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때부터인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첫머리를 읽으면서 투시하지 않은 보아구렁이 뱃속의 코끼리 그림을 우리는 알아챌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그림 제2호를 보아야만 뱃속의 코끼리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
#2.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옛날 속담이 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져 보는데 저마다 다른 부분을 만지고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우긴다”라는 내용이다. 다 알지 못하면서 전부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속담이다. 속담 자체로는 부정적 뉘앙스를 띤다.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단순히 눈이 아닌, 오감(여기서는 촉감)을 이용한 자신만의 상상 속 코끼리를 창조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 속담과 『어린 왕자』의 첫머리가 중첩되면서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우리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와 비장애, 상상과 사실을 구별하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정작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 말이다.

1996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한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는 이러한 획일적인 예술의 감각에 대해 통쾌한 ‘한 방’을 날린다. 세상의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알아나가도록 일깨우는 프로젝트를 탄생시키고 묵묵히 진행하고 있는 엄정순 작가(사단법인 ‘우리들의 눈’ 설립자이자 디렉터이기도 하다)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사실 내가 미술전문지의 기자가 되었을 때, 처음 만났던 작가가 바로 엄정순 작가였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장 작가들을 잘 모르던 때, 신입 기자들 환영회 자리에 참석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준 이가 바로 엄정순 작가였다. 그래서일까. 10여 년의 기자 시절, 엄정순 작가의 프로젝트를 종종 취재하면서 내용을 좇을 수 있었다. 앞선 ‘코끼리’에 관련된 이야기도 ‘우리들의 눈’에서 진행한 <코끼리 만지기> 때문에 계속 뇌리에 남아있지 않았나 싶다.
엄정순 작가를 인사동 코트(KOTE)에 위치한 ‘우리들의 눈’ 작업실에서 만났다. 번듯한 사무실 없이 본거지를 옮겨가는 엄정순 작가에게서 노마드적인 자유로움과 이제는 규모와 시스템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간만이다. 못 본 사이에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더욱 커진 듯하다. 먼저 프로젝트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정말 오래간만이다. (웃음) 간단히 얘기해서, 시각장애인과 함께 진행하는 예술 프로젝트다. 이는 교육이 될 수도 있고, 전시가 될 수도 있고, 책 출간이나 그 외의 다양한 활동이 될 수도 있다. 한글 이름으로 ‘우리들의 눈’이지만, 영어로는 ‘Another way of seeing’이다. 시각 장애는 결핍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이 되고 ‘우리들의 눈’이 되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안 보이는 것에 대해 ‘다르다’ ‘독특하다’ ‘미래를 본다’ 등 다양하게 해석을 해왔다. ‘결핍’과 ‘장애’의 문제로 접근한 경우는 20세기에 들어선 이후다. 부정적인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다.
