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는 미래에는 우리 삶이 어떻게 바뀔까? 2000년대를 전후로 해서 우리 사회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민 등 여러 나라의 이주민 유입이 늘어나서 최근 300만 명이 넘었다. 우리 인구의 5%가 넘은 것이다. 또한 우리도 해외에 나가서 생활하거나 일을 하는 상황이 빈번해졌다. 국제이해교육(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은 문화적 충돌을 최소화는 소극적 다문화 정책 차원을 넘어서 청소년 세대가 마주해야 하는 미래를 보다 국제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활발한 창작활동과 함께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추적하고 청소년들과 문화다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한 안유리 작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해 제가 일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사랑을 위한 준비 운동》 전시에도 참여하였고 올해는 리움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 2022》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면서 문화예술교육 활동도 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의미가 있고, 작업과 병행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는지 궁금하다.
그 질문 받고 한참 생각했다. 제가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다고 인식을 별로 안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작가는 작업 활동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한 가지 생각-방향으로 쫓아가다 보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길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때 동시에 고민도 찾아온다. 희한하게 그럴 때 교육 현장에 가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생각하지 못한 자극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제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가르친다기보다 오히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훨씬 많이 배우는 것 같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몰랐었던, 새로운 분야가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에 관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돌파하거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 같아서 재밌게 하고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작가의 작업과 연계해서 대림중학교 학생들과 진행했던 문화다양성 교육 <어떤 시선> 외에도, 하자센터 청소년과도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 프로그램을 많이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일단 저 역시 10대 시절 일반 제도교육을 밟아가면서 예술을 시작한 게 아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을 만나면, 나의 10대 시절을 계속해서 반추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특히 청소년들에게 지금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계속해서 유예하는 삶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10대 시절을 그렇게 겪었었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좋아하는 거 원하는 걸 굉장히 빨리 찾은 편이다. 하자센터에서 당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예술을 배웠다기보다 인문학이나 예술,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미술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도 하자센터에서 수업을 하는데, 신기한 것은 내가 10대 때 고민했던 지점들에 관해 지금의 청소년도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다. 그 친구들한테 사실 별로 해줄 말은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해준다. “미래를 위해서 거대한 꿈을 꾸지마,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말하곤 한다.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다닌 경력이 없는 상태로 바로 네덜란드에서 유학했다. 그곳에서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
한국에서 제도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냥 제가 경험한 걸 말씀드리면, 선생님 대부분이 현장에서 활동하는 작가나 비평가였다. 대개 학생이라고 하면 아직 준비가 필요한 사람, 미숙한 사람이라고 설정하는데, 그분들은 오히려 조만간 너는 나의 동료가 될 사람이라고 잠재적으로 상정해 두고 관계 맺기를 했다. 사실 하자센터에서부터 그런 식의 교육 분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긴 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학생의 60%가 넘게 네덜란드 바깥에서 오고 출신이 굉장히 다양하다. 오늘 확인해 봤더니 작년 기준으로 60개국이라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각기 다른 배경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존중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문화다양성’이 거창한 것이라기보다 그런 환경이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문화다양성’이 정책적 이슈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IMF 이후에 몰려 들어왔던 이주노동자, 그리고 소위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를 통해서 들어온 결혼 이주여성이 인구의 2~5%까지 늘어나면서 2006년 전후로 문화다양성 정책 같은 것이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책을 수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의 문화다양성 문제를 얘기하기가 매우 복잡한 측면이 실제로 있고. ‘다문화교육’ ‘문화다양성 교육’으로 범주화하는 순간, 피교육자를 대상화하고 그들을 동정하거나 경계하는 방식으로 흐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마침 올해 만났던 대림중학교 학생이 이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면 오히려 매우 복잡하고 거창한 말로 설명했을 것 같다. “문화다양성이 뭐라고 생각해?” 그랬더니 “문화다양성이요? 공기 같은 거죠!”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뒤돌아서서 ‘얘 통찰력 봐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특히 한국 사회가 겉으로 보이는 피부색, 말투 혹은 출신지 가지고 사람을 많이 판단하잖나. 그 친구가 말해준 ‘공기’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공기는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고,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화다양성’이라는 단어 자체에 몰입하다 보니 개념이 오염된 것도 약간 있는 것 같고, 혹은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 학생이 말해준 것처럼 앞으로 ‘문화다양성’에 대해서 너무 복잡하거나 거대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치 숨 쉬듯이 우리 주변에 늘 있듯이 체화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그 학생에게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다.
