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사이가 틀어지면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보편적 교훈이다. 한때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가까웠던 이들끼리도, 무슨 이유 때문에 수틀리면 순식간에 남남 되는 건 일도 아니다. 뭔가를 키우고 기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이 훼손되는 것은 잠깐이면 되는 것이 세상의 희한한 이치이다.
김한민 작가는 그래픽 노블 『혜성을 닮은 방』에서 관계를 식물에 비유한다. 너와 나 사이에서 싹트고 관계의 상태에 따라 자라는 하나의 살아있는 식물. 그것은 관계가 무엇이고 그 실체가 어떤지 잘 보여준다. 관계라는 백지장을 맞잡은 두 사람이 함께 챙기면서 물도 주고 햇볕도 쬐게 해주면 그 식물은 활력과 생기가 넘친다. 둘 중 한쪽이라도 소홀해진다면? 조금씩 마르다 언젠가 영원히 시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도 그러한데 자연과는 과연 어떠할까? 생태계의 엄연한 일원인데도 거의 기억상실증 수준으로 이를 망각하고 사는 인간은 갈수록 자연과 멀어지기만 한다. 주변을 둘러보라. 인공의 인프라는 날로 증가하고, 자연적 요소는 끝없이 제거되고 있다. 그나마 남긴 나무는 댕강댕강 가지가 다 잘려나가고, 콘크리트로부터 자유롭게 노출돼 숨 쉬는 땅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환경파괴와 멸종의 뉴스는 이제 지루한 수준. 눈 하나 꿈쩍도 안 한다.
하지만 피해 갈 수는 없다. 망가진 관계를 즈려밟고 지나간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구의 건강 상태에 대해 거의 모든 빨간불이 켜진 지금, 희망이 별로 없으니 다 관두자는 패배주의도 설 자리는 없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해야만 한다. 멀어지고, 어색해지고,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모든 이에 의해서 모든 분야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그것이 생태계와 민주주의와 닮은 점이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것이기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 『혜성을 닮은 방』 (김한민, 세미콜론, 2008)
  • 『살아있다는 건』 (김산하, 갈라파고스, 2020)
그런데 어떻게? 생태계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아래 제시하는 바는 물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무슨 방법이든 효과적이려면 오히려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 생태계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책 『살아있다는 건』에서 발췌한 몇 가지 단상으로부터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계절의 일부가 되자. 인간은 외부의 온도가 변해도 내부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이기에 근본적으로 기후에 맞서야 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툭하면 너무 춥거나 너무 덥고, 딱 적당한 범위는 너무나 좁은 희한한 생명체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고 행동하기 나름이다. 일 년 내내 냉난방에 의지하는 사람은 계절의 일부가 아니라 언제나 그에 반하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약간의 추위나 더위가 느껴져도 외부의 에너지를 들여 당장 상쇄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자연과의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체온은 추가적인 에너지의 소모 없이 최대한 스스로 유지하다 정 안 되는 시점부터 열원 또는 냉원을 찾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적당하다. 겨울철 반소매, 여름철 스웨터, 모두 당연히 안 될 말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현재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자연과 길항(拮抗)적 관계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생태적 관계 회복의 첫 번째 급선무 과제이다.
둘째, 시공간의 현재성에 집중하자. 내가 처한 특정 장소와 시간대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이다. 더욱이 첨단 기술 덕에 앉은 자리에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작 이야기에 몰입하며 울고 웃는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전해주는 각종 콘텐츠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작 나를 둘러싼 주변은 언제나 지나치기만 한다면 결국 내가 처한 구체적인 환경도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두 발 딛고 선 땅을 아예 쳐다보지 않고서 생태적 소양을 운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 작은 화면보다 나머지 세상이 훨씬 신기하고, 다채롭고, 풍부하다. 눈을 들어 시선이 세상을 향하도록 하는 것부터가 출발이다.
셋째, 심장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자.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장바구니가 집으로 배송되는 세상에서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다이어트를 하거나 건강을 챙기기 위한 한 가지 방편 정도로만 논의된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활발히 작동하도록 진화한 것이지, 지금과 같은 정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비된 것이 아니다. 또한 가만히 있는 채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문명의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는 증가하기 십상이다. 조금만 나가면 될 것을 배달시키고,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엔터테인먼트에 익숙해지다 보면 창밖에서 능동적으로 삶을 구가하는 생명체들은 낯설고 꼴사나워 보인다. 밖으로 나가 해와 비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몸을 움직이면 잊고 있던 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음소거 되어있던 다른 세상의 소리도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한다. 물의 찰랑거림, 나뭇잎의 바스락거림, 의외로 우렁찬 새소리. 바깥세상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연결은 내가 그곳에 나감으로써 생겨난다.
넷째, 별 볼 일 없는 사이라도 마주치면 응시하자. 이 넓은 우주에서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사는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생태계의 일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두 관련이 있고 말하자면 공동운명체이다. 그런 이유를 떠나 다른 생명체를 마주할 때 잠시 정지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생물계의 보편적인 이치이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버섯이든, 일단 바라봐주자. 응시함으로써 그것이 나처럼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대신 조금이라도 그 대상에게 부담이나 불편을 주는 행위는 삼간다. 반드시 채취나 포획을 해야 한다든가, 꼭 고해상도 사진으로 포착해야 한다든가 하는 틀을 들이대지 않는다. 각자의 의지에 따라오고 가는 것을 존중하고 엷은 미소와 눈인사 정도만 점잖게 주고받는 세련됨으로 생태계를 함께 걷는 것이다.
다섯째, 작은 기회도 묵묵히 살리자. 사람의 발길에 치어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회색 도로에도 틈새를 보금자리로 삼은 식물이 있다. 그곳이 얼마나 살 만한 곳인지, 미래 가치가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작은 기회를 묵묵히 살린다는 정신 아래 삶을 삶답게 산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그들처럼 나의 작은 행동이나 관심사가 세상 전체에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를 내느냐에 천착할 필요 없다. 집에서 챙겨온 텀블러 덕택에 일회용 컵 쓰레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구와 생명을 생각해서 점심때 일부러 채식 메뉴를 골랐다면, 그리고 그렇게 작은 기회를 살림으로써 생태계에 해를 입히지 않은 흐뭇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어차피 이 거대한 생명계 속 하나의 일원으로서 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다이다. 그 작은 기회와 실천이 모이고 누적되어서 내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내가. 그리고 생태계와 조금이라도 회복된 관계가 말이다.
김산하
김산하
야생 영장류학자, 작가, 활동가이다. 인도네시아 구눙할리문 국립공원에서 자바 긴팔원숭이를 연구한 한국 최초 야생 영장류학자이다. 지금은 ‘제인구달의 뿌리와 새싹’ 한국지부장과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sanhakim@hotmail.com
이미지제공 _ 세미콜론, 갈라파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