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과 현○은 바닷가 마을의 무너져 내리는 멋진 공장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여차저차 그 지역으로 이주까지 하였다. 진지하지만 발랄한 이 작가들은 호기심 많은 친구들을 계속 끌어들여 동네에서 같이 놀고 좋은 곳을 진심으로 공유한다. 2년 지나니 동네 친구도 많이 사귀었는데, 밥집 술집 가게 주인들하고 친하다. 이들이 대단한 소비자는 아닐 텐데 만나면 눈에 콩깍지가 낀 것처럼 서로 ‘하트 뿅뿅’ 하고 지낸다.
굴러들어온 돌멩이들
“아니 왜 갑자기 염전에 진심이야?”
“여기 염전이 많이 뜨거워요. 보기에는 정말 멋있는데 식민지 시절 간척사업으로 시작했고 지역 소작농의 토지 싸움이 유명해요. 현재도 염전에 고립된 마을의 지난 역사가 감정적으로 작동하나 봐요.”
“그런데 왜 거기를?”
“검은 수면에 하얀 소금 쌓인 것이 너무 예뻐요. 염전마을 이장님을 만났는데 그냥 좋아하시는 거예요. 호기심 많은 철없는 애들 만났다고. 상황이 어려운 소금밭 이야기, 복잡한 동네 이야기도 조금 들었는데 그냥 여기 일을 도우면서(방해하면서) 두 달이나 시간을 보냈어요. 어설픈 염부 흉내 내면서 이장님과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우리가 여기 오니 속이 좀 뚫리는 기분이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아니 별 하는 일도 없는데 무슨?”
“이장님 말씀으로는 세상이 변했고 소금밭도 변해야 하는데 이야기 나눌 상대도 없고 되든 안 되든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맞장구가 필요하다고 하셔요.”
“그러니까 별로 도운 일도 없지만 기분과 기운이 통했다는 이야기네?”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우리도 햇빛에 까매졌지만 섬 같은 소금 마을에 익숙해졌어요. 말하기 어렵지만 느낌이 있어요. 여기 있다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의 감각이 있고 마을의 미래에 관심이 가요. 이것이 딱히 작업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노동이나 마을 역사에 짓눌리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서로에게 깊이 각인된 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 염전도 사람들도 좋아요. 아, 무엇보다 “소금이 온다”라는 말을 들은 게 너무 좋았어요. 바닷물을 말려서 날리는 마지막 단계에 하얀 소금이 드러나는 결정의 시간이 간절하게 다가왔어요.”
이런 과정을 모두 마치고, 지역에서 공유하는 행사에 나도 갔었다. 관대하고 젠틀해 보이는 지역 리더분이 자부심 가득한 지역의 역사, 풍토, 비전을 언급하였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겸손하게 열심히 공부해도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대단한 뭔가가 동네마다 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짧은 기간 뭘 한다고 해서 긴 시간 쌓인 지난한 삶의 두께를 넘어서기도 어렵다. 그래도 새로운 역사는 그 위에서 또 쓰이는 것이다. 동네의 역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늘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지지 않으면 죽은 곳이 된다. 지원금으로, 정부 정책으로 죽은 이야기를 산처럼 쌓아도 대체로 감동은 생기지 않는다. 호기심 가득한 굴러들어온 작은 돌멩이들이 감동하고 맞장구쳐주고 잘 알 수 없는 새로운 정성을 더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많은 것을 가진 지역 리더들의 생각과 달리 아무것도 없이 그냥 동네가 좋아서 들어온 사람들은 정부 사업이나 뻔한 노동구조에 예속되는 것을 싫어한다. 사업에 참여해야 관계나 개입이 가능하니 섞이는 것이고 틈틈이 알바하면 생활에 보탬이 되는 정도 생각한다. 기왕의 질서에 매몰되지 않는다. 정주를 위해 이주했거나 일시적으로 거주하거나 잠깐 여행자라도 철없는 바보처럼 뭔가에 환호하는 그들이 다른 이야기를 쓴다. 시작만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쓰이지 않으니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좋은 느낌이 왔다면, 염전마을 이장님처럼 손을 잡아주고 “아이고 내 속이 뻥 뚫리네. 정말 반가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적응과 유지를 넘어, 연결된 세계의 지속
지속가능성이라고? 듣는 순간 관변의 냄새가 난다. 죽어 있는 말이다. 나는 쓰지 말아야지 목록에 올라 있는 말이다. 사실 이 글의 청탁 주제라서 고민하게 되었다. 지속가능성은 줄줄이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망하면 모두 영향을 미치는 세계와 관련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자기 앞길 걱정할 때만 쓰는 말처럼 들린다. 진심이 없이 지시하는 언어, 기획하는 언어, 기만하는 언어라는 느낌이다. 지독히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쓰는 말인데 지구와 우주의 모든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사용한다.