사실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 상황이 대두된 곳은 안산의 원곡동이었던 거 같다. 저도 그곳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었는데, 최근에 대림동이 안산을 능가하는 다문화 밀집 지역이 된 거 같더라. 실제로 중국동포를 중심으로 확대된 이주인구도 많지만, <범죄도시> 같은 영화나 미디어에서 조선족의 범죄적 상상을 부여하면서 위험하고 더러운 지역으로 사회적 낙인을 찍은 것은 아닌가 싶다. 이주민에 대한 부정과 공포가 그런 식으로 대중문화에도 결합되는 형태인데, 수업을 진행하면서 대림중학교 아이에게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나? 일종의 다문화적 게토(ghetto)라고 할까, 어떤 지역을 한정하고 거기 거주자들 혹은 특정 출신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견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아까 그 학생이 ‘공기’라고 말했던 것 같이 어떻게 보면 매우 추상적인 표현으로 덮을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엄청난 일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과연 극복할 수 있는지, 오히려 그걸 더 강화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문화다양성 교육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해왔다. 작년에는 안산의 선일중학교에서 했는데, 러시아 출신 친구들이 많고 전국적으로도 굉장히 시범적이고 혁신적으로 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대림동은 서울에서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다. 실제로 우리가 수업에서 만났던 23명 중에서 절반 정도가 중국 국적 혹은 중국 동포 출신의 학생이었다. 처음 명단을 보고도, 얘기할 때도 전혀 몰랐다. ‘저 친구는 외국 애구나’하고 구분하지도 않고, 학교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익숙해 있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백남준’이 중요한 키워드였다. 백남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 있다.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장소에 계속 정주했다기보다 여러 나라에 이주해서 작업도 했고 스스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아이들한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작업을 보여줬을 때 오히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깨어 있는 눈으로, 너무 좋아하고 재밌어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훨씬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너무 걱정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2022년을 살아가는 10대 청소년들이 1988년에 백남준에게 영상편지를 썼다. 아이들은 자기들 맘대로 상상하고 굉장히 재밌어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기대 이상으로 그 친구들은 훨씬 열려 있는 상태로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던 것 같고, 저도 무척 재밌었다.
‘1988년 백남준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통해서 교육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사실 백남준을 짧은 시간에 이해시키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살펴보니까 아이들이 기획서부터 방송 스크립트를 짜고 상당히 복잡한 영상 편집 기술도 사용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진행했나?
처음에 프로그램을 제안한 학예사가 백남준 관련 연구를 꽤 오래 했다. 학예사가 사전에 2주에 걸쳐서 수업도 하고, 따로 영상 자료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아이들한테 제공해 주었다. 그중에 아이들이 제일 재밌어했던 것은 1988년에 백남준이 미래를 생각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우리 미래는 그렇게까지 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진 않더라. 이런저런 미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서사를 아이들 스스로 구성해 나가는 능력을 보여줬다. 중간중간에 우리가 함께 나눴으면 하는 질문이나 이야기들을 설정해두긴 했지만, 즉각적으로 청소년들이 반응하는 것에 따라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는 지점도 있었다. 특히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엉뚱하지만 재기발랄한 것들이 나와서 재밌었다. 확실히 MZ 세대는 편집 기술이나 촬영이 다르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고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 프로그램에서 자기들 스스로 방향을 세우고 발전시켜가는 것이 너무 놀랍고 예뻐 보였다.
조금 더 깊게 작업 얘기를 해보자. 2016년부터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문화다양성’ 그러면 우리 사회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이 되면서 다양한 문화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역시 이 글로벌한 상황에서 자의적으로 아니면 불가피하게 어디론가 떠나거나 이주해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의 역사 안에서도 밝혀지는데, 최근에는 <파친코>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에서, 또 연결된 <우리는 바다에서 왔다> 프로젝트에서 일종의 난민 또는 이주하는 자에 대해서 특별히 갖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저 역시 한곳에 머물러 살기 시작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유학 경험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동하는 삶을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유학 시절에 확실히 ‘내가 지금 다른 곳에 와 있구나!’ ‘나는 여기서 다른 존재로 비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술이 발전해서 사람이든 물자든 이동이 너무 자유로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랑 다른 존재, 타자에 대해서 배척하거나 편 가르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게다가 3년 가까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장벽이 높아졌다. 그 사이에 특히 미국 등에서는 아시아 인종 차별이 엄청 심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 작업을 어떤 식으로 계속 가져가야 되나 하는 고민이 사실 있었다.
