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적으로 난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어려서부터 난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옷차림, 말투, 걸음걸이, 사소한 습관, 표정, 더 나아가 ‘저 사람은 지금 어디를 가는 것일까? 집에서 나오기 전에 무엇을 했을까?’ 등 별 쓸데없는 상상을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보며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에게 관찰된 누군가는 내 상상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했다. 그 버릇이 지금도 남아서 지나가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맥없이 말 걸기’는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 물론, 시대가 변해서 모르는 아저씨가 걸어오는 대화에 동네 아이들 절반은 전문용어로 ‘쌩까기’ 일쑤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말 걸기는 사람에 대한 관찰과 관심의 오랜 습관이라 여기며 그냥 산다.
예술로 말 걸기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문화예술교육은 나에게 합법적인(?) 관찰과 탐색의 기회를 주었고, 그 경험은 매우 흥미롭고 즐거웠다. 아동, 청소년을 주로 만났으며 그 외에도 가족, 노인, 신중년 등 다양한 세대를 만나 ‘예술로 말 걸기’를 시도했다.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은 소위 ‘잘 먹혔고’ 현장에서 반응이 좋았으며 한때는 우수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즐거움과 자부심에 취해 꽤 오랜 시간을 승승장구했다. 새로운 예술교육 방법을 찾기 위해 타 장르를 활용하기도 하고 방법과 장치를 개발하기도 하고 전문가를 찾아가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남들과 차별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순서가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에 지나치게 힘을 싣다 보니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누구에게나 잘 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 문제였다.
2020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새롭게 기획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가족여가 프로그램 〈유연한 함께 살기〉는 나의 자만심을 무너뜨린 계기가 되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변화해 가는 다양한 가족을 형태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는 점에서 흥미로운 주제였다. 또한, 대상자 분석을 위한 사전현장 연구를 미션으로 제시한 점도 신선했다. 그동안 한 번도 구체적으로 시도해 보지 않았던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전연구를 통해 우리가 기획할 프로그램의 내용과 의미를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조손 가족’이라는 대상을 가족의 한 형태로 설정하고 아동의 육아를 담당하는 할머니와 손자녀의 관계성에 집중하면서 사전연구를 진행하였다. 현장의 전문가들을 만나 대상에 대한 특징과 현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실제 대상자들의 집을 방문하여 인터뷰하면서 손자녀 세대가 어떻게 소통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양육의 주체로서 할머니들의 현실적인 고민도 ‘날 것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대상에 관한 사전연구는 내 인식의 틀을 깨트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손 가족이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필요할 것으로 판단한 프로그램이면 무엇을 하든 다 좋아하지 않을까. 이전에는 이러한 복지와 혜택의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연구를 진행하면서 조손 가족이라는 특수한 가족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위해 우리 스스로 어떤 이슈를 발견하고 의미부여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결핍을 발견하고 채워주기가 아니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하고 소통하게 하는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프로그램은 수정, 변환되었고 당사자성에 집중한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문화예술교육은 참여자, 즉 대상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참여자의 이야기와 삶에 집중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프로그램이어야 의미가 있다. ‘이런 프로그램이 좋을 거야!’라는 막연한 공급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들어가(入場) 그들의 이야기(立場)를 듣고 나누다 보면 새롭게 보이고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이해는 결국 삶의 구체성에서 나온다. 예술강사와 기획자가 자신의 삶에서 단 한 번도 대상(아동, 청소년, 어르신 등)과 직접 만나 소통한 경험 없이, 다시 말해 예술가의 개인적 경험과 인식의 틀이 부족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위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꿈다락과 지역특성화 사업을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참여 대상에 대한 사전 인터뷰나 연구를 해 봤다는 기획자와 예술가를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같은 초등학생이라 해도 저학년과 고학년의 차이가 존재하고 가족을 대상으로 할 때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성격이 존재할 것인데 우린 그냥 뭉뚱그려서 대상을 쉽게 정한다.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언어를 쓰며,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전연구를 위한 당사자 인터뷰나 문헌연구도 좋다. 본 프로그램에 앞서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획한 프로그램의 효과성을 분석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눌 것이냐?”에 방점이 찍었으면 한다.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내가 곧 만나게 될 ‘한 사람’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자(대상)가 아닌 ‘사람(마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가 올 것인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뉴노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코로나 이전의 우리 삶이 모두를 일정한 틀에 맞추는 획일화와 일반화가 주를 이루었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개별적 서사를 가진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비대면 언택트를 강조하는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좋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번 기회에 일반화, 대상화의 오류를 반성하고 현장에서 나와 만날 그 ‘사람’에 관해 공부하자. 아니, 사랑하자.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과학’이라고. ‘그럴 거야’라고 막연히 느끼는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 관심의 영역에서 당사자성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소중하고 특별한 이야기꽃이 활짝 피게 될 것이라 믿는다.
조은아
김혜일
문화공동체 아우름 대표.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신(神)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문화기획자가 되었다. 아카펠라를 매개로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했고 지난 10년 동안 어린이, 청소년, 가족 등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해 오고 있다. 신안군 도초라는 섬에서 운영되는 생애전환 삶 프로젝트 ‘섬마을 인생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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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