이른바 ‘잘 나가는’ 화가였다. (웃음) 그런데 회화 작업이 아닌,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회화 작업과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두 프로젝트는 일종의 균형 문제다. 내가 고민하는 화두를 작업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렸을 때 얘기를 먼저 하는 게 나을 듯싶다. 타고나기를 보는 것, 시각이라는 것에 예민했던 듯하다. 특히 내가 본 것에 대해 어른들에게 얘기했을 때, 어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인지, 나름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에피소드가 있는데,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나왔다. 녹물의 주황색이 흡사 오렌지 주스 같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들에게 “오렌지 주스”라고 했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이런 경험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눈에 대한 의심으로 커졌다. 과연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깊어졌고, 이에 대한 고민을 풀고자 자연스레 시각예술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후 쉼 없이 작업을 했고, 이를 전시를 통해 보여주었다.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도 되고 한 해에 개인전을 두 번 열고, 그룹전을 10여 회 참여한 적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중, 어느 날 선이 끊어진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이른바 번아웃된 듯한 느낌. 한번 쉬면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일본 시각장애인의 작업을 볼 기회가 있었다. 아마 그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온 듯하다.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에 대해 과거에 몇 번 접한 적이 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과거 대학교수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성당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재직했던 대학교가 충주에 있었는데, 성당 프로젝트의 자료를 얻기 위해 충주에 있는 맹학교인 성모학교를 찾았다. 거기서 무엇인가 머리를 때리는 경험을 했다. 줄곧 생각했던 ‘본다는 것’과 관련해서 ‘안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에 대해 계속 파고들면 나의 의문에 대한 해답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상황이 발생하면서 성당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는데, 나의 진짜 프로젝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학교에 사표를 내고 곧바로 성모학교에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하겠다고 했다. 학교 측에서 처음에는 의문을 품으면서 반대했지만, 개인 후원금을 내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나의 근원적인 질문에 다가가고자 했다. 처음에는 단발성으로 생각했는데, ‘본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결국 3년을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을 의심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학교 옆에 아파트를 구해서 살았는데, 맹학교 학생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야근을 하고 밤늦게 퇴근하는데 주변이 너무 어두웠다. 이른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무섭고 걱정스러웠는데, 곁에 있던 한 학생이 ‘걱정말라’며 내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아파트로 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각이 아닌, 또 다른 ‘봄’이 있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세계였다. 이제 ‘본다’는 것에 살펴볼 게 더욱 많아진 것이다.

이번 인터뷰의 가장 큰 주제는 장애인의 다른 감각의 세계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함께 활동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 이 에피소드가 이러한 인식을 깨우친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 ‘본다’는 것에 대해 수많은 의미가 생겼다. 그리고 3년의 과정에서 나의 질문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의 예술적 활동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난해 열린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에서 한 이야기 중 하나가 ‘어쩌다 리더가 된 화가’였다. 사실 처음에는 어렸을 때의 질문을 작업으로써 풀어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는데, 이제는 시각장애인들의 예술적 활동에도 무게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어쩌다 리더가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과정과 내용에 관해 설명해달라.
처음에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커리큘럼이나 내용이 많이 충실해졌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몇 가지 공을 들였다. 먼저 전문가로 이루어진 최고의 강사진을 모았다. 핵심을 빠르고 확실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작가들로 구성했다. 그리고 모든 교재와 재료들이 전문가용이다. 이런 요소들 하나하나가 좀 더 진정성 있는 교육으로 다가간다. 학생들도 그냥 ‘시간 때우기’로서의 미술 시간이 아니라 본격적인 선생님과 본격적인 재료로 수업하게 되니 자세가 진지해진다. 마지막으로 체계화다. 경험이 없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선입견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커리큘럼 과정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1년간의 프로젝트 과정을 거쳐 수업과 결과에 대한 전시를 진행한다. 첫 10년간은 거의 자비로 진행했는데 이제는 많은 후원이 들어오기도 하고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물론 후원은 더욱 많을수록 좋다. (웃음)
이렇게 프로그램에 체계화가 이루어지면서, 시각장애인을 미술대학에 보내는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었다. 총 3명의 학생이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성과를 냈다. 2009년부터는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국에 12개의 맹학교가 있는데, 이 프로젝트는 문화적 환경이 열악한 지방의 맹학교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 기회가 되도록 매년 한 학교씩 순회하며 진행한다. 2009년 인천혜광학교에서 시작하여 10여 년간 8개 학교와 함께 했다. 실제로 코끼리를 만나보는 체험도 하고 자신이 생각지 못한 커다란 크기의 작업에도 도전한다.
최근에는 사고로 시각을 잃은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삶의 중간에 사고로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치유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또한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 <코끼리 만지기> 전시(2019)
  • <디자인을 만지다(Touching The Icon)>(2017)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꼽는다면 무엇인가?
