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불교 용어 중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있다. 업(業)과 연(緣)이 쌓여 만드는 인연으로 그때가 되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연이 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내게 묘한 마음의 힘을 갖게 한다. ‘시절인연’ 뜻대로라면 일어날 일은 언젠간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고 그 결과 또한 본인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과를 위해 본인 딴에 했던 노력은 예상했던 결과나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며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를 본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면 밤마다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을 반복하게 된다. 자신을 괴롭히고 밤마다 이불을 걷어찬다고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받아들이는 이들에 따라 해석되고 오랜 인연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는 다르게 다소 서먹한 관계로 끝날 때가 있기도 하다.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말처럼 쉽지 않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미련은 때론 기억으로 남고 계절의 추억이 되어, 예기치 못할 때 감정으로 밀려오기 때문에 미련이 가진 무게가 조금 덜어질 뿐이지 아예 사라지진 않는다. 글을 적다 보니 이 글이 연인관계에만 해당하는 말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쌓고 잘 헤어지는 일이 문화예술 판에서 일의 시작이자 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이 일은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걸까. 기획자와 작가의 만남은 신뢰를 전제로 하며 마음을 투영하는 일에 서로는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 기획은 넓은 맥락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하지만, 그 직군에 속한 사람이 넓은 범위에 포함되진 않는다. 우연히 전시 뒤풀이에서 만난 동료의 지인이 프로젝트의 협업 파트너로 연결되기도 하며 한 사람 건너면 서로를 알 수 있는 경로가 좁기에 서로 간의 평판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또 듣기도 쉽다. 어떤 사업을 받았다더라, 어떤 작업자와 일한다거나, 또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결이 비슷하다거나, 아이디어에 머물러 있는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과정을 설계할수록 신경은 예민해져 가고 시샘과 질투,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은 커져만 간다. 어떤 의미로, 무엇을 만들고 왜 해야 하고 그것을 말하는 것에 확신이 있는가 생각의 꼬리와 질문의 질문은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번 일을 할 때마다 불안감의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고 진심을 소거시킨다면, 과연 이 일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떤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독립문화예술기획자로 활동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불안한 마음을 키우기 쉽고 이러한 의구심은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에피소드: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 차지량 작가의 작품집이자 앨범 제목을 인용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곳은 강아지 방울이와 끝말잇기 신조어 대장인 까몽이, 그리고 노드 트리(들판, 까레이)가 거주하는 곳이다. 환기가 필요한 시기에 서울을 떠나 부여에 노드 트리를 만나러 가게 되면서 마음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예술가가 한 마을에 들어오며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가까이 목격하면서, 형태와 모양새를 만들기 위해 나를 괴롭혔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자신의 기술을 기꺼이 내어주고 단 한 사람을 위한 무대를 만들고 또 시골 농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의미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약속을 지켜나간다. 이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생겨난 예기치 못한 사건은 우리의 작업 소재가 된다. 기획의 단계를 설정하고 섣부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판이 부여에서 보고 느꼈던 감각에 동화되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에서 우리는 재미를 발견해 나간다.
그 일화 중 하나가 부여군 규암면 마을 이장님이 맹지에 무단으로 호박을 심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며 일명 <호박 줄기 사건>(2021.10.31.)이라 부른다. 이 해프닝은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커먼즈’의 감각을 사유하는 방법으로 연결됐고 지역 축제, 퍼포먼스, 전시, 출판으로 영역으로 확장됐다. 어떤 의도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았다. 들판이 마을을 오가고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로부터 출발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어떤 협업자를 염두 하지 않았고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누구나 <호박 줄기 사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프로젝트는 구성과 짜임새를 위해 과정의 단계를 기획했다면 부여에서는 자연스러운 만남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부여에서 일어난 <호박 줄기 사건>은 버섯 농사를 하는 농사꾼이 테크니션으로 협업했고 작품 <땡볕, 초승달과 대추>(2022)로 제작됐다. 우린 이 이야기를 서울·부여·울산을 오가며 전했다.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한다. 밤잠을 설치며 기획자로 말하고자 했을 때 나는 이 이야기에 확신할 수 있을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뛰면서 몸의 피곤함이 나를 금세 잠에 빠지게 했고 불안을 잠재웠다.
나는 이제 어느 도시에서나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요리하거나 새로운 이들로부터 잔기술을 배우는 것에 적극적이길 원한다. 또 작은 기술이 내게 있다면 기꺼이 내어주고 싶다.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배고픔이 걱정되고 기쁘거나 슬픈 일에 가족이 아니더라도 ‘함께’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말로 전달한다면 작은 소도시의 시골 감성으로 낭만과 환상적인 일화로 미화된다. 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전한 감각은 분명 존재하며 떠나봄으로써 알게 되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됐다.
  • 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2022.03.11.~04.07)에서 발표한
    노드 트리의 작품 <땡볕, 초승달과 대추>는 부여에서 만난 농부가 작품에 개입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기술협업 김정기, 제작도움 이상철, 이헌철)
에필로그: 끝이 없는 길
맘속 깊이 시절인연의 뜻을 새긴다. 일어나는 모든 원인과 과정이 중요하므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도와준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을 것이고 의도와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 증명과 판단 사이에서 중심을 잃을 때마다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연을 위한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 최선이 자신을 돌보는 방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끝난 인연이 절망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을 소유할 수 없음에 대한 인정이 자신을 마주할 의연함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아닌 떠나옴에서, 나를 스쳐 갔던 소중했던 얼굴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그려본다면, 자신을 책망하기를 덜 하지 않을까. 비로소 떠나야지만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믿어보자.
현재 <호박 줄기 사건>을 도모한 이들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부여군 규암면 맹지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제 국내를 넘어 국외까지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재미를 발견한 시간 속에서 서로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중이다. 있는 힘껏 자신의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한한 응원과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만남이 자연스럽지 않고 재미가 사진다면, 각자의 길로 떠날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 그렇게 떠난 길이 언젠간 또, 맞닿게 되고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시 인사를 나누겠지. 그러니 떠날까 봐, 좋지 않을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을 그만두고 이들과 함께할 여행길에서의 소중한 순간을 즐겨야겠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강정아
강정아
손과얼굴 콜렉티브에서 영상 작가 정혜진과 함께했고, 독립출판사 히스테리안의 발행인, 문화예술기획자로 활동한다. 변방에서 철학과 인문,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대안적 삶과 예술 실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서울·전주·부여 세 개의 도시를 거점으로 2023년까지 아르코 공공예술 주제심화형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 프로젝트를 공동기획자 황바롬, 김은성과 함께 진행한다.
hysterian.public@gmail.com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