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를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남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언제나 나를 지지해 줄 것만 같은 든든한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짭조름한 신안 지도의 오일장,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곡류천, 해 질 무렵 반짝이는 바다가 일품인 영광 백수, 강진 차밭에서 바라보는 가을 월출산. 오늘은 땅끝 해남이다!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완도를 마주하고 있는 해남군 북평면 해월루로 향했다. 해월루는 수군의 정박 장소이기도 하며 제주도를 왕래하던 사신들이 머물렀던 객사(客使)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저녁에 물이 들어차면 마치 바다에 달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겨울에 이어 두 번째 방문임에도 지루할 새 없이 들고나고를 반복하는 해월루 앞바다를 바라보며 문화지소 지킴이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끄트머리에서 시작한 실험
‘문화지소’는 전남문화재단이 자체적으로 추진 체계를 구축한 생활권 단위 문화예술교육 거점이다. 지역 보건소에 속해 있는 보건지소처럼 말이다. 문화지소는 2018년에 수립된 「전라남도 문화예술교육 계획」에서 농산어촌 지역의 문화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지역 문화예술교육 플랫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문화예술교육 관련 인지도, 다양성, 질적 격차가 매우 크고, 그마저도 단년도 지원사업으로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문화지소 설치는 전남문화재단의 최우선 과제였다. 2019년 시범사업을 시작(담양군, 장흥군)으로, 2020년 해남군, 신안군, 무안군, 고흥군, 최근에 선정된 진도군까지 현재 총 5개 문화지소가 만들어졌다. 문화지소 사업을 시작부터 이끈 김수재 주임의 말끝에서 지역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전남의 자원을 바탕으로 주민에게 밀착한 작은 단위의 문화예술교육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지역 끄트머리에서.
문화지소 해남을 운영하는 야호문화나눔센터 전병오 대표와 정수연 지소장은 서울에서 귀촌했다. 연극인의 삶을 살던 부부는 서울살이가 지칠 때마다 국토 순례를 다녔다. 매해 다니던 국토 순례 길에서 남도의 햇볕에 감탄하며 언젠가 한번 살아보고 싶은 곳으로 해남을 손꼽았다고 한다. 무작정 짐을 싸서 해남으로 내려와 기관에서 일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더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지역과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2014년 야호문화나눔센터를 만들어 연극을 매개로 주민과 ‘놀기’ 시작했다. 세대 구분 없이 누구나 함께 놀며 배울 수 있는 열린 연극, 무대 위 조명이 아닌 해남 숲의 자연 빛을 받으며 말이다.

2020년 야호문화나눔센터가 문화지소 해남을 운영하게 되면서 가장 공들인 일은 주민의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해월루가 갖는 의미, 장소적 매력 때문인지 이 공간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는 후문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이고, 주민과 무슨 일을 도모하고, 지역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 해월루가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지를 이곳이 소재한 북평면 지역민에게 상세히 알렸다.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문화예술교육을 방과후 프로그램 정도로 알거나, 1인 1악기 사업처럼 악기를 배워 무대에서 발산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었어요. 물론 필요한 부분이지만, 예술강사조차도 스킬(악기 연주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계시더라고요.”
– 정수연 문화지소 해남 지소장, 야호문화나눔센터 플레이아티스트

