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최근 20년 이래로는 태곳적부터 있어왔던 것이 아니다.”
– 폴 발레리 「편재성의 정복」 중
기술 기계의 발전은 예술을 포함한 인간 사회의 전 영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소품 「편재성의 정복」(1928)*은 20세기 초 기술 문명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시기에 살던 한 지식인의 예감을 담고 있다. 인간은 기술 발전을 통해서 마침내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고 이로써 예술의 형식과 용도 또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물, 가스, 전류가 멀리서부터 우리 집으로 와서 별 어려움 없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듯이, 미세한 제스처만으로도, 아니 신호 하나만으로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들을 우리는 제공받을 것이다.”

폴 발레리가 받은 철도의 충격과 영감을 잘 담은 판화 작품
<Impressions et Compressions de Voyage>(1853),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애초에 발레리에게 이런 충격과 영감을 제공한 것은 수도 배관이나 전기 배선이 아니라 철도였다. 1843년 파리-오를레앙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된 이후 유럽인들은 시공간 의식의 대혼돈을 겪어야만 했다. 출발점과 목표점 사이의 공간을 삭제함으로써 시간을 조작하는 이 축지법(the magic art of shortening space)은 오래지 않아 시공간을 익숙하게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내 ‘편재성의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편재성(ubiquitas)은 전지성(omniscientia), 전능성(omnipotentia)과 함께 신의 본성을 가리키는 전형적 개념이다. 따라서 편재성의 정복은 기술 발전의 주도적인 현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라고 하는 절대자의 본질에 도전하는 일이다. 태초에 물질과 시공간은 신의 피조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20년 이래로는 태곳적부터 있어왔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개조한 것이며 조만간 정복할 것이다. 기술 문명의 최종 목적지는 신성함(divinitas)이다.
  • 『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 책세상, 2013)
  •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김재인, 동아시아, 2017)
창조성을 사회화하라!
편재성의 정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기술과 문명』(1934)에서 기계 현상이 19세기 증기기관과 함께 시작하여 20세기 산업화 및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급격하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막연한 추측을 철저히 깨부순다. 이 원정길은 10세기 어느 수도원에서 ‘엄격한 일과’를 지켜나가기 위해 발명된 (물시계나 해시계가 아닌 기계식) 시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후 시계는 각 도시로 보급되면서 유럽인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시계에 의해 지배되는 시간은 인간의 경험이 축적되고 이어지는 지속의 형식이 아니라 시간, 분, 초 단위로 잘려나가는 분절의 형식이다. 혁명기 이후로는 부르주아들이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해 기계 산업을 추구했으며 이는 그들의 심미안에도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과 같은 엔지니어가 참된 예술가로 대우받았고 20세기에는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등과 함께 ‘기계 미학’이 탄생한다. 기계는 참된 것, 좋은 것,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즉 신이다.
무질서와 변화의 세계 속에서 규칙성과 질서와 확실성을 찾고자 했던 서구의 합리주의자들은 기계 속에서 이상이 실현되는 성취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기계의 질적, 문화적, 미적 성취들을 도외한 채 실용성만을 추구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을 핑계로 기술을 점차 윤리의 영역에서 빼내더니, 기계의 힘을 편협한 자기애의 유지 수단으로 사용했다. 마침내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 이르렀지만 기술과 기계는 오히려 소비 충동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와 조응하면서 수익의 편재성을 정복하려는 경제적 살인기계로 진화한다.
멈퍼드는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식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전 세기 과오는 기계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기술 발전의 가속도를 인간이 제어하지 못해서 일어난 오류일 뿐이다. “미래의 강조점은 속도와 근시안적 쓸모가 아닌 철저함, 상호 연관성, 통합이다.” 오히려 그는 기계가 지금보다 더 유기적인 방식으로 접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 미메시스(mimesis, 모방 또는 재현)의 대상인 인간과 더 닮아야 하고 그래서 더 세련된 유기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유효했다. 휴먼 테크놀로지, 인공지능, 인류세와 포스트 휴먼 …….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듣는 이 용어들은 기계와 인간이 모두 생리학에 기초한 기술적 협력과 조정을 거치며 기계는 더욱 인간적으로, 인간은 더욱 기계적으로 공진화한 결과들이다.
