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답답하지 않아? 어딜 가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너무 불편할 것 같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지역에서만 살고 있기에 듣는 질문이다. 실제로 걷다 보면 지인을 마주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아침에 집에서 봤던 가족을 낮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건널목에 서 있으면 신호대기 중이던 차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주는 풍경도 일상. 다정하게 바라보며 따스운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내게 춘천은 아주 잘 만들어진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 화양연화 <팝음악 이야기와 팝송영어 배우기>
  • 녹색시간 <녹색시간 그린커뮤니티>
내 기억 속 라떼는 말이야
9년 전 문화예술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술자리에서 늘 듣던 선배들의 ‘라떼는’ 이야기가 있다. 70~80년대에 춘천 명동에는 음악다방이 성황을 이뤘고 음악에 대한 해박함과 인문학적 사유로 무장된 당대의 멋쟁이들이 그 공간에서 삶을 나누며 함께 살아갔다고 했다. 특히 1983년에 문을 연 클래식다방 ‘바라’는 춘천 문화판에서 논다는(?) 사람들이 죄다 출근 도장을 찍었던 곳이었다. 동이 틀 때까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문화, 예술, 정치를 논했다. (이 중에는 소설가 이외수, 마임이스트 유진규, 한국화가 우안 최영식, 다큐멘터리 감독 故 이성규 등이 있었다) 바라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다방이 아니었다. 시를 썼던 주인장 주위로 문학인, 미술인, 음악인, 배우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교감하는 아지트였다. 그 시절, 다방에만 가지 않았어도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선배도 있고, 다방에서 만난 인연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선배도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수많은 다방 중 하나였을지 모르는 바라는 춘천 문화공간의 시초였을 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과 연대하는 힘, 여기에 공간이 뒷받침되어 춘천만의 문화 신(scene)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춘천마임축제가 30년 넘게 이어오며 수년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최우수 문화관광축제로 평가되고 있고, 1세대 문화기획자 강준혁 선생이 만든 춘천인형극제의 성과로 춘천은 1995년 문화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지금까지 많은 예술가와 기획자가 이끄는 다양한 활동들은 어쩌면, 공간과 커뮤니티가 가지는 힘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 안하무인
    <조화로운 삶 in 춘천> 
  • 소금북출판사
    <문화와 예술, 생활로서 시를 소비하고 즐기기>
Wie geht’s dir? (비 겟츠 디어?)
관계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나는 작은 규모의 문화공간 또는 1인 상업공간에 들러 괜스레 말을 붙여보는 게 취미이다. 어색함을 즐기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춘천에 대한 정보, 취향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이 설레고 소중한 첫 만남은 사람이나 사업을 연결하기도 하고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되는 등 재밌는 지점으로 이어진다. 올해엔 코로나19로 여기저기 다닐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탐구하며 보내던 중, ‘도시가 살롱’이라는 공간 기반의 모임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필수가 된 지금, 내 생활권 안에서 최소한의 만남이라니! 주인장 취향에 따라 개성 넘치는 25개의 모임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시기적절한(!) 프로젝트가 아닌가.
해가 저무는 교동의 한 골목가에서 ‘안하무인’을 찾았다. 5평 정도의 작은 공간으로 ‘편안한 강, 인적이 드문’이라는 뜻을 가진 안하무인은 예약을 통해 공간을 대관하는 프라이빗 티룸이다. 각자의 앞에는 헬런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이 놓여 있었고 실내는 무척 고요했다. 지구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 가까워진 만큼, 이 책을 읽으며 춘천에서 천천히 살아가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하고 실천해보는 시간을 갖는단다. 진지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어 구옥을 알아보러 다닌다는 이야기, 시내에서 농촌으로 이사 가고 나서 새가 많이 울면 근처에 뱀이 왔다는 걸 알게 됐다는 이야기, 선조들은 생명체를 죽이지 않으려고 짚신을 굉장히 성기게 엮어 신었다는 이야기. 또 다른 누구는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고,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독일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영어 ‘How are you?’에 해당하는 “Wie geht’s dir?”를 독일인 이웃들에게 매일 들으며 처음엔 별생각 없이 ‘좋아, 괜찮아, 행복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다 저 물음이 ‘요즘 너 어때? 너 몸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라고도 쓰이는 걸 보고, 내 몸은 어떤지 내 상태는 어떤지 들여다보게 되면서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가 즐거운 것이야말로 모든 일의 시작이라며 모두 끄덕거렸다.
