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원봉초등학교 담벼락을 끼고 돌다 보면 그저 그런 상가주택 사이에 멋진 통나무집 하나가 눈에 띈다. 초록이 싱그러운 화단과 로봇 손을 잡고 걷는 꼬마가 그려진 벽화, 청개구리가 지키고 선 우편함이 아기자기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당장이라도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들 것만 같은 ‘초롱이네도서관’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과 친구들, 동화책 읽는 어른들에게 거실을 내어주며 시작한 것이 벌써 22년째, 2000년 지금 이곳으로 옮겨온 후 계속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변함없는 속에서도 시대와 흐름에 따라, 그렇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공유지(commons)’로서 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며 조금씩 의미를 달리해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의 소중한 이야기를 만들고 지키고 있는 초롱이네도서관 오혜자 관장을 만났다.
딸과 친구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거실을 개방하면서 초롱이네도서관을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여러 기사에서 보았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셨나?
시작은 굉장히 사소했다. 지역신문 기자, 시인, 서점주인 등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돌려보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자기 작업실을 개방하겠다고 해서 우리는 거실을 개방하겠다고 한 거다. 나무 밑에 평상 하나 펴 놓는 것은 엄청난 수고는 아니지 않나. 1년 정도 실험해보면서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보자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평상을 펴 놓으니 거기 앉아서 만나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담론이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20대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고 여러 시민사회단체와 관계가 있었다. 1990년대를 지나며 시민운동을 했던 여러 활동가가 뿌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저 역시 아이가 생기고 생활인으로 지역주민으로 내 마음에 품었던 사회의 변화와 미래에 관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주도적인 의식은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토대로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인지는 숙제였다. 그러나 그것을 찾는 사람 눈에는 보이는 것 같다. 여기서 만나는 많은 사람이 각자 마음속에 여러 고민과 자기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그럼에도 민간에서 시민주도형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으실 것 같다. 많은 문화예술(교육) 공간도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 돌아보니까 항상 많이 잘 놀았더라. 최선을 다해서, 온몸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밤잠 안 자고 놀았던 것 같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궁합이 맞았고, 열린 공간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래야 돼” 하기보다 “이거 해보자” 하고 열심히 해보다가 “아님 말고”. 한 10년 동안 정말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때그때 재미있게 했었다. 공공의 지원금이 없어도 축제도 하고 문학 행사도 하고 그림자극도 만들면서 몸으로 때우고 아이디어를 내면서 놀았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만나서 육아 스트레스도 풀고 또래의 경험을 공유하고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는 쾌감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 5년간은 개인적인 자금으로 운영했는데, 혼자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말을 꺼내니 “진작 얘기하지 그랬냐”고 하더라. 2005년부터는 후원회원 제도가 생겼다. 2017년에 도서관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다시 세우기’에도 초기 후원회원들이 엄청 힘을 보태주셨다. 지역기금의 지원도 있었는데, 자생력을 갖고 뭔가 하고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공공단체에서도 후원할 만한 신뢰도가 생긴 것 같다.
초롱이네 도서관 전경과 내부
초롱이네도서관을 ‘창의적인 협치의 공간’이라고 소개한 글을 보았다. 그런 표현이 가능하도록 유지해 나가는 비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처음에 내가 속한 책모임뿐 아니라 몇 개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 공간에서 주도적으로 책모임을 하실 분들을 새로 모집했다. 그것이 첫 번째 책모임이자 운영을 공유하는 공동체 모임이 되었다. 지금은 10명 정도 운영위원이 구성되어 있다. 실무진 몇 명 빼고는 책모임, 문화모임, 찾아가는 이야기 선생님 등 각 모임의 장이 운영위원으로 활동한다. 오래된 분도 있고 갓 뽑힌 분도 있는데, 서로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 공간이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계속 공유하고 의견을 중재하거나 조율한다.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고 할 때, 미리 경험하거나 학습할 방법이 별로 없지 않나. 그래서 실패를 많이 한다. 나를 따르라고 하다가 내가 고꾸라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너무 믿었다가 배신(?)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공동체가 깨지는 일도 많다. 내가 가진 것이 적어서 나도 나를 못 믿으니까, (웃음) 나에게 귀 기울이면서 내가 확신을 가지게된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대입시켜 보는 것이 유지해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관장님이 만들고 주도했지만 함께 운영하는 분들 모두 ‘우리의 공간’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독서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가족 간에도 친하게 지내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같이 보는, 진짜 마을 공동체 같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맨땅에서 구르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초창기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멤버가 빠지면 그다음에는 구조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필요하다. 저희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2007년에 ‘희망의 작은 도서관’이라는 사회적 후원을 받으면서 지역사회로 나아가게 됐다. 활동도 커지고 공공성을 더 띠게 되면서 공동체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지역의 청소년, 복지관, 공부방을 비롯해 네트워크가 더 넓어졌다. 어린이에서 청소년기로 성장하는 과정. 공간도 성장한다고 본다.
