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u’lveda, 1949~2020)의 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을 다시 읽는다. 적도 부근 아마존 땅, 엘 이딜리오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치과의사인 루비쿤도 로아차민이 건네주는 연애 소설을 자신의 오두막에서 고독을 즐기며 읽는다는 기본 플롯의 소설이다.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 아는 노인이 연애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저작(詛嚼)하듯 즐기며 읽는 모습이 재미있다. 예를 들어 노인은 “그런데 키스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뜨겁게’ 할 수 있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두 남녀가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연애 소설에 심취한다.
그런데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제목처럼 마냥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뚱보 ‘읍장’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발전’과 ‘성장’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며 등장하는 백인 노다지꾼, 밀림 개발꾼, 원전회사들과 더불어 아마존 밀림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내용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들은 아마존 밀림이 주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의 매력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전혀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을 잃어버린 탓일까. 그들은 살쾡이·꼬리긴원숭이·금강앵무새메기·보아뱀 같은 아마존 유역에 사는 온갖 동식물들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아마존 밀림은 ‘푸른 지옥의 세계’일 뿐이다.
‘혼맹’이 되어버린 근대 문명인들 고발
루이스 세풀베다는 작중 노인의 행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생(共生) 관계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어버린 근대의 파괴적인 시간을 고발한다. 나는 아마존 밀림을 둥지 삼아 사는 수아르족 인디오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포스트휴먼(post-human)’의 감수성을 역설하는 대목이야말로 아마존을 위한 위대한 서사시와 같다고 생각한다. 수아르족은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라는 원리를 철저히 따르며 아마존에서 산다. 젊은 시절 노인 또한 이들과 생활하며 ‘인디오-되기’의 과정을 몸으로 학습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이 백인 개발업자를 물어 죽인 암살쾡이를 결국 총으로 쏘아죽인 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부끄러움과 회한의 눈물이라는 점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으리라. 소설 속 노인의 사고와 행동에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이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다른 자기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한 근대 문명인들의 유아적 고립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제시한 ‘혼맹(魂盲, Soul Blindness)’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 근대인들은 자연(=대지)에서 우리 모두가 존재의 사슬을 이룬다는 점을 철저히 망각한 헛똑똑이 ‘까막눈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인이 오직 연애 소설에 탐닉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연애 소설이야말로 이따금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세풀베다가 아마존 밀림을 지키다 무장 괴한들에게 불의의 죽임을 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Chico Mendes, 1944~1988)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애석한 것은 피노체트 군부가 일으킨 1973년 9·11 사태 이후 망명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세풀베다가 지난 4월 스페인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희생자가 된 것이다. 2005년 방한 당시 『소외』『핫라인』 같은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을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하며 지구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상상력의 국제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던 장면은 내 인생의 문학 수업이었다고 자부한다. 피노체트 독재 경험에 맞선 자의 실존적 ‘소외’와 더불어, 독재 이후 칠레 사회에 일상화된 ‘사회악’을 고발했던 루이스 세풀베다의 문제의식은 최근 번역 출간된 소설 『역사의 끝까지』(2016/2020)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앎은 앓음’이다
문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이 그 누구도 종료 시점을 자신할 수 없는 ‘위드(with) 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 이른 코로나19 확진자가 7월 1일 기준으로 1천만 명을 돌파했고, 사망자는 무려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인들은, 아니 한반도 주민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리베카 솔닛이 처음 언급한 외상 후 성장이란 트라우마적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예전보다 더 나은 쪽으로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코로나 블루처럼 정신적 외상은 분명 실재하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지난 6월 25일 생태 사상가 김종철 선생(1947~2020)의 죽음은 못내 비통하다. 1991년 [녹색평론] 창간 이후 30년 동안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파괴 같은 ‘자연의 역습’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앓으며 온몸으로 걱정했던 선생은 말과 글을 통해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지향하는 사이비 휴머니즘 따위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공생공락(共生共樂)하는 좋은 사회를 향한 철저한 민주주의자로서, 생태 사상의 독전관(督戰官)으로서, 지난 30년 동안 ‘발전’과 ‘성장’ 담론 같은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특히 『녹색평론』 173호(2020년 7~8월호)에 실린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의 행간을 더듬으며, 이른바 근대인들의 ‘언어’에 대한 비판에서 선생의 예리한 문제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선생은 말한다. ‘혼(魂)의 구제’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근대 문명인들의 언어는 흙과 함께 살아온 백성들의 정신세계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나간 데에서 비롯한다고.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라는 말이 ‘겸손’을 뜻하는 ‘휴밀리티(Humility)’와 어원이 같다는 점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소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인들은 흙에서 한사코 멀어짐으로써 겸손의 미덕과 자연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나와 우리 일신의 안락(安樂)을 위한 전체주의를 용인한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으리라. 선생이 철학자 이반 일리치를 비롯해 영국 시인 블레이크,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우리나라 시인 백석 그리고 미국 작가 웬델 베리와 리 호이나키를 깊이 사랑한 이유를 헤아려보아야 마땅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눈빛으로 ‘근대의 어둠’을 깊이 응시하며, ‘현재는 과거의 미래’(이반 일리치)라는 점을 투시한 작가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코로나19 시대, 예술 혹은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루이스 세풀베다와 김종철의 삶과 문학을 더듬으며 ‘앎은 앓음이다’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예술(교육) 활동이 과연 누구의 편에서 일하느냐를 성찰하며, 담대한 사유와 급진적인(radical)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종철 선생이 어느 후배 시인에게 남긴 말은 ‘탐욕’이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우리 자신이 ‘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어.”
두 사람의 문학(=예술)과 사상을 디딤돌로 딛고 징검다리로 활용해 지금 여기에 실현 가능한 ‘언더그라운드’ 유토피아를 세우는 데 예술(교육)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유토피아는 분명 경쟁과 희소성 모델에 근거한 서바이벌 사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서바이벌 사회가 아니라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지탱 가능한’ 공생공락의 사회여야 한다. ‘교만의 기술’(그레고리 베이트슨)을 넘어,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려는 시인(=예술가)의 마음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나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담대한 실천이 요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기후야 그만 변해, 나부터 변할게’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일상적으로 작은 실천을 하는 예술(교육)적 과정이 필요하다. 세풀베다, 김종철, 위대한 작가이고 사상가였던 두 분의 죽음을 두 손 모아 애도한다.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춘천문화재단 [POT] 편집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