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움직임이 평화의 불씨가 되길

이선철_감자꽃스튜디오 대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은 압도적 우위의 대국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거나 곧 어떤 식으로든 적절한 합의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거세어 양국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국제사회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이나 핵전쟁 또는 우크라이나의 만성적 내전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현실적 우려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전황이 전개되는 양상을 지켜보며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감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부당한 침공에 맞서 기꺼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에 나설 것 같았던 서방세계나 우방국들도 직접 참전에는 미온적이거나 간접적인 방식에 머물고 있고, 이 또한 나름 철저하게 나름 계산기를 두드린 후의 행위이며 종전 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청구서로 이어질 것이라는 냉엄한 자국 이익 우선주의의 현실도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반인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복잡다단한 속성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떤 쪽의 책임만으로 전가할 수 없다는 시각과 인식도 일어나고 있다. 즉 우크라이나의 섣부른 대 서방 전략으로 인해 원인을 제공한 셈이며,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과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양비론도 퍼지기 시작한다.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오히려 자국의 피해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화되며 비난과 지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만만치 않다.
국제사회의 충돌에는 명료한 선악 구분이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양국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특히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고 있으며 가족의 파괴와 공동체 붕괴는 인류 공동의 슬픔이라는 것이다. 이에 국제사회 많은 분야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퇴출이 이어지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도 자국 비판과 우크라이나 돕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도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러시아, 특히 시베리아의 자연과 문화에 매료되어 매우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왕래를 해 왔다. 그러던 중 3년 전 어떤 계기로 러시아 북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의 북동연방대학교(NEFU) 겸임교수로 위촉되어 직접 현지에 체류하며 대학 강의와 지역사회에 컨설팅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2년째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다가 최근 다시 체류의 기회를 기대하던 차에 전쟁 발발로 다시 출국이 보류된 상황이다.
이에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쟁을 지켜보던 중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예술인이 나름의 방식으로 양국의 화해를 촉구하고 피해를 후원하는 의미 있는 문화행사를 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이 행사의 기획자나 참여자를 만나 그 취지와 목적, 성과에 대해 더욱 널리 알릴 것을 권했다. 비록 이런 작은 공연이나 전시는 단박에 큰 반향이나 결과를 끌어낼 메가 이벤트는 아니지만, 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참여를 끌어낼 수 있고 이런 작은 시도가 불씨가 되어 더 큰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 《우크라이나, 함께 하크라》
우크라이나, 함께 하크라

정은혜_미술작가
2022년 4월은 화가 많이 나는 달이었다. 너무 화가 나는데, 우리가 사는 제주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여기저기가 반짝반짝했다. 꺼지지 않는 산불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기후위기가 가속되게 생겼고, 사랑하는 숲에는 동물원을 짓겠다고 하고,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터졌다. 절망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더니 습기 많은 제주 날씨처럼 집 안팎에 가득한 듯했다. 그래도 봄인데 꽃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친구들과 벚꽃 아래에서 만났다. 그리고 마음을 모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뭐라도 하자! 하자 하자 하자! 이 말이 우리 안에서 울렸고, ‘함께 하크라’ 즉 ‘함께 할 거야’의 제주어 제목을 정하고 나니 기적같이, 습기가 물러갔다.
그리고 겨우 한 달 만에 78점의 작품이 모였고 《우크라이나, 함께 하크라》 전시를 열었다. 우리는 이 일이 정성으로 하는 연민의 행동이기를 바랐다. 돈이 없기도 했지만, 누가 준다고 해도 안 받기로 하고, 예산 0원으로 운영비 없이 진행하였다. 무료로 대관을 할 수 있는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모든 물품을 기증받거나 빌렸다. 행사를 예산 한 푼도 없이 한다는 것은, 돈 대신에 사람들의 수고로 한다는 뜻이다. 물품들을 얻고 빌리고, 그 얻은 것을 전달 전달받고, 작품을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일이 참 많았다. 작가들은 자신의 혼을 담은 그림들을 내놓았고, 태어나서 한 번도 작품을 사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림을 집에 들였다. 뮤지션들도 음악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공연이 열리고, 마술사도 함께해 아이들을 환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어린이 희망편지>라는 어린이 워크숍에는 평화 운동가, 작가, 미술치료사들이 수고를 더해주셨다.
처음 이들에게 함께 해달라고 손을 뻗었을 때, 이런 답이 왔다.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절망하고 있었는데,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울했는데, 뭔가 할 수 있는 게 생기니 일어나져요.” 그리고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영광입니다.” 즉, 함께 하크라. 함께 할 거야. 그렇게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무려 140명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성으로 농사짓듯이 키운 돈이 9,380,000원이다. 돈은 차가운 건 줄 알았는데, 따뜻한 숫자다.
5월 5일부터 5일간 제주아트센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함께 하크라》는 전시로서도 매우 흥미로웠다. 보통 한자리에 하지 않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작품 최고 가격 20만 원이 너무 낮아서 난감해하던 기성 작가도 기꺼이 그림을 내놓았고, 최저 가격 3만 원이 너무 높아 불편해하시던 할머니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내놓았다. 스스로 그림을 배우고 삶 속에서 작업하는 작가들, 지적장애인 예술가들도 함께했다. 다른 전시에 내려고 준비한 그림을 보내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먼저 연락해 오거나 돈 한 푼도 안 받는데 액자까지 곱게 입혀서 보낸 작가도 많았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너무나 다른 그림들은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다.
전시장 한 켠에서는 아이들이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를 그리는 <어린이 희망편지> 워크숍이 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그림은 전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작품이 팔려서 비워진 전시장 벽에는 대신 아이들의 그림이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은 점점 전시장이 아닌 워크숍 공간에서 수다를 떨고, 도시락을 까먹고, 머물렀다. 생명력이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작품은 다 팔렸고, 전시는 마무리되었지만, 이 전시는 아직도 생명력 있게 꿈틀꿈틀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희망편지 그림을 우크라이나 아이들에게 전달하려고 길을 찾고 있다. 이 과정에서 걸게 되는 전화 한 통, 쓰는 톡 한 통은 매번 눈물 나게 한다.
이 전쟁 통에 무슨 그림이냐 할지도 모르겠다. 전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먹을 것이 없는데, 구호품과 약품이 없는데 무슨 사치스러운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도, 아프고 죽기도 하고 배고프고 약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에 우리가 보낼 수 있는 밥이고 약인 것이 또래 아이들이 그려준 응원과 축복의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이 우크라이나 아이들에게 도착한다면, 만약 정말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마음에 늘 꽃이 만개할 것 같다.
· 인스타그램 @with.hakra
∙ 페이스북 함께 하크라
  • 우크라이나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자선 콘서트
안녕을 염원하는 모두의 외침 ‘우-라!’

