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가진 결핍을 알아보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모두가 애쓰는 과정에서 삶의 의욕이 활성화된다.’ 부산 북구 만덕동에 자리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임인 ‘고치’는 오늘도 한 사람의 결핍에서 모두의 욕망을 발명하려는 일상회복운동으로 분주하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감춰야 하는 서바이벌 체제 속에 각자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안심의 장소인 고치. ‘한 아이’가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그곳은 배움(앎)과 실천(삶)을 잇는 실험의 장이자 부대낌과 어울림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세상의 작은 울타리가 되었다.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동네를 상상하고(마을만들기 프로젝트) 오염되어 버려진 장소를 정화해 떠났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았던 작업(만덕천 살리기 운동)은 청년들이 자신의 힘으로 마을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 사람을 보살피고 키우는 일이 세상을 돌보며 지켜가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언옥 대표와 지난 7년간 고치와 함께 걸어가 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치는 ‘사회적 가족’ ‘도심 속의 작은 마을 만들기’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7년간 고치를 이끌어 가면서 만난 질문에 현명하게 답하기 위해 올해는 고치 바깥으로 나가 다른 모임에 참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신데, 고치 ‘바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모임에 참여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바깥보다는 안을 살피는데 집중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면서 점차 바깥을 모르고 안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존경할만한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내고 싶었어요. 존경할만한 사람이 뭔가를 크게 이룬 사람만은 아니겠죠. 공사장을 지나다가 보게 된 인부의 팔뚝이 가지고 있는 역사가 저에게 나지막한 성찰과 동력을 가져다주기도 하거든요. 생활예술 현장에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동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도 싶습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활동’은 주로 생활과 관계에 반응하여 만들어집니다. 가장 강력한 동력(사랑)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감정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무척 소모적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의 고민과 고독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싶고 무엇보다 실질적인 지지를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더 깊이 안을 들여다보고 더 많이 바깥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고치가 다양한 활동을 하는 만큼 단일한 정체성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방식의 공동체를 꾸리게 된 계기가 있었을 거 같습니다.
사실 ‘고치’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습니다.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일이 있었고 의지가 있었던 거죠. 그것을 이어나가다가 바깥과 교류하면서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겁니다. 시작은 제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에 내려와 쉬고 있다가 우연한 계기로 어머니 친구 아들 과외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더 많은 아이를 만나게 되었죠. 미적분을 가르쳤는데 아이는 지루해했고 저는 공허했죠. 성적이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목적에 두고 아이와 관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넌 진짜 뭘 하고 싶어?”라는 물음에서 고치는 시작되었어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같이 했고, 해보고 싶은 것이 없는 아이와는 일단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했어요. 몰입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대외활동을 주선하고, 자극될 수 있는 청년 그룹을 만들어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했어요.
저는 미래에 대한 고민 없이 정해진 길을 따라 순항해온 편이에요. 과학고-카이스트-대기업의 좁디좁은 길이었어요. 제가 만난 아이들은 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갈 것 같았는데 수많은 그 길에 대하여 저는 생각해 본 바도 겪은 바도 별로 없었었죠. 공감이 안 되니 해줄 말도 그저 머리에서 나오는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했어요. 제가 지나온 길 옆에 어떠한 길이 있고 그 그림자 속에 무엇이 숨 쉬고 있었는지 저부터 공부가 필요했어요. 사회와 저의 삶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을 못 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부끄러웠죠. 그즈음에 카페 헤세이티를 만났어요. 카페 주인장을 따라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그로부터 사회의 그림자와 이면에 대하여 조금씩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멀어 보이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는 타인들에 관해 작게나마 뜻을 세우는 나 자신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되었죠. 송전탑 농성장에 강제집행이 있던 날 두려움에 한발 물러서던 저에 대한 절망도 같이 느꼈어요. 그러한 절망은 제 생활을 좀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고 그림자와 이면을 살피려 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들을 아이들과 같이 공부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삶의 동력을 얻는 과정’ 말이죠.
고치의 구성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거 같습니다. 아이들과 청년을 대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나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어떻게 먹고 살까’하는 두려움, 혹은 어른들의 바람에서 출발한 ‘안정적인 미래’라는 틀 안에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어요. 존엄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고치에서만큼은 의무와 책임을 걷어내고 아이들의 순수한 욕망을 드러내도 되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욕망이 이해되고 지지받는 경험을 주고 싶었어요.