지속가능성의 속성을 개인의 밥벌이 차원으로 좁혀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으나 누구에게나 밥벌이 지속가능성의 고통은 심상치 않다. 문명사회에서 밥벌이는 그냥 노동의 대가를 얻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을 포함해서 진화과정의 수십억 년 행성 질서의 이해와 탐구를 요구한다.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려는 노력 없는 밥벌이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오작동해도 제어하기 어려운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술(가)의 현실도 복잡하다. 생존하기 위해 적응하는 일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쇄신하는 일이 예술가의 존립 기반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논리에 끌려가지 않고 맹종하거나 압도되지 않고 세상에 대한 ‘흥미로움’을 유지해야 하는데,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피곤한 일이 많아진다. 자신의 관심사를 벼리는 일이 중요할 텐데, 사유-제작-활동이 교차해야 장시간 몰입이 가능하다. 나의 경우 ‘일상의 관계가 인간-기계-사물로 얽혀 있는데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 관계다’라는 데 꽂혀서 내가 하는 모든 프로젝트 구조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결과는 꼭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전위적 이슈를 생산한다는 예술이 요즘은 기술자나 과학자들에 밀려 영향력이 달라졌다는 느낌이든다. 인공지능의 발전 때문에 오히려 예술가들만 인간 지위를 유지할 것 같은 달콤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거 다 헛소문이다. 형식이 영원한 예술은 없다. 특별히 사유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개인”으로서 예술가의 중요성은 지속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것, 경험으로 이해되는 세계를 전복하는 정도의 통찰은 일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루틴에 구멍을 내는 연결과 연결 과정에서 발현되는 통찰을 공유하면서 다른 영토를 제안하고 확장하는 방식이 예술에도 교육에도 중요할 것이다. 내가 왜 반응하는지 그 반응의 배후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탐구한 것을 행위를 통해 공유하고, 다시 공유된 것으로부터 탐구와 행위가 연속되는 “즐거움의 의지”가 작동하는 예술은 더 많이 강조되어도 좋을것이다. 예술가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크리터)의 숙명이다.
더 복잡해진 세상에서 바보처럼 해맑은 태도를 유지하면서 전위적 사유와 활동을 실천하라니, 생각만 하고 있으면 피로가 몰려온다. 그래도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도파민이 마구마구 생성되는 창조적 과정이다. 우리 몸이 알아서 화학물질을 뿜어내는 일이다. 아직 그런 작업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더 예민하게 감각을 벼리고 한정된 촉수를 많이 사용하는 것만이 연결된 세계의 지속을 가능하게 할 것 같다. ‘지속’은 내 감정과 다르게 유지가 아니라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박찬국
박찬국
도시의 빈 곳을 즐기는 작가, 예민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크리터. 논아트밭아트 nonArt butArt(2010-2011), 동대문옥상낙원drp(dongdaemun rooftop paradise 2014-2020), 수원 공공예술 프로젝트 ‘멈추면 생동’(2022) 예술감독. 여주 밀머리미술학교(2002-2010)를 운영하기도 했고 서울시 청년허브 청년학교 담임과 기획자(2013-2016)로도 활동했다. 요즘에는 ‘국경이 아니라 해안을 따라 걷자’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다.
pckook01@gmail.com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