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현대인은 의뇌(義腦)를 가지고 있다. 손상된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의수나 의족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뇌를 보완하기 위해 스마트폰이라는 의뇌를 장착하고 사이보그로 살아간다. 노화되어가는 생물학적 뇌에 비해 주기적인 신상 제품으로 교체되는 의뇌라는 신체 부속은 인간의 기억을 더욱 스마트하고 강력하게 보조해줄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검색을 통해 뉴스를 제공하고, 소통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기억이 강화되는 게 아니라 소멸되는 경우가 많고, 소통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강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뇌를 통해 시대와 더 많은 경로로 접속하려 할수록 잠재적인 가능성의 관계는 상실되어 간다. 우리가 검색하는 정보는 생각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협소한 관심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을 차단하는 장벽이 되기 일쑤다. 동종애적 소통 속에서 미래에 도래할 질문들이 차단되고, 생태환경의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도 무력화된다. 성실히 추구하되, 자기 환경에 갇혀 있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현대사회의 대다수가 각개의 분야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각자가 속한 자신의 전문 영역에만 심취해 있는 분위기는 우려스럽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연구 취향의 알고리즘을 강화하며 분업화된 영역만 우선시하는 업자들이 문학장에 가득하다. 일각에서는 근대문학이 종언 되고, 영상 장르가 지배적인 권력으로 부상한 시대에 ‘문학적인 감각’에 몰두하는 것은 문학의 운명이라고 합리화한다. 문학이 주변화되는 것은 필연이며, 과대평가되어온 문학의 위상을 내려놓는 것이 문인의 염치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늘었다. 감당할 수 없는 명분을 진솔하게 내려놓고, 상당수의 문인이 생계를 위해 대학원에 가며, 프로젝트를 신청한다. 국가의 지원금으로 유지되는 문학업을 연마한다.
강고한 체제 안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문학을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실수리론(事實受理論)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상투어이자,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관료용어(Amtssprache)인가. 도정일의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는 문학의 가치를 협애화하고, 문학의 무력함을 정당화해온 무수한 종류의 상투적 변명 앞에서 문학(문화)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다.
  •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도정일, 문학동네, 2021)
  • 『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리시올, 2020)
관용의 문화 체계로서의 문학

도정일은 기성의 문학교육이 타자와 공존하는 체계로 거듭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의 저서 전반에서 강조되듯이 문학교육은 ‘오로지 문학’이라는 한정에서 벗어나 탈영역화할 필요가 있다. 타 학문과의 연계를 통해 문학 자체가 하나의 안정된 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유로운 담론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신을 키우고 내면을 확장해야 하는 대학교육에서조차, 문학은 학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업계의 공식을 따르는 것에 충실하다. 문학전공 교수 지망생과 등단 지망생들의 강력한 충성으로 유지되는 대학의 문학교육에는 건강한 외부가 없다. 문학장이 학술장과 쌍생아가 되어 새로운 독자들을 환대하지 못하는 현실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학의 문학교육은 ‘교수’를 길러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대학의 문학 전공 학과들은 마치 특정 문학 분야의 전문연구자/전공교수를 양성하는 것이 문학교육의 목적이라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지금 대학 문학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일의 하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이해하며 문학작품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진 차세대 독자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극히 중요한 것이 독자공동체의 형성이다. 미래의 독자가 길러지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문학의 활성화가 가능할 것인가?”(『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83~84쪽)
도정일은 전문연구자를 길러내는 문학성 위주의 문학교육에서 벗어나 ‘통합 학문적 리터러시의 함양’으로 문학교육을 전환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이라는 것은 생래적으로 “관용의 문화 체계”를 취하며, 동시에 타자와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인간 분할’의 메커니즘을 가장 치열하게 저항하고 고발해온 장르다. “이 특성을 제거하거나 그것에 무관심할 때 문학교육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122쪽)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세계를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분할하는 도구에 관심을 두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교육은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읽는 능력과 깊숙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문학교육은 계급, 성별, 인정, 이데올로기, 국적, 신분, 언어, 종교, 지역 등의 구분선에 관심을 두는 문화연구와 자연스럽게 접속되고, 다양한 시좌(視座)에서 새로운 독자를 조명하게 만든다.
우리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상징질서 시스템은 타자성의 인식을 방해하는 강력한 조건이다. 문학의 장은 명령하고 금제하는 대신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작자들을 무한 경쟁하게 만든다. 그 안에서 유희의 무한 허용이 이루어지면서, 체제 질서가 유지된다. 차별화된 감각과 무한한 유희가 수월성으로 각광받으며, ‘어른은 없고 아이만 있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의 문학이 지탱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정체성의 문학을 깊숙이 추구할수록 자아도취적 욕망 속에서 타자의 자리는 지워지게 마련이다. 자기와 타자를 분할하며 자신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아이’의 문학을 어떻게 타자성에 열려 있는 성숙한 예술로 만들어낼 것인가.
도정일은 이러한 고민을 글로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용의 문화 체계를 얽어나가는 문학교육 시스템을 디자인해왔다. 문학을 포함하여 인문학과 시민교육을 통합한 ‘후마니타스칼리지’란 교양대학을 만들어 대학 내에 정착시킨 과정은 교양 교육의 선도적 사례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어떻게 쓸까’와 ‘무엇을 문제로 구성할까’를 연결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제도적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에, ‘아이’의 놀이터에는 다양한 담론의 주체들이 미래의 독자로 드나들 가능성이 생겼다.