공동체에서 지역사회로 네트워크가 커지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지역사회의 다른 어떤 것들과 계속 연결해나가는 일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서는 과정이 있었다면 네트워크를 통해 같이 의지하면서 서로 쓰러지게 않게 만들어주는 경험을 했다. 혹시 뿌리의 힘이 약해지더라도 서로 지탱하면서 생존, 성장할 수 있다. 위기에 강하게 만들어 주는 부분도 있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제를 설정할 때도 굉장히 큰 도움을 받는다.
도서관 내에서 책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하는 것을 넘어 다른 기관에 찾아가는 활동으로 진행하거나 자유학기제 수업과 연계하기도 했었다.
그림책 읽어주는 품앗이는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초창기부터 당연하게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우리 일의 가치를 충분히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인가. 바깥으로 나가야 여기도 지속된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니까 활동가들 역시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게 되고, 자존감이 더 높아지고, 사회적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이곳을 계속 이용해야 할 자기 이유가 생겼다.
  • 가을동화잔치_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 놀이(2018)
  • 문화동아리_노래가 있는 시
책모임, 인문학 강좌, 북스테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으로 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프로그램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무엇인가?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프로그램을 못하면서 우리가 잊히는 거 아닌가, 앞으로는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도서관의 역할이나 의미가 이전과 달라지는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시간이 있을 때 지나왔던 것을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겨보자고 했다. 그때 모두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가을동화잔치’였다. 2000년부터 2019년 20주년 축제 때까지 한 해도 빼먹지 않고 열었는데, 이 축제가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던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가 문화공간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이 축제 때문이다. 그냥 동화 속 친구가 되어서 만났다. 6월부터 뭘 하고 놀까 하는 회의를 시작해서 10월 셋째 주 토요일에 축제를 열 때까지 계속 만났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아무 의무나 목적 없이 우리가 같이 놀려고 한 거니까, 사실 어떻게 돼도 부담이 없었다. 이러고 놀자, 저러고 놀자, 힘들어서 하지 말자고도 하면서 20년을 이어온 거다. 이건 억지로 안 되는 거다. 다른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는 것을 몸으로 느껴야만 아니까. 그동안 꾸준히 벌려왔던 다른 여러 활동의 집합체 같았다. ‘덕분에 매일이 축제였어’라는 슬로건도 나왔다. 유튜브에 영상으로도 올려놓았다.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과 거점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신 부분을 조금 더 이야기 해달라.
책모임을 온라인으로 하게 되고, 각자 읽고 카톡이나 밴드를 통해 공유하는 것을 권장하게 되면서, 가상의 공간에서도 만날 수 있다면 거점의 역할이 달라져야 하나 싶었다. 2019년만 해도 우리가 여기서 매일 느끼는 공간의 경험을 북스테이 같은 것을 통해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공간으로 경험과 추억을 만드는 것이 어렵게 되니까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뭔가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고 아직 변화를 느끼는 중인가?
답은 항상 그 당시에는 못 찾는다. ‘지나고 보니 그런 뜻이었네’ 그렇더라. (웃음) 그러려면 자기 합리화도 좀 있어야 하지만 항상 유동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그때의 상황에서 준비된 것으로부터 어떻게든 한 발 나가보려는 노력이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주더라. 그 한 발짝이 자신의 색깔이 되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초롱이네도서관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20주년 행사하면서 도서관을 이용했던 아이들이 짧은 영상을 보내왔다. 군 복무 중인 친구도 영상을 보내왔다. “제가 체대에 갔지만, 책은 많이 읽고 있습니다”라면서 헬스장에서 아령 드는 모습을 찍어 보낸 청년도 있다. 초창기 대출카드를 수기로 썼었던 1호 대출 회원은 이 근처에 사는데, 20주년 행사 이야기를 듣고 자기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다며 찾아왔다. 기차가 나오는 책을 유독 좋아했던 한 친구도 와서 지금 철도대학교에 다닌다고 도서관의 어른들에게 근황을 얘기해 줬다. 잘 자란 모습을 보여주러 온 아이도 대견하고, 그 아이를 응원해 주는 동네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이 공간을 유지하는 게 아이들의 흔적, 지난 시간의 기록 같은 것들이 계속 남아있게 하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 더 디테일하게 연결할 방법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초록, 처음을 기록하다」라는 기록집을 내셨다. 동네기록관으로서 역할을 넓혀가는 건가?
