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새로워지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매년 그해가 시작되는 1월의 ‘1’이라는 숫자 때문일까. 내 삶은 언제든 시작되고 늘 진행 중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달력을 발명한 위대한 고대인 덕분에 해마다 멈춰 숨 고르기를 하게 된다. 1월의 야심 찼던 생각과 마음이 계절을 지나면서 흩어지고, 불안을 갱신하는 시기가 2020년이었다면, 올해는 그러한 불확실함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조금 자랐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삶’의 추상성을 실체화 하기
1년 전에 비해 익숙해졌다지만 얼떨결에 감당하게 되었던 변화된 삶의 사이클에서, 사람들은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개인의 삶이 세상 이치의 거시와 미시 사이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놓이고, 사실 이것은 세상 이치와 무관함을 의미한다. 그것을 표준과 상식인 것으로 배우고 거기에 맞춰 성실히 살아온 이들이 마주했을 당황스러움을 어렵지 않게 보고 듣는다. 모두가 함께 겪는 보편적인 어려움 외에도,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무수히 많은 고통과 상처를 감히 다 상상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진리라 여겨왔던 것들에 회의감을 품어보는 것, 그것이 초래한 다양한 생명과 삶을 향한 폭력을 직시할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저마다 자기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스스로 정의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 등이 큰 희망이다. 이런 변화무쌍한 시절, 설마 문화예술교육은 여전히 ‘지역특성화’와 ‘꿈다락’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각자 삶의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자각과 문제의식이 넓고 깊게 확장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문화예술교육 전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함을 의미한다. ‘전체’란 관점과 태도(철학), 실행 구조와 실행 문화, 문화예술교육을 표현하는 언어, 가치 체계가 반영된 사업 카테고리, 행정 양식, 성과 가치의 지표 등 전반을 말한다. 특히, 언급한 ‘변화무쌍함’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 같은 ‘삶’이라는 단어의 추상성을 ‘나의 삶’으로 실체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삶과 가까운 문화예술교육을 이야기해왔지만, 정작 삶의 한 면인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기대어, 삶의 생생함을 도용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삶의 또 다른 한 면인 생활의 구체성이 배제되어왔던 문화예술교육, 실천하는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을 회복하는 것 외에, 무엇을 미래 문화예술교육의 비전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다름 아닌 자기 삶의 자리와 문화예술교육 활동가로서의 자리가 같은 사람들, 바로 지역이다.
행정구역이 아닌 삶의 반경에서
지역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여러 의도와 시선이 있다. 단어에서도 중립적인 리전(region), 중앙과 대비되는 지방의 개념으로서 로컬(local), 지리학에서 주로 쓰는 스페이스(space) 등이 입장에 따라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정치사회학적 관점이 우리가 접하는 지역의 개념을 형성해왔는데, (문화)정책이 이러한 시각을 받아들이면서 문화예술교육에서 지역을 대상과 지리적 범주로서 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삶, 이야기는 모두 고유한 시공간, 장소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굳이 ○○지역이라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행정적으로서의 지역을 강조하면서, 삶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이를테면 다양한 생활의 서사를 문화예술교육에서 보기 어렵게 된 셈이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세대별 삶의 패턴이 다양하고 다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자기 생활의 반경이 저마다 다를 수 있고, 그 반경이 거주지 중심이 아닌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해서 지역을 ‘삶의 반경, 삶의 자리’로 재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삶의 자리는 장소나 공간처럼 물질로서의 자리도 있지만, ‘내 삶의 사건’이라는 표현처럼, 내가 경험한 어떤 사건이나 이와 관련된 은유와 상징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지역이, 지리적 실체와 더불어 경험의 실체로서 함께 여겨져야 함을 말한다.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냐고 생각할 수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문화예술교육 정책이나 사업을 기획하고 구상할 때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제안을 해보겠다. 많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니 딱 세 가지만.