약한 연결 속에서 관광객이 된다는 것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속한 문화적 공간들은 대개 동종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정일은 대학교육의 강의실 자체를 갈등, 이질성, 긴장이 넘치는 ‘문화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오늘날 대학 강의실은 반향실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간 중 하나다. 교육 수준은 물론 자산과 계급 면에서도 동질성(homogeneity)을 가진 또래 집단으로 클러스터링(clustering)되어 있어 강의실 내에서 이질적 타자를 통한 자기 변화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동종의 집단 안에서는 타자와 공존하자는 이상적 명분보다는 ‘우리’끼리 잘 지내자는 실리적 안정이 선호되곤 한다. 토론을 거듭함에도 인간의 언어는 소속 공동체를 안정화하려는 알고리즘의 방향을 따른다. 긴장을 잠식시켜 내면의 질문을 할 수 없는 필연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양대학에서 필수교과를 강의하고 있다. 특별히 지난 학기에는 학내 시스템이 아닌 외부 플랫폼의 공론장을 통해 비대면 시험을 보았는데, 이는 수강생들의 글과 생각이 동질화되다 못해 획일화되는 경향에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강생들은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관심사와 연루된 토픽을 선정하여 이를 확장하는 형태로 글을 썼고, 성별, 세대, 계급, 전공, 학력, 직업, 장애 여부, 가족, 거주지 환경 등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플랫폼 이용자들이 수강생들의 글을 읽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낯선 이들과 댓글 토론을 하고 공감(‘좋아요’)의 상호작용을 한 결과물을 모아서 제출하는 형태의 평가였다.
수강생들은 동종의 학술장에 속하지 않은 이들과 ‘좋음’의 감각을 소통하는 방식에 특히 서툴렀다. 기성의 감점 체제 속에서 훈육되어온 학생들은 자기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써내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이질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방식에는 미숙했다. 타인에게 공감을 많이 받은 글이 어떤 면에서 좋음으로서의 ‘탁월성(arete)’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강한 연결’의 관계에서 유능함을 보이던 학생들도, 낯설게 주어지는 ‘약한 연결’의 관계 속에서는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는 것에 취약성을 보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이런 방식의 ‘약한 연결’이 너무나 부족했던 건 아닐까. 24시간 접속하고 있음에도 낯선 정체성을 향한 방문 기회는 드물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아즈마 히로키가 강조한 ‘관광’이란 개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쓴 『관광객의 철학』은 ‘관광’이라는 단어와 그가 사유해온 다종의 저작을 망라해 총합문화적 관점에서 집필한 책이다. 관광이란 말이 여행이란 말보다 경박한 뉘앙스로 느껴져 논자들에 따라서는 오해할 소지가 있음에도 저자는 그 가벼움의 느낌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광의 철학’을 개념화한다.
일반적으로 ‘관광’이라는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것이자 무목적적인 것이다. 들뜨면서도 가벼운 것이며, 대중적이고 소비적으로 이루어지는 형태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에게 ‘철학’이란 것은 이러한 ‘관광’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는 공동체의 질서에 착근하여 정답을 추구해온 진지한 사상들이 타인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 그간 타자와 공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타자를 변화시키려는 소통 방식은 아타(我他)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자기 신념의 절대화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즈마 히로키는 자신이 축적해온 알고리즘의 언어로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자신이 정주하던 친숙한 세계를 떠나 외부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나기를 권한다. 한없이 가벼운 관광의 형태로 말이다.
일부 권위 있는 철학자들은 이러한 소비적 관광 형태를 동물적 삶으로 비하해 왔다. 그러나 거주지를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일정 시간 동안 비일상에 머물게 하는 행위는 목적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게 한다. 익숙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숨기며 살았던 인간은 검색으로 살펴본 이미지와 관광지의 실상을 비교하면서, 자기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일상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이들과 우연히 만나 ‘노이즈’로 부딪칠 때, 그 부박한 연결 속에서 잊을 수 없는 타자성을 감각하기도 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우연히 마주치는 타자성의 경험을 인간의 조건으로 설명하며, 인간이 가족을 만나는 방식과 연결 짓는다. 아이의 탄생이란 주체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배송사고(오배, 誤配)로 시작되지만,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다. 인간들은 오배송된 우편일지 모르는 이질적 타자를 마주치며 당황하겠지만, 그러한 타자의 마주침이 누적되면서 점차 “다음 세대를 만드는 부모”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연에서 시작하였지만 자아와 타자를 오가는 ‘관광’으로서의 약한 연결들이 없다면, 미래의 필연적 관계들은 펼쳐지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과 예술과 철학의 길도 다르지 않다. “가능한 한 많은 우연의” 타자를 맞이하면서 ‘연결로부터, 연결에 맞서서, 연결을 위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저자가 책말미에서 강조한 문장은 그러한 ‘약하고 꾸준한 연결들’이 유사가족으로서의 인간의 문화사를 이어온 동력이었음을 깨우치게 한다.
“아이로 죽는 데 그치지 말고 부모로서도 살아가라. 2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관광객의 철학』, 318쪽)
노지영
노지영
문학평론가. 몇몇 대학에서 문학과 교양을 강의하며, [내일을여는작가] [시와시학] [통일문학]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인문학 공연과 향유사업 현장에 참여하며 문학과 독자의 소통에 관심을 가져왔다.
norae@hanmail.net
이미지 제공_리시올,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