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지 이렇게 사는 것도 수많은 살아가기 중 하나일 수 있으니, 더 낯선 실체도 같이 만들어보자고 말할 뿐이다. 우리에겐 자유롭고 넓은 궤적으로서의 삶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안하다. 그래서 바로 몇 가지의 말들로 고민을 정리해버린다. 지속가능성, 일자리, 자립, 그런 걸 갖춘 모델. 불안이 시작된 자리를 일단 벗어나거나 불안해서 선택했던 행위들을 멈추는 것 말고 불안을 덮어줄 익숙한 말들을 가져온다. 나도 자주 그렇게 된다.
그래서 종종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작을 해보려고 한다. 10년 이상 많은 작업을 해온 단체를 해산하고 낯선 동네 충남 공주 유구리로 이주한 이유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너무 아름다운 포장이다. 나는 단지 나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본 것이다. 단체 구성원들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각자의 선택을 한 것이고, 우리는 그 과정을 서로 나누었다.
  • 낯선 풍경을 통해 만나는 나
여기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 주체들의 개별적 삶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강아지들과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 초등학생 아들이 원하는 조용한 동네, 수도권에서는 집을 구할 수 없었던 현실, 번아웃 되기 전 나를 돌보는 것 등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이유보다 설문조사 문항 같은 거시적인 말들로 개인의 선택 혹은 삶은 확대해석되곤 한다. 예를 들면 예술활동의 지역적 활동 범위 확대, 경력 단체의 역량 강화 기회 확보,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활동 전환, 소도시에서의 자립 모델 실험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더 소소하게 말하자면, 강아지들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더 자주 보고 싶었고 나를 위해서도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술가나 문화예술단체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사소한 이유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삶이 활동의 동력이자 태도이자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 문화나 예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이 그러하다. 그래서 예술 근처에서는 뻔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도 환영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종종 예술은 어떤 기준, 완성도, 심지어 계획성까지 갖춰야 진입 가능한 또 다른 사회적 영역이 되곤 했다. 나도 그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려 애쓰기도 했다. 혹은 나의 지대를 상상하는 대신 그 기준을 비판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곤 했다. 그렇기에 다른 선택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명명된 예술 ‘분야’ 안에서 지속적인 활동 기회를 마련하는 것 이전에 나로 살아가는 힘을 만들기 위해.
그런데 나로 살아가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어야 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불편한 싸움도 해야 하고 나에게 신기한 사건이 쏟아지도록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두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했던 여러 선택 중 2년 전에는 특히 ‘이주’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새로운 장소에서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해보고 있다. 비공식적인 것, 덜 본격적인 것, 사소한 것, 그렇지만 하고 싶었고 하고 싶게 된 것을 말이다.
  • 하고 싶어서 열어본 잡화점
  • 틈만나면 방방을 뛰는 요즘
그것은 ‘어떤 활동’이라고 완결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일상적 행위나 진행형의 움직임인 경우가 많다. 어떤 활동이 될지 모르는 것, 혹은 어떤 활동이 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 해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무언가. 그리고 ‘그 순간이 예술적이다’라고 비로소 느끼고 있다. 물안개 사이로 오토바이 타기, 강아지들의 씰룩거리는 근육 만져보기, 사과 대추 따 먹기, 잡화점 열어보기, 낡은 벽지 위에 그림 그리기, 낚시꾼 피해서 배 타기, 빌딩 없는 곳에서 걷기, 주짓수 하기, 사포질하기, 방방 위에서 뛰기, ‘꼬끼오’가 아닌 닭의 울음소리 들어보기, 빈집 구경 다니기, 나무 타는 냄새 따라 집 찾아가기, 뱀의 꼬리를 피해 산책하기, 비 온 다음 날 잡초 뽑기, 개들이 파놓은 땅 들여다보기, 60년 된 시골집 고치기, 지붕 위로 알밤 떨어지는 소리 듣기, 옆옆집 색소폰 연주회 구경가기 등등.
하지만 공식적인 활동이나 일로써 해내야 하는 것들도 여전히 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도 있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면서도 예전보다 마음과 몸이 덜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속가능성이란 말과 가장 편안하게 연결되는 지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계속 무언가를 하고 싶어질까’에 대한 질문.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게 엄청 많다.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싶다’까지 나아가지도 않는 작은 단위의 것들. 단지 그런 작은 것도 하기 어려웠던 환경 안에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선택이 필요했다. 그 선택은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삶을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차원에서 중요하다. 요즘은 전시도 공연도 프로젝트도 문화예술교육도 이전보다 덜 하지만, 지금의 삶이 가장 예술적이다. 일상적 탐색과 내 몸을 쓰는 경험이 불안과 걱정을 슬쩍이라도 밀어내주기 때문이다. 가끔 나의 재미가 자리 잡을 수 없는 긴 회의를 할 때 ‘어서 가서 마당에서 방방이나 타야지’라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다른 템포로 뛰는 것처럼. 그런 상태를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남이 모르는 재미나 비밀을 발아래에서 커다란 공처럼 굴리며 큭큭거리는, 그 쫀쫀한 설렘으로 재미없는 하루도 살고 불안한 내일도 마주한다. 그 공에게 이름을 붙여 보자면 아마도 속이 꽉 찬 ‘꿍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아니하고 속으로만 어떤 일을 꾸며 우물쭈물하는 속셈’이라는 뜻처럼. 실제로 마음속에서도 그걸 계속 꿍꿍 찔러봐야 한다. 내가 널 외면하고 또 세상을 향한 숙제만 하고 있어서 토라진 건 아닌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이 ‘꿍꿍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한 분야에서 경력이 단절되지 않기 위해 ‘꿍꿍이’가 아닌 나의 무릎만 찔러가며 그야말로 버티게 되는 게 아닐까. 버티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계속 버티기만 하면 삶은 건강하게 지속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에게 지속가능성은 단체나 경력, 활동 기회의 지속 이전에 삶의 건강함으로 전제된다. ‘꿍꿍이’ 같은 공을 비공식적으로 굴리며 계속 그 덩어리를 키워가는 것. 나의 호흡으로 몸을 움직여 그 덩어리가 숨을 쉬게 하는 것. 이것은 내가 만든 공을 내가 타고 있는 것이기에 이따금 박진감 넘치는 리듬도 만든다. 그리고 내가 따라가고 싶은 리듬이 감지될 때 혹은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될 때 나는 ‘미술을 한다’ ‘연극을 한다’ 차원이 아니라 ‘지금 예술적으로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이 나를 계속 살게 한다. 살고 싶게 한다.
이젠 심지어 계속 재미있게 사는 것에 욕심이 생겼다. 문화예술 영역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뻗어나가는 것일 테니까. 내가 어느 자리, 혹은 분야에서든 정말 재미있게 살고 있는 실체가 된다면 누군가가 같이 놀고 싶어서 따라오지 않을까. 친구들이 종종 우리 동네로 놀러 와 불멍을 하고 강아지들을 끌어안고 방방을 타다 가듯이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곳의 주소 대신 꿍꿍거리는 리듬을 보낸다. 지금 발끝에 둥그렇게 그려지는 각자의 궤적이 있다면 그 위에서 춤을 추다가, 그렇게 살다가 어디선가 만나자. 그때까지 스스로에게도 건강하자.
최선영
최선영
유구리최실장. 창작, 기획, 연구를 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30년 이상 살다가 공주시 유구리로 2년 전 이주했다. 요즘은 강아지 5마리의 마당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으며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문화예술교육도 하고 있다.
홈페이지 ugoorichoi.tistory.com
인스타그램 @uugoori_choi
사진·그림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