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해서 9월까지 기초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이하 ‘기초센터’)를 주제로 총 5회의 권역별 라운드테이블이 운영됐다. 정식 명칭은 ‘광역-기초 문화예술교육체계 구축을 위한 릴레이 포럼’이다. 기초문화재단, 문화기반시설, 평생교육시설, 문화예술교육 단체 및 관계자, 지역주민들까지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참석한 이 자리는 참여자 간 서열이 없었고 또 정해진 규칙도 없었기 때문에 매번 참석할 때마다 논의가 진행될 방향에 대해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각본 없는 논의 테이블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던가? 현장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지금까지 행해왔던 문화예술교육의 민낯은 여실히 드러났다. 11월 14일 인천생활문화센터 칠통마당에서 그동안 진행한 포럼의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었고, 이에 대한 자료는 인천문화재단 누리집 자료실에 올려져 있다. 이 글은 그때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이다.
경쟁을 넘어선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한가?
인천 광역-기초 문화예술교육체계 구축을 위한 릴레이 포럼(이하 ‘인천 릴레이 포럼’)은 매 회 기초센터의 등장 배경에 대한 간략한 발제로 시작했다. 왜냐하면 모든 참여자가 기초센터의 개념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 주제는 ‘기초센터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기초 단위 문화예술교육의 거점에 대해서는 모두 환영했지만, 기초센터가 지역의 다른 문화예술교육기관들과 무엇이 다른지? 문화예술교육 공모 사업의 경쟁 주체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아닌지? 기초센터로 지정되기 위해서 성과를 만들어내고 평가를 받으며 계속 경쟁을 해야 한다면, 실적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존 기관들과 똑같아지는 것은 아닌지? 기존의 기관들과 똑같은 형태로 운영된다면 굳이 또 만들 필요가 있는지?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초센터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경험한 문화예술교육(기관)에 대한 현장 활동가들의 비판적인 시각이었다. 지금까지 문화예술교육에서 ‘공모’방식 이외에 다른 접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원기관에서는 ‘공모’라고 부르지만 현장에서는 ‘경쟁’이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 단체나 활동가들이 함께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협력을 할 수 있는 신뢰 체계가 부재하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어떻게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위 지원기관의 입장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해야 할 관할 구역이 너무 넓고 많아서 그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입장이다. 광역 단위에서 다른 방식의 지원을 시도하는 순간 그것은 공정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모’를 넘어서는 문화예술교육 지원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을 기초에서 찾아보자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인천이 상상한 기초센터는 어떤 모습인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기초센터의 윤곽을 그려보기로 했다. 기초센터는 광역 단위의 문화예술교육이 충분히 끌어안을 수 없었던 지역별 특성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의 수요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천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당 지역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지역에 문화예술교육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 즉 문화예술교육의 인력, 공간, 프로그램 등의 정보를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네트워킹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는 문화예술교육 자원을 계량화된 숫자로 정리한 통계를 넘어서,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량은 생활권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필요한 사람과 공간, 활동을 매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지역 문화자원 DB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데, 특히 기초 단위에서는 지역 문화자원에 대한 전수조사가 가능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지역의 문화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즉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던 분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매우 중요해진다..
