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검사 결과를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심각하게) 아프면 어쩌지’가 아니라 ‘잡혀있는 모든 일정은 어떻게 하지?’였다.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그동안 애써온 모든 것이 단 일주일 만에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모든 예술가, 예술교육가들이 겪는 두려움일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두려움이다.
기후 위기의 중심에 선 예술교육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예술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새로운 대면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여전히 코로나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고. 여전히 감염과 격리와 그에 따른 손실을 두려워해야 하고 변해버린 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기후 위기로 인한 또 다른 감염병을 비롯하여 다양한 자연재해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지도 모를 상황에 있다고 말이다. 약속된 인원이 변경되기 일쑤이고, 프로그램은 취소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요행히 프로그램이 지속된다고 해도 마스크 뒤에 감추어진 표정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살얼음판 같은 이런 현장에서 어떤 유연함을 가져야 할지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다.
나 역시 요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질적인 고민보다는 최소한의 질을 담보하되 모든 변경 사항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운다. 최악은 강사가 하루 이틀 전에 교체되거나 인원이 갑자기 줄어들어서 프로그램을 변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땐 차라리 취소되는 편이 좋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너무 당연하게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병행해서 준비하지만, 예전보다 곱절 아니 3배 이상의 인력과 비용에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선 이것은 모두 예술교육가의 몫이다. 그러니 절로 피로하다. 피로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기관이나 현장은 책임지지 않는 이 문제를 예술교육가의 헌신으로 버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질 좋은 예술교육을 보장할 수 있을까?
예술교육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 지금 당장 예술교육 현장, 특히 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은 예산과 인력의 배치를 비롯한 기존의 모든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예산의 문제를 들어보겠다. 우선 한두 명의 강사 체계가 아닌 팀 중심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인건비를 비롯한 모든 지원 금액을 상향 조정하여야 한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팀에서 결정할 수 있고, 병행할 수도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준비과정의 모든 것을 (실제로 한 가지 방법만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지원해야 한다.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말이다. 또 하나, 기관에서 주도하여 ‘대면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지 말길 바란다. (제발! 코로나 시대에 그리 달갑지 않은 방식의 예술교육 확장이 다 여기서 왔다.) 다시 말해 예술교육의 목표, 방식, 참여 인원의 특징 혹은 특성 등을 결정해서 공모하거나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가인, 예술교육가인 우리가 현장에 적절한 규칙을 찾을 수 있고, 찾아갈 것이다. 공동체별로 코로나를 통해서 성장한 경험이 다를 것이며 상처 또한 다를 것이다. 그러니 기능적 예술교육, 심미적 예술교육, 감각 중심의 여러 경험, 공감과 공유, 인식과 철학의 모든 경험의 농도들이 현장마다 다 다르게 필요할 것이다. 한가지의 정답은 없다. 현장의 공동체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디 예술가를 믿어라. 그들의 예술적, 예술교육적 감각을 믿어야 한다.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땐 예술교육가들에게 온라인 비대면 기술로의 무조건적인 전환을 요구했다. 교육 공백을 보완하는 고육책으로 온라인 예술교육의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라고 닦달했다. 그러는 사이 미적 체험의 의미와 감각의 전환 같은 다소 진취적이었던 예술교육 의제들은 현장에서 사라지고 기능 중심과 성과 위주의 예술교육, 흥미로운 만들기, 키트 중심의 체험 교육, 예전 초등학교 시절 방학 탐구생활 같은 예술교육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이것이 다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 코로나가 약간 주춤한 사이 다시 돌아온 대면의 시대를 준비하라고 한다. 아니다. 틀렸다. 코로나 이전 같은 대면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는다고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적당히 거리 두는 것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경험했다. 고립과 고독 사이의 묘한 경험도 했다. 거주 공동체 안에서 서로 생존하는 방법, 서로 감염인자를 감시하고 때로는 병균을 공유하면서 생긴 유대감도 경험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에 없던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를 새로운 예술 기호의 시대로 인도할 것이다. 전혀 다른 감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새로운 대면의 시대, 기후 위기 중심에 있는 ‘지금 여기’의 예술교육을 준비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예술교육가인 우리는 뭘 준비해야 할까?
겁내지 말자, 달라질 것이 없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서 타인과 세상, 시공간에 대한 감각적 수용이 수동적이면서 급진적으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과정을 겪었다. 수동적 고립 상태의 전 세계적 ‘제한성’은 인간이 허구를 공유하는 다양한 방법을 만들었다. 즉 가상의 공간에서의 ‘실제적 만남’은 과거의 ‘실체적 만남’에서 발생했던 감각을 상상하고 공유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술이 제공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여러분의 현장 상황은 어떤가? 오프라인 대면이 어려운가? 그러면 다른 대면을 준비하라. 준비에 필요한 기술을 담보하라. 예술에 있어서 기술은 변절이 아니라 도구이며 우리를 드러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만큼만으로 예술교육을 축소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과 위주의 예술교육, 기능과 키트 위주의 예술교육만이 양산될 뿐이다.
코로나 시대에 못 했던 ‘함께’를 그리워하지 말자. 이제는 회귀가 아니라 회복할 때이며, 변한 감각으로 변한 관계로 변한 환경 속에서 다시 만날 때다. 돌아보지도 말고 비교하지도 말자. 예술이 언제나 그래왔듯 ‘바로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자. 마스크를 쓰고, 위험에 언제든 노출될 긴장감 속에 있는, 유동적이고, 공감과 공유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신인류에 집중하자. 지금은 늘 다르고, 변한다. 변함을 품을 수 있기에 딱딱한 교육 체계 속에 예술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달라질 것이 없다. 우리 스스로 가진 회복 탄력성을 믿고 그 에너지에 집중해보자. 새로운 감각의 기호로 공감하고 공유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시대를 맞이하는 예술가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의심해보자. 삶에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고 있는지,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는지, ‘공동체를 관찰’하고 있는지를. 예술의 지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가진 교육적, 삶의 태도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가 커리큘럼이 없어서 예술교육을 하지 못했는가? 아니다. 그림 그리는 방법을 다 안다고 모두 피카소처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카소가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질문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피카소 못지않은 새로운 ‘기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술교육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위대한 즐거움인가.
나는 지금이 예술교육의 진가를 발휘해야 할 시기라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효율과 효용의 한계를 벗어나 더욱 친밀하고 제한된 참여 인원, 시공간을 뛰어넘는 참여 방식, 다양한 감각으로 확장된 프로그램 내용, 경험 공유의 새로운 기호, 즉 기존의 모든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니 예술가이자 예술교육가들이여, 이 기회를 붙잡자. 시도하자. 살펴보자. 도전하자.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그들과 마주하자! 이 시대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으로의 전환과 도전 그리고 궁극의 확장을 선사할 것이다.
남인우
남인우
극단 북새통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가믄장아기> <소년이그랬다> <불꽃놀이> <사천가> <억척가> <래러미프로젝트> <모두를 위한 공연 _똑똑똑> 등 어디서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공연의 형식, 전통예술의 현대적 수용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다양한 관객층을 아우르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예술의 교육적 가치, 예술의 힘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다. 최근엔 예술가가 주도하는 예술교육센터를 꿈꾸고 있다.
skyperland@naver.com
메인 사진제공_극단 북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