이름을 짓자나는 그동안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사업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보지 못했다. 지역, 학교, 토요일이라는 분류/영역만 있거나 특성화, 양성과 같은 근대적 태도의 언어 조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업계획서의 맨 위에 자리하는 굵고 큰 글자, 공모 제목이 되는 단어는 그 사업의 지향과 가치관이 투영된 상징적 언어이다. 우리 지역이 고민하는 것, 지향해야 할 문제의식이 담긴 사업의 이름을 새롭게 지어보자.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시인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최소한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는 쓰지 말아보자.
공정함의 착각공모를 맹신하지 말자. 공모는 ‘공개적으로 모집’한다는 참여에의 개방적 지향이 있지만, 경쟁적으로 선발하는 과정이 품고 있는 모순, 공유와 연대라는 문화적 가치와 배치되는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행정 중심의, 관료화가 강화되는 플랫폼으로도 작동하니, 변화와 생생함을 담아내기 어렵다. 의제가 발의되고 사업으로 구상되고 실행되는 과정이 다양해야 하며, 그 시간 자체가 참여자에게 문화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의 주장처럼 애초 기회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공정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하나의 기준과 잣대가 아닌 유연함이 필요하다.
찐 당사자들작년 사업계획서를 버리자.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는 당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 바라고 생각해온 자신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떠들자.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 하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각자의 삶에서 발견되는 개별성과 특별함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며 서사의 보편성이 형성된다. 내 삶의 크고 작은 부분과 맞닿은 지점의 발견은 그 이야기를 대하는 나를 다르게 이끌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야기의 당사자가 된다. ‘내 이야기’를 공유하고 더 탐색하고 싶을 때 ‘나’들은 누구와 어떻게 할지 신중해진다. ‘모집대상 : 성인(또는 초등학생,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 저소득층)’ 하는 식의 접근이 스스로 불편해질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주고받은 영감은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다양하고 좋은 질문으로, 의미 있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작지만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 때
‘스크래치 쿠킹(scratch cooking)’이라는 말이 있다. 반조리 음식처럼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닌, 원재료를 가지고 직접 요리하는 것을 일컫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폴란은 ‘요리’의 의미 영역의 폭은 넓지만 적어도 지난 100년에 걸쳐, 스크래치 쿠킹의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요리를 욕망하다』). 즉, 과정이 생략된 음식,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축약된 요리는 이를 통해 음식이 자연이나 인간의 노동, 또는 상상력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음식은 상품 혹은 추상적 개념이 된다고 지적한다. 누군가 스크래치 쿠킹의 핵심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만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아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요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보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막연히 새로워지고 싶은 열망에 도취하기보다는 작은, 구체적인 변화의 실천을 계획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더라도’가 아니라 작아야 한다. 과정의 기획은 그렇게 시작할 수 있다. 과정이 단지 시간의 순서이거나, 무언가 완성되기 위한 사전 절차로서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려면 작지만 인내심 있는 실천이라는 다소 미련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삽질’이 필요하다. 삽질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따라 변화를 기대할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
정말 봄기운이 스멀거린다. 겨우내 말라 바스락거리는 깻잎 대, 파, 추위를 곁눈질하며 소심하게 움튼 시금치, 가끔 길고양이 가족의 모습이 전부였던 집 앞산 초입의 텃밭에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올해 농사를 위해 마른 잔해를 치우고 본격적으로 근육을 쓰는 첫 일은 땅을 뒤집는 것이다. 흙을 헤집으려면 역시 삽질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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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춘
‘생활적정랩 빼꼼’이라는 편협한 공간이 나의 서식처였을 때는 그곳의 운영자나 대표라고 불렸는데 2020년 7월 14일 정리한 후 공간을 만들던 비슷한 시기인 2015년, 행정적인 필요로 만든 단체 ‘커뮤니티 스튜디오104’의 대표로 나를 호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경기문화재단에서 6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문화와 예술, 배움, 삶의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일을 하고, 조금 더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어 ‘바깥’의 삶을 산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연구, 컨설팅, 문화기획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모두 의미 있는 일이지만 특히 마음을 쓰는 일중에 하나가 다사리문화기획학교이다. 이 임시적인 커뮤니티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청년, 시민들을 만나 말을 거는 일도 어느새 5년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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