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본다는 것은 주로 아이를, 아픈 사람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이다. 자기 돌봄은 말 그대로 자신이 그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보살핀다는 것은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나를 사랑하자’는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자기 돌봄은 늘 조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자기 돌봄은 심신의 건강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말한다. 이는 당면한 자극과 고민이 적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스트레스에 무너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 소중함을 절감하듯 몸과 마음의 위험신호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자기 돌봄에 적극적으로 되곤 한다. 이 위험신호를 스트레스를 넘어선 소진(번아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극도의 피곤함과 무기력감이 만성적이라서 며칠 푹 쉬거나 여행 등으로 기분전환을 해봐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고 애써 불을 붙여보려고 해도 이미 다 타버린 장작처럼 여간해서 기운이 나지 않는다. 소진은 일상의 피로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에서도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고 자신감이 없어지거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적어지고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으로 되기도 한다. 이렇게 소진과 자기 돌봄은 우리 삶의 여러 면면, 즉 몸과 마음, 사적 공간과 일의 영역에 걸쳐져 있는데 이는 결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현장에서 만난 예술교육가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과 일의 의미가 약해져 자존감이 손상되고, 만성적인 피로감과 무기력감, 위축감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 돌봄이 필요한 때다.
괜찮지 않은 마음
예술교육가들은 자신이 그러했듯이 예술교육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이나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즐거움과 성취감을, 때로는 치유를 경험하고 그래서 그들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예술에 대한 헌신과 소명 의식으로 일하면서 예술가로서, 교육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지만, 현장에서 접하는 많은 문제는 이를 위협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어떤 행동은 도저히 이해되지도 않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장에서 접하는 예술교육 혹은 예술교육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부족은 자괴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교육자에 대한 기대는 높고 이를 맞추기 위한 노력은 예술교육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되지만 보상은 정당하지 않아 책임감에 비례해 실망도 커진다. 이렇게 소진에 취약하면서도 늘 자신의 욕구보다는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욕구에 집중해야 하고 선생의 문제는 학생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하므로 예술교육가의 곤란은 종종 축소되거나 은폐된다. 외부적으로, 또 꽤 자주 자기 자신에게조차 괜찮다고 말하게 되면서 이런 어려움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위험은 가중되고 지속된다. 이런 상황은 괜찮지 않다.
대체로 자기 돌봄의 원리는 신체적으로도 무리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지며 소위 워라벨을 잘 지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소진은 가깝고 자기 돌봄은 늘 멀리 있는가. 이렇게 쓰다 말고 문득 유튜브에서 ‘번아웃’과 ‘자기 돌봄’을 검색해 보았다. 짐작대로 전문가들의 조언과 체험공유가 쏟아졌다. 자기를 돌보는 것이 어려운 건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나에게도 이런 종류의 조언은 늘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침이나 제안은 익숙해서 너무나 쉽지만, 이것이 지침과 제안으로만 그칠 경우 너무나 공허해질 것을 알기에 섣부르게 말하기 꺼려진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소진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제안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이런 조언을, 반드시, 하나라도, 실제로, 스스로에게 적용해보고 체험해보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친절하기
마음밭을 가꾸고 내공의 힘을 기르기 위해선 자신과 솔직하게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강하고 가깝게 경험하는 것이다. ‘솔직’에 방점이 찍힐 때 누구에게는 낯선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만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출구 없이 맴도는 반추와 후회라 오히려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솔직한 소통은 내가 나에게 제공하는 친절한 공감과 같이 가야 한다. 늘 더 나은 나에 대한 기대와 현재의 나 사이의 간극과 부조화, 그 상심을 토닥이며 그래서 괴로웠구나, 외면하고 싶었구나, 공감하며 말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반복될 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힘이 길러진다. 그러면서 예술교육가로서 나의 욕구와 가치관, 일의 의미,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점검해간다. 만일 내 기대와 욕구가 나 아닌 다른 누구의 것이라면, 그리고 현실에서 너무 많이 멀어져 있다면 그것을 내 것과 잘 분별하여 자신을 지켜가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도 현실적 경계는 엄연하다. 이를 잘 인식해서 역할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책임감과 통제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가진 생각이나 현실적인 경계를 잘 파악하기 힘들다는 데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을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기를 권한다. 스스로 생각해보기,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기, 누군가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기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러한 성찰과 사색은 몸과 정신의 휴식과 이완과 동반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빡빡할 때는 생각도 유연해지기 어렵고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힘들면 일이나 인간관계를 정리하여 물리적으로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경우도 많다. 물론 너무 많은 스트레스는 곤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잘 먹고 때때로 쉬면서 어떤 것은 이해해서 소화하고 어떤 것은 감정적으로 털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감당할 만큼 작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강하게 각인되는 온갖 나쁜 경험을 희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온화하고 즐거운 기억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음 크게 먹고 하는 일이 아니라도 짧은 순간의 깊은숨, 명상이나 기도, 아니면 늦은 오후의 산책이나 친구와의 수다도 좋다. 적더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는 늘 기운을 북돋운다. 어쩌면 지금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다거나, 세상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눈을 들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도움을 청하기 바란다. 의외로 동료 중에 같은 고민을 끌어안은 채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므로 누구라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예술과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며
아무리 좋은 것, 필요한 것이라도 새것은 낯선 것이므로 내 것이 되려면 감정적으로 충분히 강렬하고 반복적이어야 한다. 자기 돌봄도 그렇다. 자기 돌봄은 상태라기보다 그 상태로 가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 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성에 동의하고 습관이 될 만큼 지속할 수 있는 마음이 곳곳에 투여되어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보다는 위안과 만족의 과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예술에서 자신을 오롯이 만나고 그 안에서 휴식과 즐거움을 찾았던 순간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을 돌보는 전 과정에 예술은 깊숙이 관여하여 삶에 향기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정에 작은 응원을 보낸다.
박은선
박은선
서강대 생명과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받고 미국 시카고예술대학(School of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미술치료 석사학위를, 이화여자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상담심리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술치료사로 일하며 명지대학교 예술심리치료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sudhana2001@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