속도 제어를 위한 방안이 다소 의외이다. “창조성을 사회화하라!” 현대인은 제한된 물질세계 안에서 더 빨리 더 많이 확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문화예술 영역의 창조성과 이로부터 증진되는 다양성은 이러한 강박적 소비 충동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기술 문명에 대한 교조적 신앙까지 느슨하게 한다. 수익 체감의 법칙에 사로잡혀 투자와 이익의 황금비율에만 골몰하는 우리의 정신은 오직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해방된다. 그러나 개개인의 창조적 삶은 결국 사회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창조를 사회화할 수밖에 없다.
“모든 건전한 경제적 활동의 본질적 임무는 창조가 모든 경험에서 일반적 사실이 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 창조를 사회화하지 않고 교육에 알맞은 생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생산의 기계화된 시스템은 단지 빵과 서커스에 만족하는 굴종적 비잔틴 형식주의로 굳어버릴 것이다.”
– 루이스 멈퍼드 『기술과 문명』 중
변화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한 노력
만일 멈퍼드가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ubiquitous)가 상용화되고 있는 지금 시대를 살고 있다면, ‘창조의 사회화’를 위해 어떤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을까? 인공지능이 사회 기계의 작동 방식을 극적으로 바꾸어놓게 되리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슬로건을 통해서 충분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에서 이런 변화에 사회적 제어가 필요하지만 법이나 도덕으로는 불가능하다며, 대안으로 ‘자유로운 실험’이 보장된 창조성 학습을 제시한다. 문제는 이 또한 (멈퍼드가 주장한 것처럼) 사회적 조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실험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 …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개인들의 정치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중
그렇다면 ‘자유로운 실험’이란 무엇일까? 김재인은 인간을 ‘틀 밖’으로 자꾸 나가도록 돕는 활동들, 예컨대 예술, 철학, 수학, 과학 같은 것을 나열한 뒤 이중에서도 특히 예술을 전형으로 삼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사와 실험을 감행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는 없는 현실적 문제는 십분 인정되지만, 자기 주도적인 창작 활동이 모든 학습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에는 양보가 없다. “성장하는 거죠. 보정이 일어나는 거고요. 학습과 교육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기회를 주고 넉넉하게 시간을 주자는 겁니다.”
인류는 약 1천 년간 ‘편재성의 정복’을 꿈꾸며 기술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이런 제국주의적 정복 전쟁에 몰입한 결과, 기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잃은 채 실용성에만 치우치게 되었고 마침내 크나큰 파국을 맞이했다. 발레리나 멈퍼드가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대량 생산-대량 소비가 돌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스템은 머지않아 지구환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터이다. 이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비의 차원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다양성의 세계는 예술가의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확보된다. 개인의 창조적 행위는 창조적 사회 안에서만 증진되며 다시 창조적인 사회는 개인의 정치적 행위에 기대어 있다. 한 세기를 사이에 둔 두 저자가 바로 이 점에서 입을 모은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편재성과 창조성 사이에서 어떤 강요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편재성의 정복에 참전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성 확보에 동참할 것인가? 어차피 양자는 신성함에 대한 도전이고 택일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리 머지않은 미래만 생각해 보더라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쩌면 이 정해진 답이 우리 사회에 예술이, 아니 예술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 Paul Valéry, “La Conquête de L’ubiquité”, in Œuvres, tome II, Pièces sur l’art, Gallimard, 1960, pp. 1283~1287. 발터 벤야민 덕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소품은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 99쪽과 102쪽을 참조할 것.
이미지 제공 _ 책세상, 동아시아
양진호
양진호
철학자. 시민 인문학 교육을 기획 및 실행하는 인문학교육연구소(www.paideia.re.kr)의 소장이다. 대안학교와 대학에 출강하면서 칼럼을 쓴다. 데카르트의 『성찰』, 츠바이크/프로이트의 『프로이트를 위하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zino.y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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