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다양한 인연을 만들어 준다. 특히, 목표 독자의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그렇다. 작년 9월 출간한 『언어의 높이뛰기』와 2018년 출간한 『언어의 줄다리기』는 정말 다양한 독자와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사실, 한정된 독자를 대상으로 학문적 글쓰기에만 몰두해 온 탓에, 누구에게나 잘 읽힐 수 있는 책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학자의 집요함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해 가며 내용을 구성하는 일도,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내용을 풀어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며 ‘말은 관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꼭 알려야 한다는 절실함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나름 애를 쓰며 완성한 두 권의 책은, 다행히 전공의 벽을 넘어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독자들과 꾸준히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이 사랑받는 만큼, 강연이나 인터뷰, 방송 등의 요청도 이어지고 있는 덕분이다. 다양한 요청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것은 강연을 통한 독자와의 만남이다. 특히 실시간 강연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연자와 청자가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점에서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코로나로 인해 비록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강연이라도 마스크 너머로밖에는 반응을 보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전해주는 진지한 공감은 힘을 얻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코로나 3년을 겪으며 깨닫게 된 소중함이다.
그간 참 많은 곳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간디학교에서의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정말 여러 가지로 특별했다. 그리고 다양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 3월 말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자신들을 제천 간디학교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고 밝힌 세 학생이 4월 말에 있을 학교 인문학 캠프를 준비 중인데 그 행사에서 강연을 요청한다는 편지였다. 인터넷을 통해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며 언어와 권력의 문제, 언어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자신들이 준비하고 있는 학교 행사에 꼭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강연을 수락한다면 사전 인터뷰도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도 좋고 자신들이 학교로 방문해도 좋다고 했다.
‘간디학교’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어느새 나는 수락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간디학교. 2012년 2월 말, 졸업을 앞두고 임용시험에 합격한 한 제자가 졸업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연구실로 찾아와서 건넨 편지 속에 있던 이름이었다. 손으로 쓴 세 장의 편지 끝에 바로 그 간디학교의 교가, ‘꿈꾸지 않으면’이 소개되어 있었다. 제자가 건넨 편지의 감동이 이름을 통해 되살아났다.
간디학교 학생 세 명이 연구실로 찾아온 것은 4월 초였다. 제천에서 출발한 학생들은 고속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속 시간에 맞춰 연구실에 도착했다. 혹시나 연구실까지 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지만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연구실 찾기 미션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인사를 나눈 후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질문을 쏟아냈다.
질의응답 시간을 마무리하며 혹시 높이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표현이 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다. 한 학생이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비인가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신들은 분명히 학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했다. 공교육의 범위 밖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를 통해서란다. 그런데 이 센터를 통해 지원을 받으려면 자신이 학교 밖 청소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학교 밖에 있다고 스스로를 표현해야만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또한, ‘학교 밖 청소년’은 ‘학교 밖 아이들’이라는 표현이 주는 뉘앙스 때문에 ‘비행 청소년’의 다른 이름으로 들리게 하는 것 같아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양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직된 태도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모두 동의하는 듯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있는지 반성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표현이 가져다주는 경직된 공교육의 테두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청소년들은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서만 보호되고 성장해야 하는 것일까? 공교육의 테두리 밖에서 다양하게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다소 거친 이름으로 묶어 두어야 할까?
언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언어를 돌아보는 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매일매일의 습관적 사용으로 뭉툭해지고 무감각해지기 쉬운 언어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서만 뾰족해질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힘이 된다. 언어 감수성이 맺어주는 다양한 인연의 끈들은 앞으로도 계속 더 풍성해질 것이고 덕분에 우리 사회는 더욱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신지영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흥미진진한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언어탐험가. 옥스퍼드사전 자문위원, 대검찰청 과학수사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말소리 연구로 시작하여 언어의 다양한 측면으로 영역을 확대 중이며, 방송과 강연을 통해 시민 사회와의 접점도 늘리고자 노력 중이다. 대중서로는 『언어의 높이뛰기』(2021), 『언어의 줄다리기』(2018), 『한국어 문법 여행』(2015) 등을, 전공서로는 『한국어의 말소리』 (2011, 2014), 『말소리의 이해』 (2000, 2014) 등을 썼다.
shinjy@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