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을 열기 전 도서관에서 열린 벼룩시장에 셀러로 참여한 적 있다. 나는 좌판에 중고 시집들을 늘어놓았다. 몇 시간 동안 한 권도 팔리지 않았지만 몇 사람이 와서 책을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마침내 마수걸이가 이루어졌을 때 장사의 맛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온종일 앉아 있었는데, 세 권 팔렸다. 만원 벌었다. 하루 노동으로 따지면 너무 적은 금액이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모한 서점, 무모한 시집 전문 서점
아내에게 책 장사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고 말하니까, 아내는 그렇다면 서점을 차리자고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공간을 구했다는 게 아닌가. 대학생 때 문학 동아리 선배였던 시인의 건물이었다. 건물주 시인이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제주시에서 제법 땅값이 비싼 곳에 서점을 열었다. 건물주 시인은 시세보다 반 정도 적은 금액으로 빌려줬다. 그래서 가능했다. 그래서 그 시인의 북토크도 열었다. 그는 직장인인데, 돈 융통에 비상한 능력이 있어서 건물을 올렸다. 재테크의 전략을 듣고 싶었으나 시 얘기만 했다.
시옷서점은 2017년 4월 1일 만우절에 문을 열었다. 서점을 열었다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모두 믿지 않았다. 만우절 거짓말하지 말라며. 지난 5년을 돌아보면 거짓말 같은 시간이었다. 중고 가구점에서 책꽂이를 샀다. 가구점 주인은 요즘 흔하지 않은 원목이라며 파는 물건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부잣집에 놓였을 법한 서가의 운치가 풍겨서 기분 좋았다. 원목이라 그런지 무겁다. 낑낑대며 책꽂이를 옮겼다. 처음에는 한 칸에 책 한 권만 놓아도 마음이 꽉 찼다. 제주의 시인들 코너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 지역의 좋은 시집들이 있는데, 알려지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시집 전문 서점을 특색으로 하니 큐레이션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좋은 시집이면 구해서 진열해 놓으면 된다.
서점을 운영한다는 게 무모한 일인데, 최근에 전국적으로 많이 생겼다. 제주도에도 정말 많다. 커피나 술을 팔아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데, 시옷서점은 책 판매만 고수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도서관이나 다른 작은 서점에서는 유명한 작가들 위주로 북토크를 하지만, 시옷서점은 제주의 시인을 우선 초청한다. 환갑이 가까운 한 시인은 북토크 중에 울먹이며 말했다. 시인이 되어 생애 처음으로 북토크를 한다며,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서귀포의 따뜻한 바람 따라 산남으로 이전했다. 김광협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호근동에 자리 잡았다. 원래 상점이었던 기운이 남아 있어서 좋았다. 일요일에는 종일 교회 설교 방송만 듣는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에 딸린 가게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혼자 상점을 운영했다. 옆집에 오래된 분식집이 있어서 그 가게 주인과도 친해졌다. 고구마튀김이 특히 더 맛있다.
  • ‘시활짝’ 팟캐스트 녹음 현장
  • ‘시를 심어볼까’ 프로젝트
제주민과 함께, 시가 담긴 이야기와 노래
‘시활짝’ 이름으로 팟캐스트도 하고, 시 음반도 만들고, 농부와 시인을 연결 지어 ‘시를 심어볼까’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서점보다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게 좋은 일일지 회의적인 생각도 하면서 아무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팟캐스트는 박순동 가수의 도움이 크다. 어느 날 저녁에 서점에 와서 대화를 나누다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녹음해서 팟캐스트로 올리자며 다음 날 녹음 장비를 들고 서점에 와주었다. 그는 로고송도 만들어주었다. 그날 날씨나 기분 상태에 따라 손이 가는 시집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녹음 시간에 우연히 들어온 손님도 출연자로 등장한 적도 몇 번 있다. 출연료를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시집으로 대신했다.
시활짝 음반을 두 장 냈다. 나는 첫 번째 시집 제목이 『지구 레코드』일 정도로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 제작도 하게 되었다. 제주도 시인들의 시를 노랫말로 하여 제주도 뮤지션이 작곡과 노래에 참여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다. 영상을 전공하는 대학생에게 의뢰했는데, 그 학생은 일본 유학 중이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가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해외 로케이션이 된 셈이었다.
