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려 했을 때 고민해야 할 것은 굉장히 다양했다. 먼저 서점을 운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이어야 했고, 자연과 가까이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은 우리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 또 지역 안에 ‘독립예술영화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그곳이 바로 강릉 정동진이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정동진리 마을. 서울에서 기차로 이동이 가능하고, 정동진리 마을에서 버스와 기차를 이용해 강릉 시내에 있는 독립예술영화관 ‘신영극장’에 갈 수 있다. 정동진은 강릉의 유명 관광지이지만, 지역 내에서 문화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책과 영화를 매개로 머무를 수 있는 역이자 광장으로서 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문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5년간 독립서점을 운영한 노하우도 있었고, 평소 좋아하던 ‘영화’를 전문으로 내세워 서점의 정체성도 비교적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정동진의 아름다운 일출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큐레이션 서점, 동해(East Sea)의 ‘이스트’와 영화(Cinema)의 ‘씨네’를 합친 이스트씨네. 이것이 이스트씨네의 첫 시작이었다.
  • (아래)ⓒurbanplay
아침을 여는 조조서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 위해 향하는 간절함이 정동진을 가득 메웠던 시절이 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하는 그 시간이 일출을 마주하는 순간을 더 격하게 만들어주곤 했었다. 정동진행 무궁화 열차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런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정동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떠오른 아침 해를 보며 느꼈던 마음을 머금고 올 수 있는 공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갓 구운 비건 빵을 만날 수 있는 아침 서점. 우리는 매일 아침 SNS에 ‘오늘의 해 뜬 시간’ ‘서점 오픈 시간’과 함께 어스름한 아침의 기운을 맞고 있는 이스트씨네의 외관 사진을 일정한 패턴으로 올리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이스트씨네를 알리고자 하는 방법이었는데, 누군가에게는 매일 아침 해를 만나며 하루를 잘 시작할 수 있는 작은 기적과도 같은 ‘미라클 모닝’을 선사하게 된 셈이었다.
이스트씨네는 서점이지만, 전체적인 공간은 오래된 극장에 온 느낌을 주고 싶었다. 레퍼런스 이미지를 많이 찾아봤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였다. 네모반듯한 구석 하나 없는 15평 남짓의 낡은 식당을 극장으로 변신하기 위해 생각보다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했고, 육체적인 노동도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상상하던 모습을 최대한 실현해냈다. 정동진리 바닷가 마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 세계에는 책과 영화가 있다. 책과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을 구경시켜주고 내가 놓인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 또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데려와 이야기를 나누게 해준다. ‘이스트씨네’라는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책과 영화를 통해 자기 감정을 알아채고, 또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을 경험하길 바랐다.
  • (오른쪽)ⓒurbanplay
덕후들의 아지트
소설과 시집, 영화의 원작 작품이 꽂힌 책장과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DVD, 음반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수집해 온 종이 영화 티켓을 콜라주 한 액자, 한쪽 벽면에 붙여놓은 영화 포스터, 그리고 국내 여성 감독 10인의 이름이 적힌 극장 전용 의자들, 책과 책 사이에 설치된 큰 스크린까지. 이스트씨네는 사랑하는 ‘영화’를 향한 나의 아카이브이자 나와 같은 덕후들의 아지트이다. 작지만 나만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눴으면 했다. 이스트씨네 3년 차, 책과 영화를 애정 하는 독자와 관객들이 정동진리 바닷가 마을 영화서점으로 방문하면서 이스트씨네는 덕후들의 아지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영화로운 스테이’는 1인 여성이 온전히 혼자만이 느끼는 쉼을 위한 공간이다. 게스트는 1인실과 욕실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대신 거실과 주방을 우리와 함께 공유한다. 머무는 동안 현재의 마음은 어떤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이야기와 연결된 책과 영화를 추천한다. 비건식 저녁 식사를 함께 먹으며 ‘식구’가 되었다가, 책과 영화를 만나는 시간은 또 혼자가 된다. 혼자 여행을 선택한 여성들에게 좀 더 안전한 공간에서 책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여다 볼 수 있는 시간과 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정동진 관광을 위한 숙박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삶을 나누는 이 공간에서 정동진 앞바다를 내 것 삼고, 책 삼고, 영화 삼으며 ‘영화로운’ 순간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추천 도서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조해진·김현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조해진 소설가와 김현 시인이 함께 쓴 영화 에세이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는 부제 ‘영화가 끝나고 도착한 편지들’ 그대로 두 작가가 서로를 향해 쓴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두 작가가 각자 혹은 함께 본 영화를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펜으로 애틋한 온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봉현 작가의 극장 풍경이 담긴 그림 6컷도 수록되었다. “인간은 아름답니?”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140여 편에 다다르는 영화가 언급되어 있다. 각자의 테마를 가지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절마다 어울리는 영화를 나열하며, <미안해요, 리키> <생일> 등 노동이나 사회적 죽음에 관한 묵직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며 서로의 일상과 삶을 찬찬히 되묻고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두 작가는, 우리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주제들을 영화를 통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로 펼쳐내고 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은선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영화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 이은선 기자의 첫 에세이집으로 기자가 사랑한 영화와 그 사랑에 가장 큰 연료를 보태어 준 사람과 요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바탕으로 삶의 이야기들을 느슨하게 관통하고 연결하며 엮은 책이다. 책 속에는 28편의 영화 이야기가 담겨 있고, 영화 속 장면에서 인상적으로 기억되거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만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영화 속 보이지 않던 장면, 들리지 않던 소리를 발견해 따뜻한 시선과 목소리로 전하는 이은선 기자의 책을 읽고 나면 괜스레 제목처럼 ‘착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는 영화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시큰둥했던 영화를 다시 보게 하기도 하는 그의 진심 어린 이야기와 일상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온전히 책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승희
오승희
강릉 정동진 영화서점 ‘이스트씨네’ 책&영화 큐레이터이자, ‘영화로운 스테이’ 호스트를 맡고 있다. 10년 정도 편집디자인 일을 하다가 ‘영화치료’ 공부를 시작하면서 삶 속에서 영화를 더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독립서점 운영, 치유 프로그램 운영 매니저, 문화기획자 등 경험했던 다양한 일을 바탕으로 이스트씨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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