다른 날 찾은 ‘소금북출판사’는 아동도서와 시집, 소설집을 주로 발간하는 1인 출판사로 주인장은 8년 전 춘천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그때부터 지역 시인들과 종종 만남을 가져왔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시’를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으로 꺼내오는 방법을 이번 ‘도시가 살롱’에서 탐구해 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사무실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벽에는 책 발간 소식이 담긴 신문기사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60~70대의 시인 다섯 분이 아주 진지하고 구체적인 방법들을 논하고 있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우리가 현재 만나고 있는 최소한의 단위인 가족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좋은 삼행시나 동시부터. 시 바구니나 시 메달이라는 걸 만들어보자며 직접 만들어 온 시 메달을 보여주었다. 가운데에 글귀를 적고 테두리에는 사탕을 엮어 아이들의 관심을 끌어보자는 유쾌한 아이디어였다. 어릴 때부터 예술과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어 줘야 하고, 우리 모임이 그 문화를 만드는 데 한몫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날은 추석 직전이었기에 오늘 공유한 내용을 각자 실천해보고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걸 숙제로 안고 헤어졌다.
이밖에도 다녀온 여러 ‘도시가 살롱’은 모임 하나하나, 사람 한 명 한 명 진한 여운을 주었다. 마스크에 가려져 온전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눈빛에서 즐거운 표정이 보였고, 이야기를 놓칠세라 모임 시간을 훌쩍 넘어 끝나기도 했다. 도시가 다정하게 복작이고 있었다.
  • 마음스쿨 <게임 한 판 어때>
  • 재미야 < Rethink project@chuncheon>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올 하반기 춘천의 이슈 중 하나는 단연코 춘천문화재단의 ‘도시가 살롱’이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커뮤니티 지원사업에 늘 붙는 ‘지역사회를 위한’ ‘지역사회에 이로운’이라는 수식어는 없었다. 개인이 즐거우면 그 즐거움이 도시에 퍼져 결국 지역사회에도 이로움이 스며들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커뮤니티 지원사업에는 새로운 고민이 따른다. 깊은 관계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혼자가 아닌 느낌을 주는 것. 사회적 피로감에 가득 찬 요즘, 꼭 생산적인 시간이 아니더라도 내 취향에 맞는 공간에서 멍 때리며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무엇보다 안전하게 만나는 것.
춘천문화재단은 공간의 힘, 커뮤니티의 힘을 믿고 캐쥬얼한 이 모임들이 도시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여름이 시작하기 전부터 다양한 공간 운영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틀을 잡았다. 사업이 진행될 때에도 주인장들을 수시로 만났고 피드백을 받아 다음 시즌 공모에 반영하기도 했다. ‘도시가 살롱’은 참여자뿐만 아니라 주인장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적은 금액으로 해보고 싶었던 실험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공간을 열게 된 이후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 86세 어르신을 이야기 강연자로 모시면서 감동 받았던 이야기, 주인장의 역할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너무 아무것도 안 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참여자들의 합이 잘 맞았던 이야기들. 모임에서 주고받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서로에 대한 관심이고 마음이고 대화였다. 대부분의 주인장이 이후 지원 없이도 모임을 이어나가고 싶은 의지를 내비쳤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도시가 살롱’ 담당자가 슬쩍 말해준 사업의 성과 중 하나는 주인장들이었다. 사업에 의한 사업이 아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앞에서 반짝이는 그들을 보며 앞으로 더 재미난 것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아침 9시에 진행된 주인장 모임
내년에도 ‘도시가 살롱’은 이어진다. 춘천의 수많은 매력적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살롱과 함께 도시문화 커뮤니티 지원사업 ‘히치하이커’와 연계하여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운영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주인장의 취향에 따라 모였지만, 그 모임 안에서 참가자들이 역으로 제안하는 것이 생기면서 이 또한 놓치지 않으려고 고민 중이다. 덕분에 오로지 내 취향대로, 내 마음대로 발길 가는 가을을 보내고 있다.
한혜진
한혜진
20대의 절반을 춘천문화재단에서 지지고 볶았다. 정책기획팀의 팀장 1명, 팀원 1명으로 시작해 문화재단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업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이후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지역재생 사업을 맡아 폐광지역을 누볐고, 춘천 약사동에서 예술가&기획자들과 ‘터무니맹글’이란 이름으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했다. 현재 춘천문화매거진 [POT(팟)]과 무빙매거진 [탈서울]을 만들고 있다. 술 한 잔 마시지 못해도 1년 중 350일을 술자리에서 보내는 타입인데 요즘은 힘들어서 일찍 자는 편. 호기심 많은 편. 프리랜서 문화기획자를 가장한 반백수.
ccmnhhj@gmail.com
사진제공_필자, 춘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