  • 스틱스 심포니(Styx Symphony)
    2-channel video installation, 15min 51sec, 2022
    사진_김상태
  • 팔 집(A House to Sell)
    Digital print, Variable size, 2016
    사진_안유리
말씀하신 것처럼 디아스포라 문제 등이 무겁게 느껴지고, 많은 정치적인 혹은 역사적인 맥락을 동반하며 해석해야 하는 문제들이 뒤따른다. 작가님이 선택한 여러 가지 예술적 방식 중에 흥미로운 건 ‘시’를 차용한다든지, 매우 미학적이고 추상적인 영상을 감성적으로 사용하여 길게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대체한 것이다. 특히 이번 《아트 스펙트럼 2022》에서 선보인 <스틱스 심포니>는 히로시마 피폭 피해자이자 반전운동가로 활동한 시인 구리하라 사다코,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자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야 안젤루 그리고 우리나라 광주의 고정희 시인을 비롯해서 이런 시인들을 참조하시는 것 같다. 이 시인들의 메시지와 작가님의 작업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나?
기본적으로 제가 시를 무척 좋아하고 언어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제가 시각적인 훈련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배웠고, 어떤 부분에서 안 배운 것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저는 작업을 구상할 때 문장을 먼저 쓴다. 일단 문장을 쓰고 그걸 소리 내서 읽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는 편이다. 제 창작의 시작점은 ‘시’나 어떤 ‘울림’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급해 주신 시인 4명은 과거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다. 20세기에 걸쳐서 있었던 전쟁과 폭력은 이미 많은 사람에 의해서 쓰이고 발표되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썼던 게 당시의 증언을 넘어 여전히 현재 우리 삶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된 새로운 질문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시들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너무나 생생하게 주는 울림 같은 게 있다. 그래서 이미 작고한 사람들의 시를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다시 불러내고 기억을 환기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스틱스 심포니>에서 ‘스틱스’(Styx)라는 여신이 이승과 저승 혹은 현실과 가상을 매개하거나, 예술과 비예술을 매개하거나, 삶과 예술을 매개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원론적 대립항 사이에 위치하는 많은 것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예술가로서 스틱스 여신의 역할과 같은 매개의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을 연결하고 있는지 말씀해달라.
한 곳에 닻을 내린다기보다 이곳과 저곳, 과거 현재,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항보다 훨씬 다양한 개념들 사이를 계속 횡단할 수밖에 없는 게 작가로서 저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나 자신에 관심이 정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사회를 잘 들여다보면 그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고 믿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들 혹은 주변의 환경, 어떤 문제들 그리고 소위 ‘대문자로 기록되지 못한’ 어떤 이야기들, 그런 것들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저는 스틱스 강이 제 작업의 어떤 현장이면서 동시에 그런 목소리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정말 작지만 분명하게 있는, 그런 작은 목소리들이 여전히 있지 않나. 그게 소수자일 수도 있고. 소수자 안에도 다양한 그룹이 있는데 그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초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매개하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작업의 방향이기도 하다.
안유리
안유리

이동하는 삶을 살면서 장소는 존재하나 그곳에 살았던 사라진 말과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상을 재현하여 물성에 박제하기보다, 지금, 이곳의 시공간으로 불러내어 지켜보는 것을 선호한다. 때문에 텍스트, 비디오, 사운드처럼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매체에 담아 표현한다. 2016년부터 <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2015), 《돌아오지 않는 강》(2016) 그룹전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2018), 《아트 스펙트럼 2022》(2022) 등 전시와 창작활동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2022 청소년 문화다양성 교육프로그램 <어떤 시선>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탈북학생 잠재역량강화 프로그램, 하자 오디세이학교, 서울문화재단 청소년 창의예술교육, 하자작업장학교 등 창작활동과 함께 청소년 예술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 홈페이지 www.yurian.kr
백기영
백기영
1969년 강원도 평창 봉평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학사)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미디어 예술(석사)을 전공하였다. 안드레아스 쾌프닉 교수의 마이스터슐러(2002)를 거쳐 귀국 후, 영상미디어 작가로 광주비엔날레(2004, 2008),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공주자연미술비엔날레(2004) 등에 참여하였다. 2006년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 디렉터를 거쳐, 2007년 안산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설립하여 디렉터를 역임했다.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 북부사무소장 등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kpeik@daum.net
영상·인터뷰 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어떤 시선> 사진제공_국립현대미술관
작품 사진제공_안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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