  • 해월루 문화지소 해남 전경
  • 문화지소가 위치한 북평 청년회와 만남
경청과 공감, 마음을 얻기

이처럼 척박한 지역의 현실을 마주하고서 문화지소가 해야 할 일은 지역 사람들과 만나는 것부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함께 소를 키우며 블로그를 운영하는 청년 농부, 대안학교 졸업생들, 몽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지역아동센터 운영자, 주민자치위원, 청소년지도사 상담사, 연극연출자, 시인, 방과후 강사 등 여러 층위 사람들과 ‘문화지소 해커톤’을 마련해 해남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이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고 있던 일들이 결국 그러한 활동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고, ‘나도 예술가였네’, ‘나도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었네’라며 자기 작업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하고, 평소 자신의 갈증과 고민을 활동으로 구현하고자 구체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차를 가지고 멀리 나갈 일이 있을 때, 동네 어르신들을 읍내까지 모셔다드릴 일이 종종 있어요. 보통 내릴 때까지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차비 천 원을 두고 내리실 때도 있고, 막무가내로 사탕을 던져주고 가실 때도 있어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혼자만 듣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서 어르신들과 차에서 나누는 대화를 영상으로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상을 공유해서 마을에서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이어가고 모임도 할 수 있고요.”
– 문화지소 해커톤에 참여한 청년 인터뷰 중에서
읍내 나갈 때마다 차에서 듣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청년, 고령화에 홀로 사는 마을 ‘아짐’들의 이야기책을 만들고 싶은 활동가, 다문화 자녀들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주부, 타지에서 귀촌한 이들과 또래모임을 기획하는 청년들, 모두 자신이 살거나 혹은 활동하는 범주에 몰입한 결과들이다. 해남에 살며 서로 모르고 지내던 이들이 하나의 관심사로 모여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월루 방 한 칸을 내어놓은 것은 탁월한 시작점 같다.
최근에는 이들의 관찰력으로 재미난 기획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해남군 구청사 고별전》이 그것이다. 이 전시는 《버리지 못한 물건》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주민들의 삶에 대한 아카이빙’을 목적으로 마을의 버려진 창고, 집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물건에 얽힌 사연을 공유하는 작업이었다.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69년에 지어진 해남군 청사가 신축 이전을 앞두고 곧 허물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군청사도 해남군민에게는 52년간 지역의 구심점이었던 또 다른 의미의 버리지 못하는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전시장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군민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물건을 모으고, 해남군 청사의 오래된 집기와 물건들을 재구성해 온 마음을 담았다. 마을 단위의 기록으로 시작한 일이 군민의 이야기까지 담아내는 것으로 확장한 것이다.
건물이 허물어지는 일정에 맞춰 긴박하게 준비하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해남군에서도 군민의 마음이 담긴 전시의 의미를 이해하고 철거 일정을 조정하고 예산 일부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전시를 통해 문화지소 해남에서 하는 일들을 행정과 군민도 자세히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20년부터 시작한 문화지소 해남의 ‘마음 사는 일’은 이렇게 여전히 진행형이다.
  • 어린이 해커톤 : 내 친구 집을 찾아서
  • 김 그물 만들어 놀기
‘스며들기’ 작전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분주했던 한 해를 정리한 후 내년에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물었는데, 야호문화나눔센터의 계획은 한결같고 명쾌했다.
“이곳에서 서로의 배움의 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부터 노년 세대까지 누구나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죠. 자기 삶을 내놓고 타인과 나누는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는 장이 이곳에서 펼쳐져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에 해월루 인근 마을에 30년간 김 공장에서 김발 만드는 일을 하신 70대 어르신을 뵙게 되어 현산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한 작업이 있어요. 할머니와 함께 김 그물을 만들고 그것을 배경 삼아 드림캐처처럼 소원 걸기 프로그램을 했어요. 이렇게 세밀하게 주민을 만나면서 그들의 경험치와 능력을 배움의 자원으로 삼아 지역과 나누는 방식으로 확장할 예정입니다.”
– 정수연 지소장
정수연 지소장은 지역에 살다 보니 개인의 삶과 동떨어져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이 함께하는 이들의 삶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고민하고, 가장 작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가치를 최대한 발현하는 작업을 지속하려 한다.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앞서, 나는 행복한가, 나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가르친다’는 개념이 아닌 ‘함께 노는 것’ ‘함께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아이들도 행복하고, 어른도 행복합니다. 서로 성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지역에서는 ‘관계 맺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 이웃, 사물이나 자연, 공간, 나아가 행정이나 관계기관까지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고는 어려워요. ‘문화예술교육’이라 굳이 명명하지 않아도 문화예술교육적 태도와 방법으로 이들에게 ‘스며들기’를 하려고 합니다.”
– 전병오 야호문화나눔센터 대표
10년 넘는 해남 생활에서 이들의 ‘스며들기’ 작전은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지역 현안 중 하나인 ‘작은 학교 위기’와 관련하여 교사가 문화예술교육 연수를 통해 마을 교육활동가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하는 연수 설계와 운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교육연수센터와 지역센터가 협력하여 올해는 온전히 지역의 환경에 맞게 지역(단체)에서 과정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국 4개 지역 중 전남 해남, 신안이 선정되었고, 두 지역 모두 문화지소로서 기초단위에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남군 구청사 고별전》
이제는 지역에 맞춤한 옷을 입자
지역 문화 분권의 토대는 이러한 도전과 실험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전남문화재단 문화지소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남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삼고 17개 군을 모두 찾아가 사업을 설명하고 지역에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설득하였다. 선정된 5개 지역이 향후 자생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후속적인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관계기관 사업에 공모하거나 지역사회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는 등 단체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역할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문화지소가 다른 사업과 다른 점은 기존에 중앙에서 짜 놓은 사업이 하달되는 구조가 아닌 지역에 맞는 맞춤형 사업이 이뤄진다는 것이죠. 이제는 지역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어요.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행정과의 관계 설정이 매우 중요하고요, 지역마다 각기 다른 환경과 성향에 맞게 사업이 설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예산, 공간, 조례 등 다른 것들도 중요하지만, 문화지소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이 지역에 자리 잡고 계셔야 합니다.”
– 김수재 전남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팀
나의 고향 전남은 지방소멸 위기 한가운데 놓여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 사람의 생애를 존중하며 공동체의 행복, 나아가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문화지소 지킴이가 있기에 안도한다. 땅끝 해남에 (일부러 간다면 더 좋겠지만) 가시거든, 남창리 해월루를 들러보시라 권한다. 주민, 여행객에게 방 한 칸보다 더 따순 곁을 내줄 거니까.
박우주
박우주
지리를 공부하며 광주의 사라져가는 동네를 찾아다니는 것에 폭 빠졌었다. 그 길로 준비하던 임용시험을 집어치우고, 직업란에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 익산문화재단을 시작으로 광주 대인시장을 뛰어다니다 현재는 북구문화의집에 몸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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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문화지소 해남(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haewollu_haenam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