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이 최근 한 칼럼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는 ‘젊을수록, 혼자일수록,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일수록’ 외로움을 자주 느낀다고 덧붙이며, 가장 고위험군 세대가 20~30대 젊은 세대라고 지목한다. 20~30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능력주의가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고, 코로나19 이후 사회 양극화가 더 심해지며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상도 도움을 청할 곳 없는 사람들이 느는 현상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외로움은 고독과 전혀 다르다. 외로움은 손 내밀 곳이 전혀 없는 ‘고립’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나를 위한 시간에 고독할 수 있는 힘, ‘고독력(孤獨力)’을 키우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점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어느 시인이 “외롭기로 작정한다면 어딘들 못 가랴”(고정희)라고 한 표현은 아마도 고독력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시대 우리가 사는 삶터와 일터가 고독은 없고 외로움만 가득한 곳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고, 편(便)을 들어주고, 품어줄 수 있는 안전지대 같은 예방적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지난 10월 9일 포항에서 열린 전국문화도시협의회 정책포럼에서 「‘곁, 편, 품’을 위한 문화안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것도 그런 내 생각을 표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계의 평상’을 놓자
그렇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사는 삶터와 일터가 온기가 있고 인기척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대면 온라인(online) 공간을 사람들의 온기가 있는 ‘온(溫)-라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라는 극단적 신자유주의의 정언명령이 작동하는 삶터와 일터에서 외로움을 더 자주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최근 논의되고 있는 문화안전망에 대한 구체적인 내실화가 더 필요하고, 누구나 동네 거점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마을예술학교’ 같은 형태의 문화예술교육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문화예술교육 지역화에 따른 포럼’에 참여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춘천 포럼(8월)에서는 어깨 힘 빼고 동네에서 작은 공론장을 만들고자 분투하는 동네 지식인들의 활약상이 기대되었다. 돌봄전환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 ‘돌봄의 근육’(강원재)을 키우자고 한 주장도 퍽 기억에 남는다. 광주 북구문화의집·전남 구례 지리산씨협동조합·전북 완주 복합문화지구 누에가 공동주최한 포럼(9월)에서는 읍·면·동이라는 지역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평상’을 놓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했다. 광주 북구 양산동 옛 양산시장 골목에서 마음놀이터를 운영하는 김옥진 대표가 골목 어귀에 주차공간 대신 ‘평상’을 놓았더니 주민과의 관계가 살아났다고 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관계의 평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력히 환기한다.
“당신의 몸에 자유를 허하라”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있다. 분권과 자치를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교육의 지역화가 큰 이슈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우선,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A.그람시) 공위기(空位期, Interregnum) 상황에서는 사회·정치적 지체 현상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시대 돌봄전환사회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출되었지만 갈수록 힘을 잃고 ‘모든 것은 예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는 식의 낡은 관성과 관행이 여전한 것을 보라. 이런 관성, 관행, 라이프스타일과 과감히 작별하고, 소비자로서의 정체성 대신에 ‘세계감(世界感)’을 갖춘 시민으로 전환하려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행정의 언어가 아니라 제땅말(사투리)의 언어와 삶의 언어를 회복해야 하고, 이코노믹(economic)에서 에코(eco)로 전환하려는 비평(critic) 정신의 회복이 요청된다. 어쩌면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위드코로나 시대 예술교육, 문화돌봄 같은 문화예술(교육) 활동들은 ‘영구혁명’의 속성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지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예술’의 가치와 쓸모에 대해 신뢰하며, 내가 사는 동네에 예술(교육)거점들을 구축하고 관계의 평상을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8월 교육방송(EBS)에 방영된 <예술의 쓸모> 3부작(8.9~8.11)에서 춤꾼 안은미가 “당신의 몸에 자유를 허하라”라고 한 말은 예술과 예술교육의 쓸모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표현한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랄 정도로 억센 것’(수전 손택)이라고 한 말을 뒤집을 수 있는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는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에서도 언제나 ‘경이로움’의 감각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각자 고생’을 넘어 참여의 문화로
이 점에서 지난해부터 추진되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기초 단위 문화예술교육 거점구축 지원사업’(약칭 ‘기초거점’)을 비롯해 마을교육, 마을배움, 문화도시사업이 하나의 정책사업의 트렌드 내지는 또는 유행으로 인식되고, 또 하나의 지원사업 장르로 오해되는 현상은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장에서 예술과 예술교육의 관점이 희박해지며 여전히 문화향유 차원에서 설계되고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고, 활동의 전환이 요청된다. 실질적인 분권과 자치는 문화를 향유하기 보다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문화기본법」 제4조에 명시된 향유권과 접근권, 참여권의 보장을 위해 ‘문화안전망’을 제도화하자는 논의는 더 보완해야 할 숙제들이 많다. 다시 말해 정책 공급자 입장에서 설계된 문화안전망 개념은 아프면 불안한 사회에서 예방적 사회정책을 위한 최소기준일 뿐 실질적인 문화자치를 위한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어린이, 청소년, 20~30대, 노인, 장애인 등 전 세대를 아우르며 사람 돌봄과 자연 돌봄을 추구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서의 예술거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그런 공간을 문화안전망이라는 말 대신에 ‘인문대피소’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11월부터 위드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토양을 ‘돌보는 공동체’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인문대피소(예술거점)가 필요하고, 그런 공공 공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주체로서 동네지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가, 예술교육가들이 동네지식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 및 예술과 만나는 다양한 마주침의 경험을 통해 지역 주민이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과 에너지의 흐름에 ‘의하여’ 살려고 하는 작당 모임이 여럿 필요하다. 활동의 자폐성을 넘어 지역 실정에 맞게 노동, 복지, 교육, 보육, 주거가 함께 작동하는 동네를 상상하고 구축하려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뉴노멀은 저절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실체적 내용이 달라질 것이리라. ‘각자도생’이 권장되는 사회는 ‘각자 고생’하는 사회일 뿐이다. 곁, 편, 품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며, 내가 사는 삶터에서 손을 내밀 줄 알고 잡아줄 줄 아는 ‘세계감’을 갖춘 이웃의 탄생을 기대한다.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춘천문화재단 [POT] 편집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생애。전환。학교』(공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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