고치는 ‘한 사람’이 중요해요. 제 앞에 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로부터 마음이 반응해서 모든 일이 시작되어요. 아주 단순한 공식이죠. 있음직한 여러 명분은 뒷전이에요. 아이가 봉사가 하고 싶다면 봉사를 해보고, 노래하고 싶다면 우선 무대를 마련해요. 고치가 해온 일과 하고 있는 일, 해나갔으면 하는 일 또한 ‘한 사람’에 집중하는 단순한 공식의 반복이에요. 저부터 내 앞의 한 아이에게 반응함과 동시에 모두가 그 아이에게 반응하길 원해요. 예전에 ‘날라갈라쇼’(청년문화 기획)를 할 때 슬로건이 ‘All for One, One for All’이었어요. 한 사람의 결핍이나 욕망에 반응하는데,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해서 그 사람에게 입체적인 지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죠. 그 한 사람이 느끼는 결핍과 욕망이라는 게 꼭 본인에게 국한되지 않더라고요. 한 사회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으니까 한 사람으로 드러난 결핍이라고 해도 여러 사람이 그 결핍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한 사람의 결핍을 해결하려고 하면 여러 사람에게 더불어 자극되는 것이죠. A를 위해서 무언가를 했는데 B나 C가 무언가를 얻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그리고 한 사람이 전체를 위하고자 하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체는 타인으로 구성되고,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태도 또한 생겨나는 것이죠. 명분 위에 사람을 두고 전체를 바라보고, 그러한 전체의 일부로서 자기 역할을 스스로 찾을 줄 아는, 그래서 고치는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성을 만들고 이어나가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고치의 구성원이 청소년에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고치가 해온 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정리와 지금 ‘고치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점검, 그리고 앞으로 ‘고치가 해나갔으면 하는 일’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동안 무척 다양한 것을 해왔어요. 봉사단인 줄 알았는데, 봉사단이 아니고, 교육단체 혹은 마을활동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함께했던 청소년들이 청년이 되다 보니 사회적 경제, 창업 쪽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한 사람의 결핍과 욕망에 따라서 모두가 집중한다’고 했잖아요. 그 결핍과 욕망이 다양해졌는데 그 다름을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활동 방향 또한 무척 다양해져요. 마치 유기체처럼 성장하고 진화하죠. 이런 건 마을활동이나 교육활동과 같은 구획된 이름으로 정의될 수가 없어요.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소중하니 그 사람들의 결핍과 욕망에 따라서 어떤 일들이 기획되고 진행돼요. 그 진행의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저의 결핍과 욕망으로부터 시작할 때는 굉장히 작았는데 점점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결핍이 가세하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향해서 나아가는 방식이 되어가는 거 같아요.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반추하며 그에 부합되는 시스템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려는 힘, 그 힘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아주 작은 시스템이라도 자신이 창조할 수 있어야지 그 안에서 깊이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만난 아이 중엔 이 철저한 자본주의 혹은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매끄럽게 살아가기 힘든 이들도 있어요. 그런 아이들은 이미 이 세계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요. 어떤 의미로든 주인공이 될 기회를 억지로라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이 되어봤던 사람은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주인공으로서 관심받고 인정받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힘을 내게 되죠. 희망을 가지고 다시 와요. 고치는 부자가 되게 하는 곳이에요.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부자이겠지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알면 그 존재만으로도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어요.
청년들 스스로가 이끌어가는 주체적 삶이나 지역 안에서 자립하는 삶을 지향하고자 많은 작업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자체와의 협력 작업이 많았고 마을 안에서의 교류를 통한 크고 작은 성과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자체-마을과 청년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고치에 찾아온 한 복지사를 통해서 이 마을의 여러 사람을 소개받게 되었어요. 그때 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님을 소개받았죠. 그분께서 ‘하루의 정규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학생을 빼내 와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너무 와닿는 거예요. 학생들을 학교에서 빼내 오면 그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겠냐, 여기, 마을에 있어야 한다, 마을이 놀이터이자 배움터이며 일터이자 삶터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같이 바람직한 마을교육의 사례를 만들어보자는 결의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을교육공동체 고치’라는 이름으로 교육청 및 구청 사업을 따내어 열심히 추진했었어요.