이제 시각예술은 단순히 시각으로만 통용되지 않는다. 오감의 세계가 되었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가 군대에서 암호병으로 근무한 색다른 경험을 통해 상징과 기호를 활용한 작업을 진행했듯이,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 그리고 우리의 오감을 모두 활용하여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는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전환’을 확인하는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과 함께 개념이 아닌 실제 체험을 통해 이러한 시각예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25년이 지나고 나니 개인적으로는,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갔던 이 프로젝트가 하나의 거대한 ‘프로세스 아트’였다는 생각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창의성의 프로세스 아트 말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테이블 옆에 둔 책 두 권은 어떤 책인가. 사이언(푸른색) 표지와 마젠타(붉은색) 표지가 대비된다.
사이언 표지의 책은 지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한 <코끼리 만지기>의 10년을 정리한 책이다. 이 프로젝트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하고 있다. 마젠타 표지의 책 <디자인을 만지다(Touching The Icon)>가 사실 역작이다. (웃음) ‘점자 촉각 아트북’인데, 이미지, 국문, 영문, 점자까지 총 4개의 언어가 하나의 책 속에 구현되어 있다. 사실 지난 10여 년간 스마트폰이 일상생활로 들어오면서 시각장애인들도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 스마트폰은 음성지원 등으로 이동이 자유롭고 정보를 얻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스마트폰을 필수품으로 사용하지만, 자신이 사용하는 앱(app)의 아이콘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기에 매우 궁금해한다. 이 책은 이를 소개하는 책이다. 설정, 전화, 메시지, 카카오톡, 날씨, 지하철, 음악 등 총 13개의 정보나 SNS 앱의 아이콘을 볼록한 도형과 국영문, 점자로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은 표지에 있는 스마트폰의 기본적인 앱 화면배치부터 시작해 사용하는 앱의 아이콘 이미지를 읽는다. 앞뒤 표지의 그림은 시각장애인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그린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의미가 큰 책이다. 앞으로도 이런 기획의 책을 출간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 해달라.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 힘쓸 것이다. 지난 25년간의 프로젝트 아카이빙에도 좀 더 신경을 쓰고자 한다. 이와 함께 개인 작업으로 여전히 진행 중인 회화의 결과물을 선보이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2년 정도 후로 생각하고 있는데, 2015년에 연 개인전이 가장 최근이니 약 6년이 지났다.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와 회화 작업은 결국 나에게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다. 이 두 작업의 비중을 따지자면, 물론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크지만, 여전히 두 작업의 균형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에게 ‘본다’라는 것, 이에 관한 탐구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어렸을 때 겪었던 경험과 기억이 평생 작용을 한다. 엄정순 작가가 25년간 천착해온 이 거대한 프로젝트 또한 작가가 어렸을 때부터 고민해왔던 문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빅 픽처’였다. 자신의 내밀한 의문과 사회의 커다란 이슈가 만나 시너지를 불러일으킨 이 프로젝트는 결국 작은 ‘다름’이 일구어낸 평등과 사랑이 담긴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과거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부부가 개념미술이나 대지미술로 명명된 프로세스 아트를 진행했던 것처럼 시각적으로 거대한 스펙터클함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엄정순 작가의 프로젝트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점점 거대해지는 또 다른 의미의 프로세스 아트이자 스펙터클함을 보여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물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작가를 뒤로하고 인사동을 나선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하늘의 구름이 흡사 모자 같다. 아니,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같다고나 할까.

엄정순
엄정순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독일 뮌헨 미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다수의 개인전과 국내외 그룹전에 참가했으며 건국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4년간 강단에 섰다. 맹학교 성모학교에서의 미술 교육을 계기로 1996년부터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를 시작해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했다. ‘우리들의 눈’ 디렉터로 맹학교 미술교육, 미대 진학 프로젝트, 작가 인큐베이팅, <코끼리 만지기> <글래스 미> 등 출판, 전시, 아트 프로젝트, 예술교육 관련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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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현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미술전문지 [아트]와 [월간미술]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현재 [페도라 프레스] 편집장, 미술 저널리스트,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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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 제공_(사)우리들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