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나는 친구와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나는 미술관에 다니는 건 좋아하지만 정작 작품을 감상하는 법은 잘 모른다. 최준도 아니면서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 할 줄 아는 말이 ‘어? 예쁘다’뿐인 나는 친구에게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을 발견했다.
  • 얼룩덜룩한 회색 바닥에 하얀색으로 헤드셋 모양과 QR코드가 있고, 그 위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이라고 적혀 있다.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고 있는 그림자가 보인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재난과 치유》(2021) 전시 중 한 작품 아래의 바닥을 찍은 것이다. 직원에게 문의한 결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은 교육팀에서 지정한 일부 작품에 대해서만 마련되어 있다. 아직 대부분의 작품에는 의미와 맥락을 해설해주는 작품해설만 존재한다. Ⓒ안희제
이 감각에서 저 감각으로
작품 근처에 있는 QR코드를 카메라로 인식한 뒤 나온 음성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미술관의 작품해설과 달랐다. 원래 작품해설은 만들어진 시기나 작가가 속한 유파(流派) 등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품 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이미 그 작품 자체는 볼 수 있는 관람객이 그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걸 돕는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용 음성해설에는 작품의 생김새를 상세히 설명하는 ‘작품 묘사’와 기존의 ‘작품해설’이 차례대로 들어 있었다. 작품 묘사를 들으면서, 나는 작품을 더 자세히,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감상하고 있었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오로민경 작가의 《영인과 나비》(2019) 전시에서 작품 묘사를 들을 때도 눈으로만 볼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작품의 방향이나 각도, 생김새, 배치와 같은 것들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작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작품의 형태는 어떤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비로소 작품을 감상할 준비가 되었다. 드디어 ‘예쁘다’ 말고도 할 수 있는 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시각장애인의 접근성을 위해 마련한 작품 묘사가 비시각장애인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 갈색 나무 책상 위에 작은 홈이 많이 파인 작은 검은색 현무암들이 있고, 그 뒤로는 책이 쌓여 있다. 주변에는 펜과 다양한 색의 동그란 스티커들이 있고, 귀에 닿는 부분이 도톰한 흰색 헤드폰 두 개가 보인다. 이는 《영인과 나비》 전시의 일부분으로, 흰색 무선 헤드셋을 착용하고 전시관 안을 걸으면 관람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그 앞에 있는 작품을 음성으로 묘사해 주었다. 전시 준비 과정에 대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오로민경 작가 홈페이지 바로가기 orominkyung.com/2019 Ⓒ안희제
작품 묘사와 비슷한 것이 배리어프리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되는 ‘화면해설’이다. 화면해설의 경우 ‘○○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와 같이 시각적 요소를 말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 묘사와 화면해설이 적용된 매체는 다르지만, 청각만으로 하는 경험이 시청각의 종합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에 가까워지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달리 말하면, 이는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번역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의 사례는 시각을 청각으로 번역하는 것이지만, 거꾸로도, 아예 다른 감각들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우리는 4D 영화관을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분위기나 공간을 후각, 촉각으로 번역하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감각 번역’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4D 영화와 음성해설, 화면해설의 결정적 차이는 번역의 역할이 보완이냐, 대체이냐에 있다. 4D 영화에서 시청각 이외의 감각, 배경음악이 삽입된 웹툰에서 청각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데, 음성해설과 화면해설은 시각을 대체한다. 이러한 역할의 차이는 감각의 사용 방식에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4D 영화나 웹툰처럼 기존에 주요하게 사용되는 감각을 다른 감각들로 보완하는 형식은 여전히 감각의 종합으로서의 작품 감상을 지향한다.
비장애인의 문화예술을 넘어
미술관에서 우리가 주로 접하는 것은 시각적 매체이고, 청각은 주로 시각과 함께 등장한다. 훨씬 청각 위주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음악도 점점 시각적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가 중요해지고 있다. 영화관이나 유튜브에서도 우리는 주로 시청각 매체를 접한다. 이처럼 비장애인의 문화는 감각의 종합이라는 틀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감각을 활용한다.
그러나 음성해설, 화면해설은 감각의 한계를 실험하게 된다. 현재의 화면해설 제작 지침은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는’ 안전한 방식이지만, 장벽 없는 문화예술을 상상할 때 우리가 부딪쳐야만 하는 지점이 바로 그 ‘안전함’일 것이다. 카메라의 앵글, 작은 사물의 배치,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우리는 다른 의미를 담곤 하기 때문이다.
이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옮겨야 하나? 작은 소음까지도 자막에 지문으로 다 넣어야 하나? 바닥에 떨어진 사탕 하나까지도 화면해설에 넣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와 ‘무엇이 결국 드러나는지’ 사이의 고민일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단계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감상의 주요 포인트가 되는 일들도 존재하니까. 이 모호한 간격들에서 해석의 여지를 분별해내는 것이 바로 감각 번역의 핵심일 테다.
이처럼 감각 번역은 문화예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각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감각을 통한 재현의 한계를 실험하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작품의 해석과 작가의 의도 사이의 간격까지도 질문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게 되고, 처음에 언급한 두 사례처럼 작품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효과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파편적으로 사용된 여러 감각을 종합하는 비장애인 문화예술에 가려져 있던 각 감각과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감각을 하나의 감각으로 모두 설명해내고자 할 때 우리는 아주 세부적인, 작은 요소들까지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잘 들리지 않는 속삭임을 자막으로 옮길 때, 똑같이 헷갈리게 하려면 자막의 투명도나 크기, 글씨체의 조정까지도 필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확장되는 건 단지 하나하나의 감각과 예술 형식만이 아니다. 작은 움직임이나 소리의 차이 등이 유의미하게 등장한다는 것은 목소리를 낼 때 음이 하나하나 분절되기보다 둥그렇게 이어지는 사람들,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있어서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사람들, 근육을 긴장시키기가 어려워서 손가락처럼 몸의 일부분만을 좁은 범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처럼 움직임이나 소리의 미세한 차이들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예술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계 자체도 확장될 수 있다.
감각 번역을 중심으로 논한 장벽 없는 문화예술은 기존의 감각과 예술 형식의 한계를 질문하고, 작품을 좀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측면에서 이미 그 자체로 교육적 효과 또한 지닌다. 나아가 접근성은 장애인이 예술의 주체로도 등장하기 수월해지도록 하기에 비장애인의 문화예술 너머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실천이다. 접근성을 ‘편의 지원’이 아닌 ‘감각 번역’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감각 번역을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예술을 위한 초석일 것이다.
컬러 사진. 책상에 앉아서 왼손으로 책을 펼치고 있는 안희제. 오른쪽 팔꿈치가 책상에 닿은 채로 흰색 펜을 든 오른손은 오른쪽 귀 근처에 올라가 있다. 무늬가 없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썼다. 검고 짧은 머리의 고개는 책상에 놓인 책을 향해 조금 숙이고 있다. 초점에서 벗어난 배경에는 벽돌과 시멘트, 창문으로 된 건물 일부와 화분들이 있다.
안희제
차별에 저항하는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의 칼럼니스트이자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난치의 상상력』과 『식물의 시간』을 썼고, [과학잡지 에피](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 등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 시민 배우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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