사를 빼곡히 적은 해안마을달력도 만들어 나누었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며 마을 어르신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하신다고 한다.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 마음이라며 박진희 대표가 웃는다. 서로 믿고 있던 일들이 ‘실재’가 되어 우리 앞에 드러날 때,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해안마을의 예술가들과 어르신들 사이에 오고 간 영향, 그리고 마을의 변화는 그렇게 서로 감사할 수 있는 기억이고, 기록이었다. 이 커다란 ‘한 식구’의 기록은 다시 내딛을 다음 발걸음의 방향이 될 것이다.
  • <감감술래 작산아이> ‘아트베이스캠프 만들기’
  • <감감술래 작산아이> ‘내 창으로 내창 보기’
하나임을 실감하기
상상창고 숨이 이어가고 있는 또 다른 줄기의 프로그램 <감감술래 작산아이>(이하 <작산아이>)에 대해 좀더 질문을 이어갔다. ‘감감술래’는 ‘감각을 감각하는’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작산아이’는 제주어로 철없는 큰아이를 뜻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몸집은 커졌어도 아직 상상력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아이들을 부르는 말이다. 이른 사춘기를 겪고 있는 초등학교 3~6학년 친구들과 함께한다.
<작산아이>는 ‘질문 워크숍’으로 시작한다. ‘내가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루 중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나의 아지트는?’ 심리테스트 하듯 쉬운(?) 질문 같지만, 주로 ‘나의 지금’을 묻고 있다. 손안의 작은 기기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시선을 들어 넓은 실재를 향하게 하는 시작에 ‘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저 일상이라 스스로 잘 떠올리지 않고 살던 질문들은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깨우고, 일상을 깨운다. 받은 질문에 답하는 놀이는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하고 있는, 해야 하는 질문들. 그렇게 나를 감각하는 것으로 성찰이 시작된다.
나에 대한 질문에 이어 ‘우리’에 대한 질문과 놀이가 진행된다. 우리가 놀아보고 싶은 공간, 우리에게 필요한 놀이 아지트에 대해 함께 계획하고 만들어보는 ‘아트베이스 캠프’는 이 시절의 아이들에게 꽤 숨통 트일 수 있는 상상거리였을 듯싶다. 비록 모일 시간이 적어 미리 나눠준 제작키트로 각자 연구하고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놀이를 이어갔지만, 이들이 머리 맞댄 그 어딘가에는 환상적이고 그럴싸한 그들만의 아지트가 실재했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디지털 네이티브인 이들에게 온라인으로 미리 소통하고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오히려 오프라인에서의 활동을 더욱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지트를 만드는 놀이는 확장되어 마을 곳곳, 주변 자연 탐사로 이어진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의 폭과 수를 늘려간다.
‘나’에서 ‘우리’로 이어지고 ‘나의 주변’으로 연결되는 <작산아이>의 예술놀이에 관해 박진희 대표는 “스스로 질문하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다움을, 함께하는 우리를 감각하는 시간 속에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질문을 만들어가는 것은 삶의 가치를 귀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유의 시간과 놀이는 나를 변화시키고, 그런 ‘나’들이 모이고 무수히 커져 ‘우리’를 만드는 것이라 믿고 있다는 이야기도 더했다. 해안마을의 <작산아이>는 예술놀이를 통해 이것을 실감(實感)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상상창고 숨은 ‘삶 닮다 예술, 예술 닮다 삶’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다. 삶과 예술이 서로 닮다 보면 결국 둘은 동의어가 될 테다. 예술적 감수성으로 내 삶을 세세하게 더듬고 통찰하는 일은 ‘작은 나’ 안에 머물기 위한 행위일 수가 없다. 그 통찰들이 ‘큰 나’를 만나게 하고, 그 ‘큰 나’는 사람 사이를 넘어 시간과 공간과 생명과 전체를 아우르는 ‘아주 큰 나’임을 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상상창고 숨은 이 연결성을 함께 실감하기 위해 주변 식구들과 ‘작은 나’를 알아가는 놀이부터 차근차근, 우직하고 꾸준한 걸음을 걷고 있다. 이것이 ‘모두가 하나’임을 실감하게 하는 묵직한 힘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이가영
이가영
작가. 기획자. 서귀포 하례마을에 사는 in-situ 아티스트. 공연 연출과 제작을 전공했고, 종종 그림을 그린다. 삶과 예술적 활동이 분리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아트 프로젝트를 창작그룹 [꿈꾸는고물상] 그리고 [MOC] 멤버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하례마을 커뮤니티공간 [우리마을해픈살롱 내창]의 프로그램들로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중이다.
yi.ronica@gmail.com
해픈살롱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happensalon
꿈꾸는고물상 블로그 harley108.egloos.com
사진제공 _ 상상창고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