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嬉 프로젝트. 저는 이 프로젝트를 5년을 생각하고 기획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019년. 매해 희비가 엇갈리는 충북문화재단 ‘헬로우아트랩’ 프레젠테이션 심사장. 아직 선정도 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당당히 5년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상한 교사를, 껄껄 웃으며 얘기나 들어보자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심사위원들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예술’이란 단어가 붙은 프로젝트는 모두 기웃거리면서 복작복작 도전해왔던 나에게도 ‘희嬉 프로젝트’는 5년의 청사진으로 완성되는 회심의 프로젝트였다.
  • 희嬉 프로젝트, 아지트 메이커스(Agit Makers)
직육면체에 세우는 오롯한 놀이 공간
직육면체 상자에 가득 채워진 책상과 의자. 글자가 빼곡한 칠판. 눈을 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반복되는 지루함이 가득 찬 공간. ‘학교’라는 그 공간을 아이들이 원하는 공간으로 돌려주기 위해 시작한 ‘희嬉 프로젝트, 아지트 메이커스(Agit Makers)’가 벌써 마지막 해를 앞두고 있다. 첫해에는 아이들이 학교 공간을 탐색하고 자신들의 오롯한 놀이 공간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유희(有嬉)’와 같은 음을 가지는 유희(遊戲)처럼, 놀다 보면 예술적 상상력과 즐거움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의 아이들은 놀멍쉬멍 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와 옥상 영화관을 만들었다. 두 번째 해에는 아이들이 선택한 공간을 색다른 물성으로 꾸며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제는 ‘희희(熙嬉)’. 빛이 반사될 때, 보는 이도, 만든 이도 함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유리공예로 선 캐처 만들기에 도전했다. 햇빛이 따사로운 창가에 반짝이는 작품과 어울릴만한 허브 가드닝도 함께 꾸몄다. 가드닝 박스 또한 자신들의 취향을 한껏 발휘하여 직접 목공 활동으로 제작했다.
세 번째 주제는 ‘가희(加嬉)’였다. 5년간의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공간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활동들, 그 역사의 기록을 써 내려가면서 아이들도 즐거움이 기록되는 공간을 구상해보게 하고 싶었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점차 쌓여가면서, 친구들과 함께했던 즐거움이 남겨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아카이빙 공간을 고민했다. 처음으로 서포터즈 활동도 이루어졌다. 기존의 아지트 메이커스 형님들이 올해에는 서포터즈가 되어 공간 정비 작업과 도포 작업을 도왔다. 자신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는 오지 않는 것이냐며 아쉬워하는 형님들에게, 우리가 만든 공간을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를 당부하며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이들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으로 작년 아이들은 훨씬 수월하고 합리적인 실행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네 번째 주제인 ‘연희(聯嬉)’는 탄탄하게 다져진 아이들의 공간 철학과 깊이를 바탕으로, 학교 공간을 넘어서 지역과 이어지는 ‘이음’을 뜻한다. 예술이라는 공통적 관심을 매개로 학교 안에서 관계를 맺어 왔던 아이들이 학교와 마을이 이어지는 그 경계선을 아름다움과 애정으로 채워갔다.
  • 희嬉 프로젝트, 아지트 메이커스(Agit Makers)
아이들이 있는 그곳이 무대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예술수업을 실천하면서, 수많은 고민을 함께 해왔던 예술가들과 프로젝트형 수업을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해보고 싶어서 2020년도부터 ‘예술꽃 씨앗학교’를 운영했다. 교사와 예술가의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수업을 통해 교육적 가치뿐 아니라 보다 전문적인 예술 영역의 경험과 표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술꽃 씨앗학교’ 운영을 계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는 아이들에게 ‘실패해도 괜찮은 무대’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그 무대를 아이들이 채워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1년을 공들여 준비한 무대를 그날의 컨디션 때문에, 혹은 다가오는 무대에 대한 공포로 얼룩지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예회 무대’의 공포에서 벗어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술꽃 수업을 즐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예술꽃 나비, the stage>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곳이 바로 무대가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동안 수업을 해왔던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마지막까지 즐길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다른 이들을 초청할 수 있도록 했다. 미처 구성을 마치지 못해 마지막까지 연습하는 모습이더라도 아이들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영상에 고이 담아서 진짜 ‘무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아이들이 온전히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진짜 ‘기회’가 주어졌다.
학교 현장의 예술교육도 미래 교육의 물결 속에서 나날이 다양성을 선보인다. 단순한 모방보다는 융복합적인 창작활동을, 그 과정에서 협업과 공공 가치를 고려하는 협력적 주도성이 요구되고 있다. 학생 주도 프로젝트 수업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예술교육이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원래 학생들의 것이었던 수업 속 사고와 실천을, 그간 잠시 맡아두었다가 되돌려주는 타이밍인 것이다. 텅 빈 캔버스에 첫 연필 데생을 그리는 순간부터 고이 말려 픽서(fixer, 정착액)를 뿌리는 마무리 순간까지. 아이들은 그 모든 순간을 자신들의 순수한 의지와 협력으로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다.
통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
‘2022 문화예술교육 ODA: 인도네시아’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예술꽃 씨앗학교의 이런 철학과 방향성의 가치를 나누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프로그램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어의 차이로 공감대를 이루지 못할까 봐 중요한 단어들을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고 몇 번이나 발음을 연습했다. 준비한 많은 내용 중에서 서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예술교육을 통해 어떻게 아이들이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공동체성이 지닌 가치를 생각하게 할지였다. 그래서 2022년 상반기에 아이들과 세계시민교육 ‘공생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었던 영화 <the purple>을 함께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양성평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색의 화합’이라는 경쾌한 해답으로 그 실타래를 풀어냈다. 영화를 본 인도네시아 교사들과 예술가들은 현지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예술 수업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주제 의식을 끌어낼 수 있을지 질문을 쏟아냈다. 그리고 함께 보낸 8일 동안 우리는 미약하지만 그 시작을 함께 내디딜 수 있었다. ‘쓰레기 매립과 지구 생태계’라는 주제로 무대를 구성해 낸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비록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예술 수업에 대한 고민은 우리를 연결시켰다.
2023년. 헬로우아트랩의 다섯 번째 주제의 실천과 4년간의 예술꽃 씨앗학교 운영이 마무리된다. 공립학교의 경우 5년의 근무 연한이 있어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예술꽃을 피우며 성장하게 될지 지켜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의 부재로 인해 이 활동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즐거움들을 남겨 놓음으로써, 또 다른 즐거움으로 탄생할 수 있는 씨앗을 심는 1년 농사를 기획하고 있다.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아이들이 자신의 예술적 철학과 함의를 표현할 수 있도록 예술꽃 ‘무대’로 탄생했다. 그 무엇이든 괜찮다고 격려와 용기로 아이들의 작품 세계를 지지한다면, 비록 완벽하게 구현된 무대가 아니더라도 ‘어떤 무대가 만들어질까’하는 설렘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미림
이미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하루하루 행복한 일을 만들어내며 지내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미생(美生)이 실현되기를 꿈꾸며, 학교 현장을 넘나드는 프로젝트형 수업을 구안하고 실천한다. 예술꽃 씨앗학교, 문화예술교육 연구학교, 메이커 교육 연구회, 헬로우아트랩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고 있다.
halfalove@naver.com
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