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추고 고립된 상황에서 힘없는 존재들의 삶은 더 큰 위협을 받는다. 예술가라는 존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낯선 삶,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불안함 속에 있는 난민 예술가에게 코로나19로 인해 벌어진 여러 상황은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다. 2021년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며 한국 예술가와 한국에 살고 있는 난민 예술가들이 만남과 교류를 위해 ‘예술로 연대하는 공존(Solidary Art of the Coexistence)-솔리다르코’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불안한 시절, 예술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한 이 만남의 기원은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멈춘 시간, 예술가의 존엄
공연 무대에서 주로 이주민, 난민, 소외된 사람들,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던 무브먼트 당당은 2011년 세계 난민의 날 축제에 참여하며 한국의 난민 문제를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후로 난민 인권을 위해 힘쓰는 활동가들과 느슨한 연결고리를 이어온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무브먼트 당당 김민정 연출가는 <코로나19, 예술로 기록> 지원사업을 빌미(?)로 5명의 난민 예술가, 10여 명의 한국 예술가가 참여하는 ‘솔리다르코’를 조직했다. 짧지만 보장된 3개월간의 교류가 시작됐고, 기록의 의미로 짧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지만, 준비하고 진행하고 기록을 공유한 그 모든 일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한국으로 이주한 난민이 존엄과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비영리 시민단체 ‘아시아 평화를 향한 이주(MAP)’의 협력으로 난민 예술가들을 공개 모집했고, 화상회의, 강의, 워크숍 등이 이어지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국적의 예술가들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 일인데, 그 과정의 어려움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발적으로 달려와 준 통역자들 덕분에 아랍어, 영어, 페르시아어 등 낯선 언어가 섞일 수 있었다. 이렇게 소통하는 과정의 어려움과 느린 속도를 기다리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난민과 한국인. 각자 다른 삶을 살았던 만큼 교감이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창작자’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 후로는 어렵지 않게 서로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각자 준비해온 동작, 놀이, 표현, 낭독, 연기, 노래 등을 함께 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열렬히 반응했다.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평등한 시선으로 서로를 인식한 시점부터 우리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팬데믹을 바라보고 헤쳐 나갈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처음 직접 만났던 날은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마스크 너머로 서로의 따뜻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마지막 워크숍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에너지를 나눴다. 마지막 워크숍은 성악가이자 연출가인 권소현이 운영하는 홍성의 ‘지금은 책방’에서 이루어졌다. 권소현 연출가 역시 이전부터 난민 예술가를 비롯한 다양한 교류에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이번 작업을 계기로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을 고민하게 되었다. 환대의 뜻을 담은 에티오피아 커피 의식인 ‘카페 타바’를 시작으로 난민 예술가 민혁과 정유미 배우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낭독했고, 레자 로스타미의 시에 권소현이 곡을 붙인 노래를 백일홍 나무 밑에서 연주했다. 레자의 낭독과 이마드의 코미디가 이어졌고, 김진곤 배우는 김홍도의 <군선도>를 모티브로 관객과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최진한, 정소희 안무가는 춤을 췄고, 권택기 배우의 퍼포먼스, 메삭의 1인극 등이 이어졌다. 이렇게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서로의 창작과 예술관, 세계관을 나누는 환대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낯설지만 같은 우리들
에티오피아의 정치 상황 때문에 망명을 선택한 베레켓 알레마예후(Bereket Alemayehu)는 사진가이며 인권 활동가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한국 내 난민공동체 활동을 알리는 일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살게 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는 여유를 느끼기도 하지만 작업이나 전시 기회를 얻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 역시 지난 코로나 시기를 견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번 작업에서는 2019년부터 권소현 연출가와 함께 진행해온 ‘카페 타바’로 워크숍의 문을 열었다. 그는 특유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찾아온 관객들을 맞이하며 에티오피아의 커피 문화를 알렸고, 함께한 모든 창작자와 관객들은 달콤한 커피 향을 나누며 더욱 가까운 마음이 되었다.
이마드(Emad)는 예멘 출신이다. 2018년 제주에 도착해서 지금은 울산에서 살고 있다. 예멘에서는 매일 밤 공연을 하는 코미디언이었고 의상이나 소품도 직접 제작하는 디자이너 역할도 했다. 사람들을 웃게 해 주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한국말을 더 연습해서 한국 사람들에게도 웃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란에서 온 민혁은 아예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김민혁’은 그에게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모두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 정서와 문화에 이미 익숙하고 한국말도 능숙하다. 자신이 직접 단편영화도 만들고 배우나 모델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난민 신분 때문에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자주 느낀다. 그러나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해서 그런 차이를 줄여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우간다에서 태어난 메삭(Meshach)은 가족이 많다. 사형제 중 맏형인데 둘째 동생과 함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몇몇 공연 작품에도 참여했었고 그 밖에도 춤과 노래를 겸하는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한국 사회의 벽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특히나 이방인의 생김새에 대한 시선이 결코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적고 지난 팬데믹 시기에는 아예 일이 없어서 매우 힘겨웠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멈추지 말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고, 그 무엇도 영구적인 것은 없다고, 위축되지 말고 무언가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고 오히려 동료 창작자들을 격려하고 북돋아 주었다.
