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수 없는 이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후위기를 삶에서 감각하는 것은 이러한 상실에서 기인한다. 나의 편안한 삶 저 너머에 사라지는 숲과 녹아내리는 빙하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최근 그리스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2,500살 먹은 올리브 나무가 불타 죽었다. 어른 열 명이 빙 둘러서야 겨우 감쌀 만큼 거대한 이 나무는 최근까지도 열매를 가득 맺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나무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화재로 사라진 수많은 것 중 이 올리브 나무가 특별히 마음에 남은 것은 아마도 긴 세월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기후 재난의 파괴력과 어떤 ‘이야기’의 종말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500년의 세월에 담긴 나무와 많은 이들의 시간을 상상해 본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부터 나무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사람, 그리고 나무에서 쉬었다 간 이름 모를 새들과 벌레들…. 이것은 그들 모두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나무는 시간 너머로 사라진다. 남은 이들은 멈춰버린 이야기 앞에서 슬퍼한다.
몇 년 전부터 ‘생태 불안’ ‘기후 슬픔’ ‘기후 우울’이라는 말이 나타났다. 끝없는 폭우와 홍수, 산불과 이어지는 가뭄으로 녹아내리는 것은 빙하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도 빙하처럼 조금씩 녹아 형태가 바뀐다. 나무는 떠났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뀐 일상을, 지구의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 비록 예전처럼 단단하지는 않더라도.
  • 화재 이전의 올리브나무
    [사진출처] Apostolis Panagiotou 트위터
  • 화재로 소실된 올리브나무
    [사진출처] Apostolis Panagiotou 트위터
차 한 잔으로 시작하는 기후 이야기
파리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되던 2015년, 필자는 캐나다 출신의 배우이자 예술교육 전문가 프란신 듀롱(Francine Dulong)과 함께 관객참여형 공연예술컴퍼니 블루밍루더스(Blooming Ludus)를 창단했다. 필자는 그 당시 비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참이었고, 프란신은 예술을 통해 고향의 대자연을 다시 탐구하고자 했다. 우리는 막연히 ‘사라질 것만 같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블루밍루더스를 시작했다. 그때의 우리는 기후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조차 잘 쓰이지 않던 때였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겨우 인지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좀 더 해맑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놀러 오는 곳”이라는 소개 문구와 함께. 블루밍루더스는 이야기와 놀이를 나누며 다양한 커뮤니티와 함께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주제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영국에서 시작한 블루밍루더스의 여정은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다가 지난해 코로나19를 만나 온라인 세계에 잠시 머물고 있다.
사라질 것만 같던 것들이 정말로 사라졌을 때, 블루밍루더스는 함께 차를 마시며 기후위기 속 예술가의 일상을 나누는 온라인 모임 ‘기후정의 티타임’을 시작했다. 이 자리는 기후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한 단절의 경험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슬프고 지칠 때도 지구 저편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이어갈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 나에게도 지구에도 너그러운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임은 이후 총 12명의 국내외 예술가들이 발제자로 함께한 ‘블루밍루더스 그린포럼’으로 발전되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약 30명의 예술가 및 기획자, 예술행정 관계자 등이 참여했다. 포럼에서 소개된 이야기는 아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후변화 속 행동하는 힘
올해 가을 네 번째 ‘기후변화연극행동(Climate Change Theatre Action, CCTA)’이 시작된다. 격년으로 진행하는 이 행사는 매년 50명의 극작가가 쓴 단편 희곡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진행된다. 집에서, 학교에서, 극장에서, 또 거리와 마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지구를 위해 연극을 만들고 ‘행동’할 것이다. 블루밍루더스는 지난 회에 이어 올해도 참여한다. 올해의 주제는 ‘그린뉴딜’이다.
사람들에게는 함께 슬픔과 불안을 녹여낼 힘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녹아내리는 빙하에 담긴 거대한 지구의 삶의 서사를, 오래된 이야기들을 읽어 나가며 기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죽음의 바로 이면에 생동하는 힘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의 또 다른 힘이 되어 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나씩 이야기를 들어 나가면 된다. 올해 기후변화연극행동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관심을 두고 보자. 그리고 블루밍루더스의 ‘기후정의 티타임’에 가벼운 마음으로 차 한 잔 마시러 오라. 어색하다면, 주변 동료들과 여러분만의 티타임을 기획해 보자. 같이 미래를 상상하고 지금의 지구와 우리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과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전 세계 어린이·청소년들은 지금도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forFuture)’에 결석 시위를 하고 있다. 돌아오는 9월 24일에는 전 세계적인 기후 파업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가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녹여내고 있다.
이혜원
이혜원
다국적 공연예술컴퍼니 블루밍루더스의 공동예술감독으로 놀이와 오브제, 움직임을 통해 연극을 만들며 지구의 다양한 울림, 만남의 감각을 전하고자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벨벳토끼>, 멧돼지들을 위한 <바위가 되는 법>, 여성들을 위한 <남의 연애>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최근 기후위기 속에 태어난 아기들을 위한 소리극 <환영해>를 만들었다.
haeweon_yi@hotmail.com
www.bloominglud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