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따뜻한 남도에서 살다 올해 1월, 추위가 매서운 강화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매서운 추위만큼이나 경색된 남북관계를 말해주듯이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철책선과 검문하는 군인들, 지척에 있으나 갈 수 없는 북한 땅의 모습은 생경함 그 자체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이 생경함도 이곳에 머물러 살다 보면 평범한 ‘일상’이 될 거라는 걸 안다. 특별했던 것들도 일상이 되면 무던해진다. 무던해진다는 것은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 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배제되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감각은 다시 무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런 관점에서 ‘평화’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평화로움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즐거운 것들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지금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평화를 깨뜨리는 소리에는 둔감하다. 나와 내 가족뿐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생각하고 나눌 수 있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는 연습이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일상의 삶에서 평화의 감각을 깨우며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 건져 올린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한민국 서북단 강화도, 안보 이슈가 유독 강한 지역에서 ‘평화’라는 주제를 일상의 삶으로 끌어와 풀어내는 문화기획자를 만났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일상의 감각으로 경험되고 깨어나는 평화의 의미를 발견해 보고자 한다.
  • 강화-개성 평화 여행사 展
축적된 시간의 힘이 만들어내는 일상
유명상 협동조합 청풍 대표는 10년 전 강화풍물시장 한편에 친구들과 화덕피자가게를 열면서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강화에 아무 연고도 없었던 그가 ‘시장’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일상’을 살아내기였다. 청년들이 전통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누구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고 설명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편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는, 말 그대로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의 힘이 만들어낸 ‘일상’에서 발견한 주제들은 이후 청풍에서 하는 모든 기획의 핵심이 되었다. 기획자, 예술가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스스로 되어보기’, 다른 말로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획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념적 접근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혹은 현장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발견하거나 포착한 것들을 즐겁고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속도감이라고 생각해요. 강화에서 했던 기획들은 축적된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라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요. 빠른 속도에서 나오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소멸되지만 이곳에서 하는 일들은 생성되고 축적되는 깊이가 다른 것 같아요. 양은 비록 적지만.”
– 유명상 협동조합 청풍 대표
청풍은 현재 강화에서 ‘아삭아삭 순무’라는 게스트하우스와 펍스토어 ‘스트롱파이어’, 굿즈샵 ‘진달래 섬’을 운영하고 있다. 속도와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청풍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과 콘텐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버는 거 빼고는 다 잘 한다”는 유 대표의 너스레가 괜한 말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발붙이고 있는 땅에서 출발한 기획, 그렇게 일상에서 스스로 공감되고 동의되는 자연스러운 것들로부터 기획이 시작되는 것이 중요하다.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어떻게 그 일을 통해 내 삶을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인가에 운영의 방점이 찍혀 있다.
  • 강화와 개성을 잇는 평화의 여행사 ‘강개평 여행사’
    (좌)북한의 타이포그래피, (우)강개평 여행사 리플릿
시나브로 일상에 스며드는 평화 디자인하기
삶의 터전에서부터 기획의 모티브를 찾는 유 대표의 습관은 ‘평화’를 주제로 확장된다. ‘연미정’(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4호)에 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시선도 좋지만, 연미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답답한 마음을 정화하기에 충분하다. 마음 쓸 일 많을 때,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유 대표가 친구들과 자주 찾는 곳이다. 연미정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개성특별시가 보인다. 처음엔 “아! 저기가 북한이구나! 하고 사실로만 인식했는데 어느 날, 이게 지금 내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왔다”고 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일상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 삶을 이해하고 경험할 때 서로에 대한 마음도 평화스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구체적인 ‘북한스러움의 삶’이 궁금해졌고 친구들과 오랜 시간 북한의 일상 문화에 관해 공부하고 만든 결과물이 <강화-개성 평화 여행사 2021>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아직은 가볼 수 없는 땅이어서 가상이긴 하지만 ‘강화-개성 평화 여행사’가 제공하는 개성 여행 가이드는 ‘북한스러움의 삶’이 묻어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에도 디자인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천리마체’와 같은 북한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이야기들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술과 안주에 담긴 라이프스타일을 엿보면서 서로가 다른 체제에 살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매개로 이해의 접촉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인 이슈나 이념을 제거하고 나면 먹고 입고 마시고 거주하는 것들로 가득한 서로의 ‘일상’은 어쩌면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친절한 안내를 따라 개성을 여행하다 보면 마치 익숙한 여행지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일상적인 것을 정보나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경험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한 편견과 불신을 걷어내고 그 사이로 시나브로 ‘평화’가 스며들게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2019년에 진행한 <피스 디자인 스쿨> 참가자 모집 홍보 문구는 “통일이 되면 청년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로 시작한다. 안보의 이념에서 벗어나, 다른 듯 흥미로운 북한의 다양한 문화를 함께 탐구하며 통일을 상상해보기 위해 북한의 음식문화, 주거, 디자인, 영화, 드라마 등을 테마로 강연 프로그램을 열었다. ‘평화를 디자인해보자!’라는 말이 주는 구체성에 흥미가 유발된다. 흔히 ‘평화’라고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개념이기에 때론 뜬구름 같은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편적으로 먹고 입고 말하는 일상에서 구현되는 평화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가까워진다는 것을 유 대표는 감각적으로 포착해 냈다.