기록집 외에 가을동화잔치, 찾아가는 이야기 선생님, 아이가 행복한 마을 만들기(해피아이) 네트워크에 관한 세 권의 부록을 냈다. 영역이 다르고 같이 공유할 사람들이 달라서 따로 묶었다. 동네기록관의 역할은 아직 잘 모르겠다. 공간, 거점으로서 지속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라서다. 그래도 5년간 진행하다 보니 각 동네, 공동체마다 어떤 이야기를 정리하거나 만들어낼 것인가 관심이 좀 있다. 일단 1차 연도에는 우리가 가진 이야기를 좀 정리해두자 싶었다. 그것을 토대로 또 쌓아나가야 하니까. 앞으로는 여기에 덧붙여 지금 이 공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시민기록가, 마을기록가 역할을 해보고자 도서관 활동가들이 구술하고 녹취하고 기록을 정리하는 것도 배웠다. 시간이 조금 축적된 공간이니, 우리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작년부터 시작해서 5년 동안 동네기록관으로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건가?
그렇다. 5년 후에는 뭔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청주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작년에 10개 팀, 올해 5개 팀이 더 들어왔다. 올해는 5팀씩 세 모둠이 작은 네트워킹을 하고 있다. 예술 영역에서도 미술, 회화와 무용, 공연 쪽에서도 참여하고 있다. 그들의 기록 방식은 또 다를 것이다. 이미지로, 사진으로, 몸과 움직임 같은 것으로 아카이브를 해보겠다는 팀도 있다. 시민 참여형 프로젝트라서 외부에서도 주목을 받는다고 하더라. 살아 움직이는 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으니 우리가 대화하고 의견을 내고 의견이 모이는 과정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록이 될 것 같다.
  • 책대출장(1999~)
  • 초롱이네도서관 기록집
문화예술 거점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분을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우리 슬로건은 ‘이야기가 사는 집’이다. 꼭 도서관이 아니더라도 자기의 이야기, 마을의 이야기, 공동체의 이야기가 읽어지면 매력적인 공간이 되고 또 다른 이야기가 계속 써질 수도 있을 거다. 그런 고민을 조금 더 보태고 다듬어서 자기 스토리텔링이 되면 좋겠다. 공간이 예쁘고, 꽃을 많이 심고, 관리가 잘 되고, 안정적인 운영 예산이 있다고 해서 거점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거점의 중요한 역할은 누구에게나 있는 이야기를 잘 포착하고 정리해서 풍성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옛날이야기에는 원형이 있고 시대마다 덧붙여지거나 빠지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 자체가 원형이고 매력이고 재미다.
마지막으로 [아르떼365]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린다.
공간과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공간도 그 안에 있는 사람처럼 변화한다. 그런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다고 불안해하기보다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공간의 나이듦과 변화를 기대하면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활밀착형 문화공간은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정해놓고 가기보다 삶의 모습처럼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즐기는 여유나 여지를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끝까지 지치도록 여한 없이 놀아봐야 한다. 끝까지 할 만큼 해야 후회가 없고 그게 또 씨앗으로 남는다. 흩어진 씨앗들이 다음에 또 다른 무엇으로 움직인다. 그게 시간이 주는 에너지다. 그것을 알고 느끼면 지금이 그다지 두렵지 않다.
오혜자
오혜자

청주교대를 졸업하고 학교로 가지 않고 마을도서관을 열었다. 책이 있는 공간과 초롱이네도서관이라는 이름에 오래 머물다보니 그냥 정체성이 된 것 같다. 충북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의 일도 함께 하고 있다.
arte365
남은정
프로젝트 궁리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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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 제공 _ 초롱이네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