지역 내 유무형의 문화자원들을 연계하여 지역에 적합한 최적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 이때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어내는 주체와 과정은 해당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강화군은 인구밀도도 높지 않거니와 주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관을 중심으로 한 거버넌스를 고려할 수 있다. 반면 미추홀구에는 실제 활동하는 문화예술교육 단체들보다는 작은 기관이나 센터가 많으므로 작은 기관들의 협의체와 같은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른 모델이 생겨날 수 있고, 이를 통해 지역에 적합한 문화예술교육의 특성화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인천 전역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지만, 실제 기초로 가게 되면 지역별 교육 자체가 굉장히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광역에서 짜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업방식, 사업계획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 인천 남동·연수구 참여자
둘째, 생활권 문화예술교육의 실수요자들, 주민들의 의견이 실현될 수 있는 상향식의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기존의 문화예술교육은 최종 참여자/향유자의 의견이 반영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학교 안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했거나, 소위 사회적 약자층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공급된 프로그램은 정책결정자와 매개자(주로 강사)들 사이에 협의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이 기초 단위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생활권에 밀착하여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과 문화예술교육으로 소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지역의 모든 사람, 즉 유아에서부터 노인까지의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그리고 그 안에서 최종 참여자의 의견이 수렴되는, 그들의 만족도에 의해 선택된 문화예술교육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직적 전달체계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제로 주민들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 만족하는 것에 의해 생활권 문화예술교육은 끊임없이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초센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가 참여하는가가 아니라, 참여한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천 서구 참여자
셋째, 안정적이면서 자율성을 보장받는, 무엇보다도 유연한 조직이 필요하다. 기초센터는 어떤 조직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했던 키워드는 ‘안정성’ ‘자율성’ ‘유연성’이었다.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안정적인 조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센터의 지정기간을 최소 3년은 보장해야 한다는 것과 운영 인력의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에서 활동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정성만을 추구하여 기관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자율적인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 기관은 해당 조례 또는 정관에 의해 정해진 사업을 해야 하므로, 기초 단위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는 데 제약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달리 결정될 일이다. 인천 내에서도 인구가 적은 기초 단위는 기관 위탁으로 안정적인 운영이 적합할 수 있고, 인구도 많고 문화예술교육의 자원이 풍부한 기초 단위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실현될 수 있는 조직이 요구될 수 있다. 그리고 생활권의 문화예술교육은 주민들의 생애주기별 요구들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생활문화센터, 문화원, 주민자치센터, 평생교육기관 등 지역의 다양한 자원들의 연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유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자율성과 상상력을 기관은 태생적으로 쫓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기초센터를 문화재단에 맡기면 광역에서 못했던 것을 기초에서도 못하게 된다. 최소한 제도적으로 봤을 때 그 한계를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천 중구·동구 참여자
넷째, 활용 가능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생활 밀착형의 문화예술교육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공간은 필수적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지하철을 환승해서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해야 하는 곳에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인천 릴레이 포럼 참여자들은 생활권 내의 공간에 대한 여러 방식의 접근을 제안했다. 어떤 단체는 해당 지역의 학교 공간(교실)을 협조받았고, 어떤 활동가는 문화공간으로 재생된 폐산업시설을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에 상당수 존재하는 빈집을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천 개의 문화오아시스 조성으로 자영업 공간들의 비는 시간을 활용해서 사적 공간을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이처럼 생활권 문화예술교육 공간의 실현을 고정된 공간으로만 사고하지 않고, 공간 유지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들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충분히 공급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많은 공간을, 그래야 접근성이 좋아질 것이므로, 접근성을 중심에 놓고 특히나 기초 지역 내라면 더 많은 공간이 지속적으로 운영되게 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까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 인천 미추홀구·계양구 참여자
우리는 협력의 경험을 쌓는 과정 중에 있다
인천 릴레이 포럼이 운영되면서 많은 변화의 씨앗들이 뿌려졌다. 우리가 지역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서로 어떤 요구를 가졌는지 확인했다. 지원사업에 익숙해져 서로를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하고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조차 어색했던 날들을 반성했고, 우리가 왜 계속 만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더 많이 협력해야 하는지, 왜 지역을 깊이 읽고 들여다봐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인천 릴레이 포럼이 권역별로 진행된 이후에 인천 서구에서는 해당 자치구의 문화예술교육 단체들과 함께 총 4회의 <서구 문화예술교육 포럼>이 진행되었다. 서로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우리 지역의 현황에 가장 걸맞은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형식과 내용의 활동이어야 하는지 지속적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물론 다른 기초 단위에서도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이 있다.
우리는 정답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오답 속에서 우리가 정말 함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아니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합의해 가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고 우리가 원하는 생태계가 조성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협력의 경험을 쌓는 과정 중에 있다.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을 매개로 더 작은 단위에서 더 큰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기초단위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는 문화자치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임지혜
임지혜
인하대학교 문화경영심리연구소 연구원. 인천연구원 (전)인천도시인문학센터, 안동대학교 (전)창조산업연구소, 사단법인 문화다움에서 좋은 스승과 동료를 만나 문화정책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마을 기록과 생애사 연구로 『지역문화 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인천시민구술생애사 검바위 사람들』 집필에 참여했다. 주된 활동은 인천과 경상남도 일대에 마을 공동체의 문화 활동과 기록을 찾아다니는 것이며, 인천 릴레이 포럼 코디네이터로 참여하고 나서는 마을 공동체와 문화예술교육에 빠져 있다.
nothinger113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