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오면, 마음이 바빠진다. 최근 몇 년간, 크고 작은 사업을 운영하며 배인, 무의식적 정서다. 영수증을 스캔하고 수천 장의 사진을 정리하고 인쇄 시안의 오타를 들여다보는 밤샘 작업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초겨울의 일상이었다. 올해는 소소한 활동들과 배움에 집중하며 보내서, 그럴 일이 없는 데도 문득문득 마음이 바빠지는 것은, 그간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몰아치는 12월을 지내면, 급작스러운 고요가 찾아온다. 가을부터 다음 해의 사업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사업은 당해 2월이 되어야 공모를 시작하는데, 그것도 기획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는 과정일 뿐, 정작 본 사업은 4~5월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지원사업을 주 활동으로 삼는 예술단체나 예술인들은 겨울과 초봄 사이, 타의에 의한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원사업 운영자로서의 멈춤일 뿐, 창작자로서의 멈춤은 아니다. 지원사업은 단체와 개인이 예술을 펼치는 방도이지, 존재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멈춤이 아닌 채움의 시간
언젠가, 개미를 사육하는 친구에게 개미도 동면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따뜻한 집안에선 개미가 자의적으로 동면에 들어가지 않으니, 냉장고에 넣어 강제로 동면을 시킨다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물으니, 이 동면으로 개미의 수명과 산란율, 그리고 활력이 훨씬 높아진단다. 동면이 개미에게 꽤 중요하고 기운을 북돋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동물’들은 동면의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까. 이 질문을 매년 스스로 던져온 나는, 몇 가지 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동면에도 계획표가 필요했다. 잠들기 전에 적어보는 서너 개의 단어로 시작했다. ‘30분 스트레칭. 미술관 특별전시. 한 장의 글.’ 이것은 매일 아침저녁, 30분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돌보는 것, 전시 관람으로 정신에 자극을 던지는 것, 그날의 자극을 소화하여 한 장의 글 안에 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세부적 실행방식과 가외 시간의 활용은 그날의 충동에 맞췄지만 매일 몸과 정신에 건강한 인풋을 하고, 이를 내 말투로 아웃풋 하는 루틴은 꼭 지켰다. 허투루 살기 십상인 자유인에겐,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숙제 한 줄이 필요했고 이는 동면을 각성시켰다.
특히, 쉼의 나날엔 못 했던, 또는 안 했던 일을 해보는 묘미가 있었다. 여기에 ‘유럽 배낭여행’ 같이 거창한 계획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평소에 전혀 모르던 분야의 도서 라인에 앉아, 끌리는 표지의 책을 꺼내 드는 것으로도 가능했다. 그리고 바로 그 모르던 세상에 영감의 조각이 있었다. 어느 겨울, 밤 재배에 관한 농업 서적을 뽑아 든 적이 있다. 평생 읽어볼 일이 없는 책이었다. 거기서, “한국의 밤은 육질이 우수하고 껍질은 천연 염색제로도 쓰인다.”는 한 줄을 읽고, ‘가을 산, 발에 차이는 밤들이 사랑과 의지를 가진 주체들이라면’ 하는 상상으로 시작해, ‘소년을 사랑한 어린 밤이 소년에게 주려던 속살을 수탉에게 먹히고 절망하지만, 껍질만 남은 몸을, 소년의 옷감을 물들이던 솥에 과감히 내던져, 그의 옷에 색과 향으로 스며들 수 있었고 그렇게 매일 소년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는 짧은 이야기를 지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지만 동네 아이들은 좋아했다. 이렇게 생각을 자극하는 조각들을 매일 던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과 창작을 쌓아가는 과정은, 매일 나를 나아가게 했다. 타의에 의한 쉼은, 자의에 의해 얼마든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약은, ‘꾸준함’으로 완성된다.
각자의 방향과 방식으로
우리 단체의 동력은, ‘지속성’과 ‘순환성’에 있다. 예술 정원이나 식물 소재 작품들은 살아있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돌보고 손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동면 중에도 멈출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계속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그 만남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열린다. 계속 만나고, 들여다보고, 묻고,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활동의 출발이자 목적이다. 여기서도 ‘꾸준함’의 가치를 발견한다. 사람도, 문화도, 결국 이 ‘꾸준함’으로 인해 늘 살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반드시 생산이나 발전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화살은 높이로 향할 수도 있지만, 가로로 펼칠 수도 있다. 친구에게 일상을 묻는 전화를 하거나 집 주변을 돌며 평소엔 몰랐던 야생화를 관찰하는 것은, 동면을 온기로 채워준다. 화살을 깊이로도 내려, 그간의 움직임을 돌아보며, 올해의 사업들이 나와 우리 단체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가늠해본다. 그 과정에서 길이 세분되기도 하고 목표와 가치관이 정련되기도 한다. 화살은 어디로든 뻗을 수 있다. 무리해서 위로만 향하려 말고, 각자 이리저리 뻗어보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동면의 방향을 찾아가면 좋겠다.
동물들은 동면하는 동안, 거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뇌에 외상을 가했을 때, 활동적인 다람쥐는 커다란 손상을 입지만, 동면하는 다람쥐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된다고. 이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얻게 된 에너지를 생체를 유지하고 손상을 치유하는 데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활발히 활동해온 예술적 동물일수록 동면 중 공허함이나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경제적 고민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직시하되 비관하진 말고, 모색하되 닳아지진 말자. 특히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정의 감정들을 곱씹어 대는 건, 최악이다. 감정이란, 거듭될수록 커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다면, 나를 치유하는 일도 열심히 해본다. 보통 그런 일들은 삶 가까이에 있을수록 좋았다. 나는 집안일을 좋아한다. 내 손으로 깨끗한 창과, 뽀송한 이불,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생산해낼 수 있고 그 혜택을 온전히 내가 누리니, 꽤 괜찮은 취미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찬 공기를 가르며 뒷산까지 달리기를 하거나 차를 내려 마시며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에겐 위로가 되는 행위이다. 누구나 위로가 되는 행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직 없다면 이번 동면에 궁리해보는 것도 좋겠다. 동면을 맞이한 그대, 성장은 더뎌도 좋으니, 그저 상처받지 않는 겨울을 보내시길.
김민
김민
초록놀이터 대표. 자연이 지닌 예술성과 가치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활동을 벌이고자 단체를 만든 지 5년째다. 동화작가이기도하다. 글, 교육, 프로젝트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문화예술을 퍼트리며, 정원과 숲, 마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초록놀이터를 소유하게 되길 꿈꾸고 있다.
chorocnori.modoo.at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