레자 로스타미(Reza Rostami)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주했다. 대부분의 난민이 그렇듯이 그 역시 한국에 오기까지 여러 나라를 거쳤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그런 과정들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무엇보다도 시를 쓰고 글을 짓는 작가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지냈다. 그곳의 난민센터에서 어린이들에게 컴퓨터와 미술을 가르쳤고 ‘ArtBoxPhm’이라는 NGO를 설립해 말레이시아 청소년들이 그린 그림을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 한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그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아낌없는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 유독 말레이시아의 난민센터에 추억이 많은데, 그곳에서 본인이 쓴 단편 소설 <War Story>가 연극으로 공연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한국에서도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다. 또한 자신이 쓴 글을 엮어 책을 출간하고 싶은 꿈도 잊지 않는다. 그는 솔리다르코의 행보가 지속되기를 기다린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내 시와 글의 일부를 여러분 앞에서 읽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나에게 매우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온몸을 다해 이 말을 합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다시 마련하길 바랍니다.”
– 레자 로스타미 작가, 아프카니스탄 난민
서로를 연결하는 단단한 고리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한 김민정 연출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모든 장벽을 뚫고 우선 만나보는 것, 그러나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이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접적인 만남이 성사되지 못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중한 기회였다. 물론 줌이나 영상을 통해 만나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너무나 반갑게 이야기 나누고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상황이 만들어낸 고립감과 만남의 절실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문자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소한 행위가 우리를 연결하는 단단한 고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작업과 새로운 만남을 통해 ‘우리는 예술가’라는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함께한 매일이 설레고 즐거웠다고 솔리다르코 멤버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듬성듬성 이어진 3개월간의 만남이었지만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행위들이 작업으로 연결되고 예술로 완성되는 과정이 주는 따뜻한 위안이 우리의 불안을 사라지게 했다.
“솔리다르코의 이번 작업은 예술가들의 연대를 포문을 여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난민 예술가, 창작자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눈여겨봐 주었어요. 난민의 서사를 작품 소재로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같은 시공간에서 예술로 만나고 교류한 것이 다른 프로젝트들과 달랐어요. 난민 창작자들이 한국인 예술가들과 관객 앞에 난민이 아니라 예술인으로서, 아주 오랜만에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공간에 섰기 때문에 안도하고 흥분했어요.”
– 김영아 아시아 평화를 향한 이주(MAP) 대표
마지막으로 레자 로스타미가 2017년에 쓴 시를 소개한다. 그의 말처럼 둥근 지구 어디에서든 자기 집과 같은 평온함을 느끼며 경계 없이 자유롭고 완전한 세계를 꿈꿔본다. 솔리다르코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여유로운 연결 속에 동등한 주체로 함께 만들어 갈 이야기들을 찾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또 다른 다큐멘터리로 담아내는 작업을 추진 중이고 극장에서 관객들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공연 또한 모색 중이다. 매체와 상관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틈을 보여 주는 이야기, 그것을 통해 또 다른 가능한 세계를 열어보고자 우리는 계속 만날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피난처를 찾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어쩌면 둥근 지구를 내 집으로 생각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경계도 한계도 없도록
하늘을 날으는 민들레 씨앗같이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같이
자유롭고 완전하도록
만약에요,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본다면, 그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피난처를 찾지 않아도 될 텐데요
세계가 나의 집
비록 그 일부는 불에 타고
지금 당신의 손님이 된 사람들은 적나라한 이민의 실체를 겪어야만 할지라도

– 레자 로스타미 <피난처를 찾는 게 아니에요>(2017) 중에서
권소현
권소현
성악가, 다원예술 활동가, 지금은책방 대표, 창작집단 E.V.E 대표. 작은 사람으로 내 호흡을 잃지 않고 즐겁게 세상에 반항하고픈 사람
mezokwon@gmail.com
김민정
김민정
무브먼트 당당 연출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발현되는 시대정신을 작업에 담아내고 예술의 주체를 확장하거나 포커스를 다양하게 나누고 펼치는 작업을 생산해 왔다. 2020년 연출한 다큐멘터리 [얼굴들]을 기점으로 거점을 제한하지 않는 새로운 연극성과 미래적 공연성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을 모색 중이다.
innstage@naver.com
사진제공_솔리다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