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란 무엇일까?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평화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평화에 대한 정의는 하나로 말할 수 없다. 평화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한 갈퉁이 전쟁이나 직접적인 폭력의 부재 상태를 소극적 평화로, 그리고 그러한 전쟁, 폭력,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이며 간접적인 폭력까지 사라진 상태를 적극적 평화로 명명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회가 지닌 복잡하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폭력까지도 사라진 상태가 평화라고 한다면 한 사회의 평화는 그 사회의 맥락에서, 또는 개개인의 관점에서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평화는 신선한 공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접한 평화의 정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인스브루크 대학의 평화학 과정을 설립한 볼프강 디트리히가 소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수업 첫날 전 세계에서 모여든 학생들에게 각자 나라의 말로 평화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곤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접한 가장 충격적인 평화에 대한 정의는 서부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출신 학생이 전해준 ‘신선한 공기’(fresh air)라고 고백한다.
평화가 공기라는 그 학생의 정의, 정확히는 부르키나파소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공기라는 물질의 속성상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존재를 느끼거나 증명하기 어렵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가 돼서야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평화는 그것이 부재할 때에만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부재로서 감각하게 되는 존재다. 또 다른 하나는 마치 공기가 그런 것처럼 평화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면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공기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평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냥 공기도 아닌 바로 ‘신선’하기까지 한 공기인 것이다.
평화는 공기와 같아서 어디에나 있고 누구와도 공유한다는 깨달음은 단순히 부르키나파소 어원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로 전파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시대를 경험한 것은 무척 이상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 질병이 일상의 평화에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뱉은 공기를 당신이 들이쉬고, 당신이 뱉은 공기를 내가 들이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공기가 우리 모두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코로나 시대를 경험한, 혹은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우리가 공유하는 공기가 곧 평화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같은 숨을 쉬기에
이렇게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평화를 구현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면서 말로는 평화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선언하고는 이내 잊어버린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고 했던 로마 장군 베게티우스의 전쟁론을 2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당하게 인용한다. 그러니 ‘핵대핵’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주장이 그럴듯한 전략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 이래로 여러 제국에 의한 평화 체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위 핵에 의한 평화,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 핵평화) 역시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는 데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힘으로 지키고자 하는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각자 다른 모습일 수 있다지만,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는, 이 사회는, 그리고 나와 이웃은 평화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가 원한 평화인가,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평화가 아닌 것의 실례는 많다. 가깝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렇다. 침공이 시작될 당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는 한목소리로 전쟁을 시작한 러시아의 부도덕과 비인간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전쟁이 100일을 넘어가면서 우크라이나와 연관된 기사들은 전쟁 덕분에(!) 군수산업의 호황이 예상된다느니, 곡물 가격 상승이 예상되니 대체 수입국을 물색해야 한다느니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나, 파괴되는 도시에 대한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놀라울 것 없는 일상이 되고 있다. 단 100일 만에 찾아온 이토록 무서운 무감각이라니.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전쟁에 대한 무감각한 세계가 우리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다. 종종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 즉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 중인 국가라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의 상대방인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도 사재기조차 하지 않는 나라,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은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고는 우리나라의 치안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며 불쾌해하는 애국자들, 필요할 때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내세우는 국제정치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에게 ‘전쟁은 너의 것, 평화는 나의 것’이다. 평화도 없지만 전쟁도 실감하지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식민지배와 냉전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평화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화는 단지 전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작 가장 극단적인 비평화, 즉 전쟁에 대해서는 어느새 무뎌지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이 났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한두 번이야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쉬고, SNS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글에 ‘좋아요’를 누를 수도 있다. 당신이 조금 더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크라이나를 위한 모금 운동에 얼마쯤 송금하거나, 더 나아가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시위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로운 세계를 혹은 나라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평화의 감각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그러므로 쉽게 지치고 무뎌진다. 마치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쉽게 피로를 느끼는 후각처럼, 평화의 부재에 대한 감각은 무엇보다 쉽게 사라지는 것 같다.
무뎌지지 않도록, 상상에 동참하기
아쉽게도 평화로운 세계는 그냥 오지 않는다. 핵무기로도, ‘좋아요’로도 오지 않는다. 전쟁의 비극을 알리고, 평화를 갈구하는 많은 행동이, 외침이 있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제 점점 잊거나 무심해지기를 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평화였던가 기억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이 땅에 전술핵을 들이건, 핵우산이 씌워지건, 외국의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나서건 이제 참견하지 않기로 한다. 지치고 무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지 말자. 평화를 원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대신에 평화는 원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평화를 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비평화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벼리는 것, 그 모든 것들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그리고 스스로 묻기로 한다. 평화의 부재를 공기가 사라진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이상주의자의 것일 뿐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바로 그 평화를 상상하는 일에 동참할 것인가. 존 레논이 <이매진(Imagine)>이라는 노래에서 말했던 바로 그 상상 말이다.
오은영
오은영
두 번째 상상 대표. (사)문화다움의 연구위원. 인도 다람살라 티벳 난민촌의 록빠어린이도서관 관장으로 일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고 평화와 문화의 접점을 찾으며 문화를 매개로 한 평화 구현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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