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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다.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중학생 나이에 처음으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고 한강철교를 건너고 있다. 선잠을 자던 동생이 깨면서 얼결에 “성, 여그, 여그가 워디랑가?” 하고 내뱉자, 형은 동생 입을 틀어막는다. 서울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사투리부터 고쳐야 한다는 담임선생의 말 때문이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의 첫 장면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을 꿈꾸던 전라도 아이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투리를 버리는 일. 카페에 앉아 ‘나는 보아뱀이라카능 기 정글에서 젤로 무스븐 기라꼬 생각했데이.’로 시작하는 『애린

공존을 모색하는 ‘약하고 꾸준한 연결’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대부분의 현대인은 의뇌(義腦)를 가지고 있다. 손상된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의수나 의족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뇌를 보완하기 위해 스마트폰이라는 의뇌를 장착하고 사이보그로 살아간다. 노화되어가는 생물학적 뇌에 비해 주기적인 신상 제품으로 교체되는 의뇌라는 신체 부속은 인간의 기억을 더욱 스마트하고 강력하게 보조해줄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검색을 통해 뉴스를 제공하고, 소통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기억이 강화되는 게 아니라 소멸되는 경우가 많고, 소통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강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뇌를 통해 시대와 더 많은 경로로 접속하려 할수록 잠재적인 가능성의 관계는 상실되어 간다. 우리가 검색하는 정보는

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 구조의 문제가 되도록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나는 지난 20년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글을 써왔다. ‘권력자’들의 얘기는 최대한 기록에 남김으로써 그들 자리에 값하는 책임성을 묻고 ‘사회적 약자’의 얘기는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들릴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하지만 늘 미진함을 느꼈다. 상당 부분은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고, 내가 글 쓰는 매체가 가진 짧은 호흡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느꼈던 인터뷰이는 ‘사회적 약자’였다. 신뢰 관계 형성 없이 불쑥 그들 삶에 끼어든 나의 접근이 무례하거나 시혜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신경

많을수록 빈곤하고 적을수록 풍요롭다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이 무슨 요상한 말일까?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고 행복한 시대에, 적을수록 풍요롭다니. 심지어 많을수록 빈곤하다니. 경제가 성장해야 생활이 안정되고, 그래야 문화예술도 꽃핀다는 것이 상식인데 빈곤을 강요하다니.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제성장이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온 건 맞지만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 건 아니다. 북반구의 풍요는 남반구의 희생을, 도시의 풍요는 농촌의 희생을, 자본가의 풍요는 노동자의 희생을, 건물주의 풍요는 세입자의 희생을 요구했다. 우리는 풍요로울수록 점점 더 불평등해졌고 특정한 문화가 다양한 문화들을 집어삼켰다.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마야 괴펠, 나무생각, 2021) 『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제이슨

땅에 귀를 대고, 흐르는 물소리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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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먹이기」   소야,   여게 풀 많다.   여기서 먹어라.   소는 그래도 안 온다.   소는 지 마음대로 한다.   소는 부엉이 소리가 나도   겁도 안 나는 게다.   사람 있는 데 안 온다. – 안동 대곡분교 3년 김욱동, 1970년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경상북도 농촌 지역 아이들의 시를 읽는다. 간혹 관습적으로 그 당시 기성의 동시들을 흉내 내어 쓴 시들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솔직한 생활 감정을 운문 형태로 쓰고 있다. 심지어 기성 동시들을 흉내 낸 시마저도 그 시절 일상의 편린을 담아내고 있다. 아이들의 시를

둥글게 모여 만드는 따뜻한 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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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마을을 만나다』는 마을에서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봐야 할 좋은 지침서이자 따라 걷고 싶은 든든한 선배 같은 책이다. 이들이 어떻게 모여 무슨 일을 만들고 이뤄내는지 들여다보고 있으면 ‘공탁’이라는 드라마 한 편이 재생된다. 『문화와 예술, 마을을 만나다』(공유성북원탁회의, 민들레, 2020) 서로의 어미새가 되어 서울시 성북구에서 지속가능한 지역문화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공유성북원탁회의(이하 공탁)’는 2012년 준비모임을 시작으로 2014년 자율적인 모임으로 공식화해 현재 3백여 명이 함께하는 지역 내 대표적인 민·민, 민·관 협치형 커뮤니티다. 공탁은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으로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평소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기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올해 역시 사람들은 서로를 멀리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전보다 더 소수의 인원만, 아니 가능하면 그 소수의 인원도 서로를 위해 모이지 말아 달라고 한다. 변이 바이러스는 그렇게 사람들의 물리적 사이와 거리를 더 멀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흐름과 만남에 대한 욕구로 인해 소통의 방법이 점점 발전하며 우리는 현실 공간이 아닌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고서 수업을 듣고, 회의하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문화예술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공간에서 오감을 나누며

파국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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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재와 소설가 최성각은 생태·환경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예민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생태·환경 문제를 단순히 소재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얕은 생태학을 지향하지 않는다. ‘파국’이 임박한 지구적 기후위기 문제를 비롯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를 예민하게 의식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다. 물론 두 사람의 기질은 다르다. 시인 이문재가 『지금 여기가 맨 앞』(2014)에 이어 최근 『혼자의 넓이』(2021)에서 ‘세계감(世界感)’을 강조하며 지구를 걱정하는 시를 쓴다면, 소설가 최성각은 ‘환경운동 하는 작가’를 자처하며 환경책을 깊이 읽는가 하면 생태적 삶을 직접 살고자 고민하고 싸우는 작가이다. 그런 두

끊어진 맥락을 찾아 다시 처음으로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Nostalghia, 1983) 끝부분에는 주인공 고르차코프의 촛불의식이 나온다. 8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이 무의미해 보이는 롱테이크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이 장면을 지금 우리의 문화예술교육 맥락에서 다시 떠올려본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현병호, 민들레, 2020)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알베르 자카르, 동문선, 1999) 교육은 만남, 소통, 사건이다 교육은 곧 만남이다. 교육의 장에서 학생과 교사, 부모는 만난다. 서로 알게 되고 존중하면서 함께 자란다. 눈빛을 교환하고 표정을 살피면서 몸짓과 말에서 드러난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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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을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의 회원이다. 십 년째 문탁을 드나들며 공부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인문학공동체의 공부와 활동은 어떤 것일까. ‘앎과 삶의 일치’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모토 아래 우리는 정해진 커리큘럼 없이 동서양의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용감하게 횡단하며 공부했다. 십 년의 세월은 우리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어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북드라망, 2018년)로 출간되기도 했다. 제도나 시스템에 따라 학력을 인증해주는 학위나 자격증은 없지만, 우리는 나름의 체계를 갖춰 ‘강좌-세미나-에세이 발표회-인문학 축제’ 등과 같은 공부법과 의례를 만들었다. 문탁은 국가와 시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며, 마을경제, 마을교육, 마을공유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