마을에 만덕천이란 오염된 하천이 하나 있었어요. 냄새가 심하고 더러워 혐오 공간으로 버려져 있었어요. 구에서 예산을 들여서 그곳을 정비했는데, 겉모습은 예뻤지만 흐르고 있는 물은 썩은 물이었어요. 어린 시절에 낙동강 가에서 놀곤 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저의 정서와 능력의 뿌리라고 생각해요. 자연은 수학, 과학, 문학,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료를 다 담고 있어요. 만덕천이 그런 자연으로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되든 안 되든 아이들과 함께 뭐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만덕천 살리기 운동본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만덕고등학교, 고치, 만덕종합사회복지관이 협력해서 만덕천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생태하천으로 만들기 위한 주민동의서’를 만들어 서명을 모으고 구와 정치가들에게 전달하고 이 운동을 이슈화하기 위해 정책박람회나 라디오, 신문 등의 매체에 아이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알리기도 했어요. 교과서에서 배운 당위적인 지식을 실천으로 체득해나가는 교육이 되었으면 했던 거죠. 만덕천 살리기는 ‘정화’ ‘문화’ ‘조화’의 세 단계를 거치며 진행될 계획이에요. ‘문화’가 흐르게 하기 위해 악취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만덕천 열대야 영화제’를 개최했어요. 악취는 있었으나 사람들이 400여 명이 넘게 왔었어요. 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허기를, 또한 만덕천이라는 공간의 가능성을 모두가 발견하게 된 계기였죠. 학교와 마을이 협력한 좋은 사례를 만든다면 그 사례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교육이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었었고 결국 작지만 그러한 한 사례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당시 운동을 함께 추진하던 교사와 복지사, 행정담당자들의 이직과 전근, 퇴임이 있으면서 다시 리셋되는 느낌이 있어요. 학교는 업무과다의 이유로 마을에 폐쇄적이고 막상 마을 의제를 교육 의제로 풀어낸 프로그램이 들어가더라도 담당 선생님들은 무관심한 경향이 있어요. 교사와 마을교사가 입체적으로 아이들을 관찰하고 이끌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마을교사는 교사의 일을 덜어주는 강사 정도로 생각되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공무원들은 청년이나 청소년을 하나의 존재가 아닌 필요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있더라고요. ‘상대’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본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환대’를 추구하던 아이들이 ‘경계’를 배웠어요. 경계는 하되 애정만큼은 안 놓았으면 좋겠는데 걱정이 되더라고요. 긍정적인 측면을 본다면 ‘스케일’을 만난 것을 들 수 있겠네요. 너와 나, 이 안에서의 영향만이 아닌 마을이나 모르는 타자들과 같은 새로운 스케일을 만난 것이 큰 배움이었지요.
날라갈라쇼에서 가상으로 마을을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실제 마을 활동가 두 분을 촌장으로 모셨어요. ‘가치화폐’를 만들어서 행사 전에 그 화폐를 모을 수 있는 재미난 작업을 진행하고 그 화폐로 마을 만들기 놀이를 할 때 자신의 집을 살 수 있게 했어요. 집은 폐목으로 직접 만들었어요. 두 채를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채는 자신이 살 집이고 또 한 채는 마을에 있었으면 하는 공간이었죠. 그런 집들을 마을 안에 배치해서 마을의 형태를 만들어나갔어요. “마을이라는 게 만들어져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마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는 참여 청소년의 피드백에 감동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이 저에게는 큰 성취감으로 남아 있어요. 만덕천도 혐오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이 마을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큰 가능성의 공간이 되었죠. 그 과정에서 아이들도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거 같아요.
고치라는 이름은 누에고치를 떠올리게 해서 ‘미완의 존재’라는 인상을 갖게 하지만 고치의 활동 이력을 살펴보면 무언가를 고치고 변화를 만들어나간 실천적인 역량이 도드라진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고치는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대상’과 각자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주체’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길어 올린 성취와 부딪친 어려움의 순간이 많을 줄로 압니다.
보살피고 돌봤다기보다는 그냥 튀어나온 곳은 조금 깎고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면 조금 채워 넣고, 튀어나온 곳이 있으면 조금 집어넣는 정도인 거 같아요. 그저 따뜻하게 보살피고 돌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때론 차갑게 살피기도 하고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서로 간의 개입을 조절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거 같아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낯설게 보고 의심하고 저항하고 자기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본 것을 표현하고 그래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과 무언가를 할 땐 늘 예술을 접목하고자 해요. 그리고 교육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서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이론적인 면에서 부족할 거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먼발치에서 입으로 ‘가르치기’보다는 ‘삶으로 보여주기’ ‘뛰어들어 개입하고 반응하기’에 집중해요. 예를 들어 그들에게 주체적인 태도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제 삶이 우선 주체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저의 모습이 보기 괜찮으면 이 친구들도 그 길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체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강조되는 ‘청년다움’이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화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자체나 국가 지원 사업을 신청하거나 지원을 받을 경우 ‘청년다움’을 강조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측면도 있을 텐데,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과 규격화되고 제도화되는 청년다움 사이에서 고치 또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 같습니다.
