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SF소설 팬이 아니라면,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모를 것이라고 짐작한다. 더구나 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칠백오십만 년 고민 끝에 내놓은 삶과 우주에 대한 해답이 ‘42’라니. 스토리의 힘은 꽤 많은 상상을 자극하는 데 있다. 삶과 우주에 대한 해답이 고대 철학자 누군가가 내놓은 관념의 정수이거나, 개념으로 정의 내려져야 한다는 생각은 단지 편견이었나 싶다. 대체로 그런 해답은 논리적으로 설득되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진부하거나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허나 ‘42’라는 그 엉뚱+모호성은 생각을 환기하고 묘한 끌림을 발생시킨다. ‘프로젝트42 : Z플래닛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프로젝트42’)의 출발과 흡사하다.
새로운 오브제로 실험하기
비약적으로 사회의 시스템을 변화시킨 테크놀로지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른 언어체계를 만들어내고, 생산공정을 바꾸고, 초연결시대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커뮤니티의 기존 구성을 뒤집었으며, 예술의 재료와 도구를 흔들어 놓았다. 누군가는 산업으로 설명하고, 누군가는 계산식과 매트릭스를 보여주며 흐름으로 읽는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산업을 변화시켰든, 특이점을 향해가면서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대해 질문할 시기가 왔든지 간에 분명하게 가리키는 것이 있다. 최소한 다음 세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변화를 감지하고, 능동적으로 즐기고, 정보와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드림아트랩의 출발은 새로 등장한 언어와 정보, 생산수단의 전환, 예술과 기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한다. ‘프로젝트42’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드림아트랩 4.0의 일환으로 2020년에 시작한 애이비씨랩(ABC Lab)의 프로젝트다. 두 해를 지나오면서 무엇을 탐구하고, 누구를 만나려 했으며, 어떤 시도를 했는지 소개한다.
프로젝트42를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인터렉티브 미디어 퍼포먼스’라고 해야겠다. 공연예술에서 뉴미디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이젠 방송과 광고에도 등장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피지컬 컴퓨팅이 비보이의 공연에 등장해서 발광체가 된 퍼포머의 움직임을 묘사하기도 한다.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건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 라이브로 펼쳐지기 때문이며, 신기함과 화려함에 매료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알아채는 건 퍼포머 혼자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는 것. 그럼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프로젝트42는 공연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뉴미디어 도구가 어떻게 쓰이고, 인간의 몸과 움직임을 만났을 때 심미적 경험이 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한다. 즉, 자유롭게 몸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하는 퍼포머의 존재와 오브제로써 피지컬 컴퓨팅이 조화로운 균형감을 찾기 위해서 제어장치를 제작하고, 센서를 장착하고, 코딩하고, 소프트웨어를 통해 능동적으로 조작한다. 창작과정 안에서 몸의 인문학과 표현의 미학, 예술의 재료와 도구로써 미디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욕심이 과한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전 과정을 축소한 것으로 생각하면 해봄 직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대중예술이 추구하는 인기 혹은 대중성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진지한 접근이라면 더욱 그렇다.
미션과 창작 사이의 선택
청소년과 작업하기 위해서는 콘텐츠보다 시간 확보를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 사회 다수의 청소년은 자기 시간을 자기가 마음껏 쓰지 못한다. 공들여 그들에게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정보가 닿는다고 해도 우선순위의 결정권은 이미 청소년에게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참여자모집 이슈로 맞물린다. 꽤 오랜 기간 지속하면서 멤버십이 생기고 프로젝트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쌓여 있을 때 참여자를 안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궤도에 오른다. 어떤 의미로는 불특정다수의 청소년집단과 예술가 사이에 공적 신뢰 따위가 생겼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단체는 콘텐츠 자체로 관심도를 생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프로젝트42는 그 과제의 해결방안으로 공연을 선택했다. 영감을 주고, 감각을 깨우는 퍼포먼스로 청소년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팬데믹은 공연을 방해했다. 결국 공연이 아닌 공연영상이 되어 큰 아쉬움을 남긴다.
진행 과정에서 생긴 또 다른 과제는 워크숍 방식이었다.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은 시기에 온라인으로 의사소통하면서 몸을 이용하는 공연을 기획하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고려해야 할 것이 늘어나고, 피해야 하는 것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골라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최선은 결코 아니었지만 애이비씨랩은 키트를 선택했다. ‘42키트’는 지시사항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하고 변형하는 것을 권장한다. 42키트를 받은 참여자는 미션과 창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블럭장난감 같은 도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보면 블럭장난감으로 뭔가를 완성하려고도 하지만 이런저런 조합으로 새가 되었다가 비행기도 되었다가 하잖아요. 42키트도 목적을 가지고 키트를 완성형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놀다 보니 새로운 그래픽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움직임과 센서를 연결하면서 새로운 걸 만들기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팅커링이라고도 하죠.”