  • ‘시옷’ 전시
  • 서비스 ‘시 뽑기’
‘소설은 읽고, 시는 입는다’
일 년 전에 이곳 서홍동으로 다시 옮겼다. 서귀포시 원도심에 있는 동네다. 시옷서점은 내년 4월에 문을 닫을 예정이다. 서점을 그만두는 까닭은 손님들에게 미안해서다. 문을 자주 열지 못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헛걸음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문 닫을 마음은 두어 번 먹었다. 임대 계약 기간 만료 시점이 다가오면 접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없애기 아쉬워 맥주 마시는 서점이나 무인책방으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찻집을 운영하는 사람과 함께 공동 가게를 운영하려고도 시도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시집 전문 서점이 전국적으로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다. 대형 서점에서도 시집 코너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시집만 파는 서점이라니.
그래도 서점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까닭 중 가장 큰 것은 책임감이다. 기왕에 시작한 시집 전문 서점이니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제주도에서 ‘시집 전문 서점’이라는 타이틀을 시옷서점이 먼저 시도했으니 이와 비슷한 콘셉트의 서점을 하려는 생각이 있어도 시옷서점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 책방을 몇 년 하다 보니 그래도 마음 맞는 서점이 몇 있다. 그 서점들과 연대할 수 있어서 좋다. 서점에서 문학회도 만들었다. 회원 중에서 신춘문예도 되고, 문예지 신인상도 받았다. 여유가 있다면 버스 정류장 앞 건물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싶다. 시를 좋아하는 청년이 버스를 타고 와서 정류장에서 내려 서점에 들어와 시집 한 권을 사 가고 훗날 그 사람이 제주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는 걸 상상한다.
공간을 무상으로 빌려주니 몇몇 동호회가 모임 장소로 이용했다. 필사노트를 쓰는 모임도 있었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수를 놓는 모임도 있었다. 시옷서점의 모토는 ‘소설은 읽고, 시는 입는다’이다. 시를 의식주처럼 생각해 생활 속에서 즐기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오디오 버튼을 눌러 음악을 튼다. 노래가 서점을 가득 메운다. 거짓말처럼 손님이 와서 시집을 산다. 시집 전문 서점에 오는 손님은 대개 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다. 시인들도 방문해서 말없이 둘러보고 갔을 것이다. 나라도 내 시집이 서점에 있는지 찾아보겠다. 그래서 나는 시옷서점에 오는 손님들을 시인으로 여긴다.
시옷서점 추천: 정군칠 『수목한계선』
정군칠 시인의 시집 『수목한계선』(한그루, 2022)이다. 원래 출판사 한국문연에서 나왔는데 절판되어 이번에 복간한 책이다. 정군칠 시인은 작고한 지 10년 지났다. 그는 모슬포에서 태어나 문학 장학생으로 오현고등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일찍이 문학적 재능이 나타났다. 하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 건축 일을 하면서 문학과 멀어졌다. 그러다 뒤늦게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며 부지런히 시를 썼고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다가 췌장암으로 2012년에 별세했다. 정군칠 시인은 생전에 서늘한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를 썼다. 그는 시집『수목한계선』과 『물집』(애지, 2009) 두 권을 냈다.
그는 제주도에 있는 도서관에서 시창작교실을 하면서 시를 써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옷서점과 한그루 출판사는 제주도 시인들의 시집 중에서 절판된 시집을 다시 내는 시집 복간 프로젝트 ‘리본시선’를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강덕환 시집 『생말타기』(한그루, 2018), 김경훈 시집 『운동 부족』(한그루, 2020)을 재발간했다. 좋은 시집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시옷서점은 복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서늘한 정신
천 길 물길을 따라온 바람이 서느러워
바닷가에 나와 보네
앙상한 어깨뼈를 툭 치는 바람은
저 백두대간의 구릉을 에돌아
푸른 힘 간직한 탄화목을 쓰다듬고
회색잎 깔깔거리는 이깔나무 숲을 지나
황해벌판을 떠메고 온 전령이려니
지난날, 그대
비 갈기는 날의 피뢰침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서는
혀를 감춘 하늘을 물어뜯어
만경들의 물꼬들을 차례차례 깨우고
나지막한 산맥을 넘을 때
누렁쇠 쇠울음으로 회오리도 쳤을 터
그대 지나는 풀밭
풀자락들은 흔들려 불꽃으로 일고
그 불길이 몰려오는 섬 기슭에서
나 오늘, 서늘한 정신 하나를 보네

– 정군칠, 「서늘한 정신」 전문
현택훈
현택훈
시인, 시옷서점 대표. 비 오는 날 서점에서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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