하나린_음악가·문화기획자
올해 2월 거짓말 같은 ‘진짜 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되었다. 하루아침에 전쟁으로 고통받게 된 우크라이나 국민의 참상을 연일 SNS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그들의 상황에 깊이 공감하여 슬퍼하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특히 민간인의 피해가 큰 것을 보며 멀리서라도 그들을 위해 도움을 줄 방법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한 달이 넘어가고 예상보다 길어지자 차츰 나도 모르게 그 상황이 무디게 받아들여졌다. 이보다도 냉혹한 현실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중 오랜 시간 협업해온 절친한 러시아 아코디오니스트 알렉산더 쉐이킨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와 같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예술가들의 주관으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콘서트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4월에 열릴 공연에 그를 비롯한 출연진 모두가 재능기부로 참여하고 몇몇 기업은 물품 후원으로 함께 하며 입장료를 모아 공인된 한 기부단체를 통하여 우크라이나 현지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는 형태였다. 무엇보다 러시아 국적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들을 돕고자 하는 이 공연의 선한 취지에 기꺼이 한 순서로 참여할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4월 10일 공연 날, 예매로 이미 상당수의 좌석이 매진되었는데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두 시간 전부터 현장 판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출연진은 20여 명으로 테너 성악가, 아코디언 앙상블, 현악 앙상블, 색소포니스트, 퍼쿠셔니스트, 그리고 러시아 출신 무용수들의 무대가 차례로 이어졌다. 바흐의 첼로 소나타로 시작해 뮤지컬, 탱고와 같은 민속 음악,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아코디언 앙상블의 공연 후 나의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올라 객석을 보았는데 뜻밖에도 반 이상을 외국인이 채우고 있었다. ‘러시아어 인사말이라도 준비할걸’ 하는 아쉬움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첫 곡 <꽃밭에서>를 부르기 전 공연에 참여하는 소회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을 따라 공연장에 오며 올해도 이렇게 좋은 봄날을 누릴 수 있어 참 행복하다고 느꼈다고.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어 우크라이나의 국민이 그저 우리와 같은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자 큰 함성과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날 공연의 피날레는 특별 순서로 모든 출연진과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가족들이 꾸미는 퍼포먼스 무대였다. 사랑하는 연인, 부모와 아이들이 손을 잡고 차례로 등장했다. 무대 위 그들은 서로 웃고 장난치며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경보가 울리고 빨갛게 불타오르는 배경 속 연기에 휩싸인 무대 위 그들은 서로의 손을 놓친 채 당황하여 무대 이리저리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 총에 맞은 아이 하나가 쓰러졌고 어머니는 아이를 안은 채 목놓아 울었다. 화면에 실제 우크라이나의 희생당한 어린이들이 비쳤다.
암전되고 모든 출연자는 초 하나씩을 손에 들고 무대에 모였다. 관객 중 누군가가 러시아어로 “우-라!(y-pa!)”라고 외치자 모두의 박수로 막이 내렸다. 공연이 끝난 후 그 뜻이 궁금해 알렉산더에게 물어보니 우크라이나의 안녕을 염원하는 말이라고 했다. 관객 중 특히 우크라이나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분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공연 전후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바로 자신의 고국 혹은 친구의 나라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고 있는 그들의 안타까움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난 현재까지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무색하게도 전쟁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다. 어떤 전쟁이라도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한쪽에서는 국제정치 논리에 의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라도 무력으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예술이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자리 역시 바로 그 자유의 지점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믿게 되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더하여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음에 더욱 감사를!
정은혜
정은혜

제주에서 살고 활동하는 생태예술가, 미술치료사, 저자이다. 친구들과 《우크라이나, 함께 하크라》(2022) 전시를 만들었다. 해양 미세 플라스틱을 모아서 만드는 애도와 축복의 생태예술 ‘플라스틱 만다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변화를 위한 그림일기』 『싸움의 기술: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다』가 있다.
인스타그램 @orot_eunhae
하나린
하나린

성악가로 데뷔하여 한국 가곡을 대중화한 아트팝 가곡 <내 영혼 바람되어> <눈> 외 다수의 음원을 발표하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무대를 통해 활동했다. 현재 가수이자 문화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인스타그램 @hanarinvoice
이선철
이선철
예술경영인이자 문화기획자. 감자꽃스튜디오의 대표이며 연세대, 국민대, 경희사이버대, 야쿠츠크 북동연방대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6기 이사, 2기 문화예술교육종합계획수립 추진위원, [아르떼365]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potatostud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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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정은혜, 하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