– 김서진 애이비씨랩 대표
‘팅커링(tinkering)’은 ‘서툴게 수선하다’라는 뜻이다. ‘하다 보니 뭔가 되더라?!’ 정도로 설명하면 너무 피상적일까? 팅커링은 메이커문화 또는 메이커교육에서 핵심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교육 기획에서 거의 절대다수의 커리큘럼이 무엇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정교한 설계를 요구한다. 그렇게 준비하고 손질하고, 처음에 구상한 것이 가급적 의도대로 나오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창작과정에서 도구를 손에 익히거나 배울 때는 정해진 규칙보다 최후에 훨씬 큰 효율과 배움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또는 도구사용의 자기 패턴이 생기는 순간까지의 자유로운 작업을 즐기게 둔다. 기술의 특징은 연마하여 얻게 되는 성질이 있다. 팅커링은 기술(본질 또는 원리) 연마의 과정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작업하면서 우연적 결합의 산물이 생기는 창의적인 행동으로 옮겨간다. 블록장난감은 그 자체로 예쁘고 궁금한 재료인 데다, 결합했을 때 의도가 무색할 만큼의 결과를 만나기도 한다.
  • 42 키트
  • 42 키트 제작
예술가로 만나기
프로젝트42에서 예술가와 기획자는 42키트를 매개로 청소년과 만난다. 이때 예술가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한다. 예술가는 키트를 가이드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툴(tool)을 가르쳐야 하는 임무도 부여받는다. 해야 할 역할이 많은데, 그중 가장 큰 역할은 역시 예술가로 사는 삶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프로젝트42를 시작할 때 좋은 레퍼런스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여준다. 이 퍼포먼스를 보고 참여자는 동기를 세팅한다.(이미 위에서 설명했지만 라이브는 어려워졌다) 예술가는 예술로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술가이기에 예술교육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예술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어떤 순간을 떠올리면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느끼는 에피소드의 집합이 있다. 예술교육에서 예술가의 작업이 노출되는 것을 기획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해 보인다.
“아이들이 창작단계에서 지식을 재조합하길 바랐어요. 하지만 익히는 시간만 해도 한참 걸리다 보니 아이들이 지식을 소화해서 창작과 연결하기에 벅찼던 게 보였어요. 그래서 키트를 더 구조화해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프로젝트42의 고민이 드러난다. 가이드가 분명했을 때의 문제도, 자유도를 높여 주었을 때의 문제도 아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식과 시간의 문제다. 준비한 도구와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분명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것이 청소년의 창작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반면, 도구사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기다리자면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딜레마는 예술교육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기도 하다. 42키트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대해 본다. 더 많은 작업 결과 등이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다양한 동기에 접속하고, 2차 3차 저작물이 나오기까지 작업이 연속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 3차시 수업
  • 7차시 수업
제약이 아닌 창의적 ‘언택트’
아마도 2020년과 2021년 현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비대면 교육에 대한 고민이 상당할 것이다. 비대면 교육이 반드시 온라인 영상으로 대면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영상 강좌와 화상회의 툴이 답처럼 등장하면서 생긴 혼란도 만만치 않다. 비대면 상황에서 각자 접속환경에 따른 의사소통 지연을 경험해야 하고,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교육은 온라인일 때 효율이 극대화되는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나 대부분 급히 온라인으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대면 교육프로그램을 그저 화상으로 옮겨오는 데 급급했던 건 아직도 아쉽다. 프로젝트42의 비대면 교육은 어땠을까.
“참여자마다 달랐어요. 혼자 해결한 사람도 있고,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모이기도 했어요. 스튜디오를 함께 빌리기도 했고, 자기 방에서 찍거나, 학교 공간을 빌려서 작업한 사람도 있었어요. 비대면으로 하고자 했는데 결국 1:1로 만나야 했죠. 그래서 비대면과 대면의 중간쯤? 참여자끼리 소통하고 연결하는 무언가를 발견했어요. 참여자가 서버에 접속해서 버튼을 누르면 무선으로 연결된 오브제로 예술교육자(안내자)가 움직임을 만들었는데, 이때 화면 속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면서 서로 너무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이 재미는 ‘세컨드 스테이지’라는 프로젝트로 바로 이어졌어요.”
오히려 온라인이어서 가능한 긴장과 이완의 순간은 우연히 찾아온다. 참여자들은 스스로 만남을 요청하는 적극성이 유발되기도 했다. 온라인에 접속했을 때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은 장비와 오브제의 원격 컨트롤링은 오히려 프로젝트 자체의 흥미를 촉발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그리고 세컨드 스테이지는 기존 프로젝트의 형식 자체가 완전히 언택트로 전환되어야 하는 실험으로 움직이고 있다.
‘만약’이란 표현은 상상력에 초점을 둔다.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사건이나 그에 따른 가정을 표현할 때 주로 쓴다. 만약 인류가 쓸모있는 일만 해왔다면 우리는 문명을 만들 수 있었을까? 만약 생산에 매진하고 논리적으로 사회와 공동체를 정의했다면 인류는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상념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스친다. 프로젝트42를 소개하면서 또 하나의 ‘만약’을 생각한다. 만약 예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생물학적 분류 이외에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깊은 생각’에게 묻고 싶다.
김탕
김탕
사진찍고/드로잉하고/잡지 만들고/전시기획하면서 삽니다.
페이퍼컴퍼니어반_큐레이터
서울예술교육센터 A14s_디렉터
유스보이스_수퍼바이저
순환랩_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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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_ 박영균 영상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 _ 애이비씨랩 https://www.facebook.com/ABCLAB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