청년다움을 굳이 강조해서 기획해 본 적은 없어요. 그간 고치의 사업들은 멤버들 사이에 드러나는 결핍에 의존해 있어요.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을 구상했던 거죠. 결핍으로부터 차고 올라온 동력이 청년다움이 표방하는 가치들과 닮아있는 느낌은 드네요. 박제되는 게 문제이지 청년다움이라 일컬어지는 그 가치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청년다움의 대표 명사 격인 ‘열정’ 같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건 중요해요. 사업은 수단일 수 있어요. 사업이 추구하는 어떠한 가치가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그래야만 되는 진리처럼 고착화되는 건 경계해야 돼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를 잘하면 이런 걸 막을 수 있어요. 박제는 유연함이 거세되었을 때 생겨나잖아요. 유연함은 다양성이 존중되었을 때 만들어져요. 한 사람의 독자적인 존엄이 의식되고 살아있을 때 박제는 일어나지 않아요.
4년 전인가, 아이에게 쓴 편지를 어느 책에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흠을 드러내도 괜찮아, 이 공간만큼은 자기 흠이 드러나도 괜찮은 공간이야’라는 말이었어요. 민낯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 그리하여 ‘깊은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 딛고 설 수 있고 차고 올라올 수 있는 땅을 갖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땅이 있어야 두려움을 이길 용기도, 열정도, 소위 청년다움으로 일컬어지는 많은 덕목도 발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흠을 드러내고 그 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해요. 분명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데 흠을 드러내다 보면 이상하게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는 거죠. 이런 분위기 안에서 자신을 그 자체로 사랑하며 타인이 자신과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죠.
고치 안에선 ‘선생님’으로, 바깥에선 ‘마을 활동가’나 ‘고치 대표님’으로 되는데, 이언옥이라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희망’이 궁금합니다. 고치와 더불어 걸어 나가고 싶은 희망과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이나 마을 활동가라는 이름은 어색하고 남의 옷을 입은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고치와 더불어 걸어 나가고 싶은 희망이라……. 고치와 더불어 나가고 싶은 길도 있겠고 이곳과 떨어져서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개인의 길도 있겠죠. 고치의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서 저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고민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감당할 수 없는 걸 감당하려고 하는 게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마치 관성처럼 계속 그 문제를 쫓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그들에게 유효한 도움이 되고, 또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하고도 적당한 거리를 찾고 있어요.
한 존재가 자립하고 자유롭기 위해선 이면의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치에서 제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이 무력감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그 무력감이 제가 품고 있는 사랑의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 내 안에 아직 사랑이란 게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들더라고요. 아이들도 이면의 가치를 이끌어내는 법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두려움을 용기로, 다름을 특별함으로 마치 연금술사처럼 재구성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고치가 제게 주는 구속감이 때론 무겁고 버겁지만 그것을 치워버린다고 자유로워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고치는 제게 거품 없는 자유를 꿈꾸고 누리게 해 줄 ‘아름다운 구속’이라 생각해요. 저의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 ‘고치’라고 하는 이 공간은 꼭 있어야 되는 곳입니다. 더불어 걸어 나가고 싶은 희망과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은 서로 의지하며 맞물려 있다고 보면 될 거 같아요.
이언옥
이언옥

KAIST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현대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재직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와 청소년 공동체를 꾸렸다. ‘배움과실천의공동체 고치’라는 이름으로 10년 가까이 청(소)년들과 함께 사회적 가족을 꾸리며 마을, 교육, 예술, 인문, 청년문화 등의 범주를 아울러 틀 지워 이름 붙일 수 없는 활동들을 해왔다. 개인의 욕구와 결핍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동기화된 기획이 사회적 의미와 효력을 지닐 수 있도록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사진 _ 박진우 사진작가 nowhere1999@gmail.com
김대성
김대성
문학평론가. 2007년 계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와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을 썼다. 2013년부터 생활예술모임 ‘곳간’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모임 ‘회복하는 글쓰기’를 조직해 디렉터 역할을 하고 있다. 동아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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