이렇게 평화의 감각을 서로가 가진 ‘일상’으로 가져오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다 건너 보이는 북녘땅,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음식, 디자인, 이야기 등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어떤 것들을 ‘지금 여기’ 현재의 일상으로 가져오는 순간, 우린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그 믿음, 그것이 곧 평화의 첫걸음임을 유 대표는 말해주고 있었다. ‘평화’라는 개념을 매우 이질적인 것, 누가 가져다주는 것, 특별히 신경을 써서 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북한과 남한,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세대와 세대 등 단절된 것들 사이를 유순하게 만드는 행위로서 평화의 의미를 확장 시켜보는 작업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믿는 젊은 기획자의 목소리에서 또 다른 희망을 보았다.
  • 플레이피스강화
평화의 감각, 예술로 스며들기
갑곶돈대에서 출발해 평화전망대로 이어지는 강화 해안 철책길을 걸으며 ‘평화의 감각’을 찾는 여행이 시작된다. 출발하기 전, 참가자들은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하모니카 연주를 듣는다. “자기와 다른 모습 가졌다고 / 무시하려고 하지 말아요 / 그대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요” 하모니카 연주로 듣는 <바람의 빛깔> 멜로디가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 멋진 연주를 들으며 참가자들은 무지와 욕심이 만들어낸 지구촌 곳곳의 분쟁과 전쟁의 현장을 떠올려 본다. 멜로디는 긴 여운으로 남아 걷는 동안 우리 안의 평화 감각을 깨우는 힘을 준다. 한참을 걷다 보면 북녘땅이 보이는 작은 정자가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눈을 감고 주위의 소리에 집중해 본다. 분단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까지 온몸으로 평화의 소리를 수집해 본다. 이렇게 각자의 감각으로 수집된 소리는 현장에서 뮤지션들의 멋진 음악으로 완성된다.
“기존의 DMZ 투어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는데 백 퍼센트 안보 중심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안보는 다 빼고 문화예술로 채운 ‘플레이 피스 강화 아트투어’를 기획했어요. 철책길도 보고 걷는 그 자체보다는 내 감각을 가지고 주변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경험하는 거죠. 어떤 공간을 실체로 인식하지만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다르게…. 일종의 ‘말 걸기’ 작업이죠.”
– 유명상 대표
이 과정에 함께하는 예술가들은 모두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주민이자 친구들이다. 축척된 시간과 사람과의 관계 네트워크가 단단해지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의기투합해서 그런지 유쾌하고 즐겁다. 서로에게 부채감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즐겁게 일을 도모하는 그들만의 유쾌한 문화가 말 그대로 ‘평화롭다’. 이념을 뛰어넘는 힘이 예술에 있다. 예술을 매개로 한 ‘평화 감각 깨우기’는 그래서 더 의미 있다.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오리니”
확성기에 목소리를 담아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 자신의 것만 옳다고 믿으며 대립하고 비방하는 방식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평화는 없다. 홍순관은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온다고 ‘평화는 어느새 불어온 바람처럼’ 온다고 노래한다. 자연스럽게 서로 스미도록 하는 것, 그것이 평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언제 터졌는지도 모르게 꽃망울이 터져 아침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때론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는 일상 안에서 ‘너와 나’ 사이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평화의 힘을 믿는다면,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밴 일상의 습관처럼 평화도 그렇게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감각으로 꽃피우길 바란다.
김혜일
김혜일
꿈틀리인생학교 교장. 따뜻한 남도에서 평생 살다가 최근 강화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청소년 전환학교 ‘꿈틀리인생학교’에서 ‘옆을 볼 자유’를 누리는 청소년들과 날마다 기타 치고 노래하며 살고 있다.
hopenet114@hanmail.net
사진제공_협동조합 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