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수필
감히 말하건대, 유기농법은 풀과의 전쟁이고, 기숙형 대안학교는 라면과의 전투다. 아이들이 생활관 규칙을 새로 개정해 나가던 2019년 어느 틈새에 야식 규정이 느슨해진 때가 있었다. 매일 밤 11시 생활관 건물 전체는 라면 스프 냄새가 진동했다. 일부 아이들과 교사회 전체는 ‘이건 아니지 않냐’는 정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103명의 학생과 스무 명 넘는 교사가 한자리에 모인 ‘가족회의.’ 나는 강당 무대에 걸터앉아 아래와 같은 대목 한 구절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걸 알면서도 라면을 먹으면서 김밥을 또 주문하니. 슬프다, 시장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중략)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 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 모두가 참여하여 자기 몫의 발언 기회를 가지는 직접 민주주의.
    이러한 모임이 종종 예술 관련 활동의 주요 발표 마당으로 변화한다.
두 쪽 분량의 글을 읽어주고 나서 잠시 좌중을 둘러봤다. 짧은 침묵 가운데 아이들 눈망울에 무엇인가 스쳐 지나는 느낌들을 직감했다. 나는 모른다. 아이들이 밤에 라면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를. 배가 고파서인지, 라면에 인이 박혀서인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음식을 나누며 느끼고 싶은 우정어린 친밀감 때문인지, 규칙을 애교 있게 깨뜨려가는 ‘현행범’으로서의 쾌감을 누리려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언급했다. 라면을 먹고 싶은 욕망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자. 김훈 작가의 글을 음미하자. 나는 지금까지 2천 그릇 정도의 라면을 먹어온 것 같은데, 단 한 번도 이 작품의 필자처럼 깊이 있는 사유를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글이란 참 신비하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입장해 본 적 없는 세계로 우리를 유혹한다. 글을 읽는 순간 나를 각성시키는 무엇인가가 내 정신세계로 스며들고, 그렇게 변화한 정신으로 나는 새로운 글을 쓴다. “너희들도 그러고 싶지 않니?”
까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가족회의 이후 생활관에서 야식으로 라면 먹는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얼마 후 학생회가 주도한 새로운 음식 규칙 개정안이 몇 차례의 토론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먹거리 규칙이 통과되었다.
삶과 교육 속에 침윤되어 있는 예술
학교에서 예술교육은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음악, 서예, 무용과 같이 수업 시간에 이뤄지는 교과로서의 예술이 그 하나다. 우리 학교에서는 두 번째가 더 중요하다. 동아리를 중심으로 아이들끼리 활동을 하며 서로 기예를 익히는 방식이 있다. 문화의 밤이나 가을축제를 기획, 준비, 진행하는 더 폭넓은 활동도 포함된다. 작업장에서 생활용품을 디자인하거나 도예작품을 만드는 활동이 있다. 이른바 교육에서의 예술(arts in education)이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음악은 정신의 생명줄이고, 댄스는 자신에 대한 존재 증명과 같다. 친구들과 머무는 공간에서는 어디에나 음악과 춤이 끼어든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해서 바라보면 삶 속에서의 예술(arts in life)이다.
학교에서 예술은 표현 양식이라기보다 존재의 형식으로 더 깊어져야 한다. 우리는 동공에 맺힌 사물을 물리적으로 인식하지만 않는다. 우리 인식의 바깥 세계가 지닌 물성을 뛰어넘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이 나와 어떤 상관성을 맺고 있는가를 상상한다. 물성에서 상상으로 건너가는 가교에 예술이 자리 잡고 있다 믿는다. 교육은 기능을 갖춘 사람을 빚어내는 것을 넘어서 ‘어떤 사람이 됨’을 지향한다. IT 기술을 갖춘 기능인을 훈련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탁월한 시민이 되도록’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예술의 힘은 사람의 ‘됨’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가능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그 힘은 예술을 다루는 과정에서 발생하기보다 예술로 둘러싸인 삶 한가운데로 빠져드는(浸潤:침윤) 데에서 솟아난다고 본다.
  • 5월 대동제 전야제.
    트럭 두 대와 허름한 조명 몇 개만 갖춰도 이들 아마추어 록밴드들에겐 충분한 무대가 된다.
시간, 교감 작용, 그리고 경험
존 듀이는 경험이 가진 교육적 의미를 밝힌 진보적 교육철학자였다. 인간의 경험 안에는 호기심 어린 충동과 관심이 담겨 있고, 그것을 충족시켜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지성과 만난다 했다. 그것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반성적 사유’(reflective thinking)가 일어난다. 즉, 경험 안에 사유가 풍부해야 ‘하나의 완전한 경험’이 완성된다. 존 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그 완전한 경험이 곧 예술 창작과 향유 가운데서 발현될 수 있음을 조명했다.
예술교육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지닌 가장 큰 맹점은 시간의 부족이다. 예술은 자유로움과 시간을 먹고 자라는 생명의 나무이다. 교육사회학자 마이클 애플 교수는 “학교 시간표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온갖 지식이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정치 투쟁의 장”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교육성과에 대해 가장 큰 걱정을 하는 주체를 흔히 학부모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숨은 주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국가이다. 수학, 과학, IT가 생존을 위한 금싸라기 과목이다. 국가는 경쟁력 불안 때문에 학생들이 ‘예술 놀이나 하면서 노닥거릴 틈’을 줄 수 없다. 근시안적 관점이다.
미래사회의 역량은 특정 교과목이 지닌 교수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를 보라. 미래사회가 요청하는 인재상 10가지 가운데 복합 문제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능력, 창의력, 감성능력, 협상능력, 인지적 유연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역량을 어떤 특정 ‘과목’에서 키울 것인가? 차라리 그것은 ‘방법적 기술’ 대신 ‘됨’의 영역에 속한다. 예술교육과 교육에서의 예술에 눈을 돌려야 한다. 아이들을 믿고, 그들에게 시간을 허락하고, 무엇인가 만들어 낼 때까지 숙성할 기회를 주자. 예술교육 분야에서 대안교육이 기여한 바 있다면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 것이리라.
  • 2019년 제천간디학교 이담 학생(중3)이 직접 그려서 만든 수첩 ‘담이어리’의 표지와 속지.
    충분한 시간은 아이들의 잠재력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낸다.
사진 _ 필자 제공
이병곤
이병곤
제천간디학교 교장, 건신대학원대학교 대안교육학과 겸임교수. 광명시평생학습원 원장을 지냈고, 경기도교육연구원에서도 일했다. 교육철학, 예술교육, 대안교육에 관심을 두고 글쓰기와 교육현장에서의 실천 활동을 이어왔다. 『위기의 학교』 『희망의 인문학』 『넘나들며 배우기』를 우리말로 옮겼다.
jazznut.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