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뒤늦은 나이에 평화학을 공부하겠다며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떠난 것은 지난 2018년 6월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줄곧 문화예술과 관계된 영역에서만 일을 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선 학문인 평화학 공부를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나보다 한참 어린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책상 앞에 앉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인스브루크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시작된 과정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한국의 대학이라면 “평화학이란 무엇인가?”부터 배우게 될 것 같은데, 첫날 오리엔테이션 시간부터 학생들이 모두 어울려 몸을 움직이는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수시로 춤을 추거나, 몸을 이용해 감정을 표현하거나, 그림을 그려야 했다. 노래 혹은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몸을 탐구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입장을 바꾸어 연기하는 역할극도 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황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차차 알게 되었다.
삶의 연극 홈페이지
[사진 출처] www.theatreforliving.com
예술적 상상력을 통한 평화
인스브루크대학교 평화학 과정은 세계 각국의 평화학 과정 중에서도 가장 다양성과 상대성이 강조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자기 관점, 자신의 경험이다. 평화의 상대성이라는 말에는 개인들이 자신의 평화와 타인의 평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서부터 평화의 길이 열린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중심 치료의 창시자이자 심리 상담가인 칼 로저스(Carl Rogers)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평가할 권리가 있고, 자신의 자율적인 선택의 힘으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개인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심리학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 인간 중심 치료와 인본주의 심리학을 이론적 바탕에 둔 인스브루크 평화학 과정은 개인과 가족, 사회와 국가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의 평화를 공부하지만, 모든 학습의 출발점에는 학생들 개인의 자기 탐구, 혹은 자기 발견이 있다. 평화학을 공부하는 데에 개인, 즉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고 거기에서부터 평화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정신을 ‘온전한 사람 되기’ 혹은 ‘온전한 자신 되기’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렇게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몸, 몸의 능력과 한계를 발견하는 다양한 활동이 예술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평화의 출발점인 자신에 대한 탐구가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단지 평화학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평화 세우기(Peace Building) 활동가이자 학자 중 한명인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은 그의 책 『도덕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에서 예술과 평화 세우기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갈등 해결 전문가로서, 우리는 부차적인 차원을 뛰어넘고, 건설적인 변화의 예술과 정신을 얻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창조적 행동의 일환으로 꿈꿔야 하고, 이를 기술적인 절차보다는 예술적인 노력으로 봐야 한다. (중략) 다만, 도덕적 상상력에 생명의 원천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원천에 도덕적 상상력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도전 과제에 뿌리를 두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상상해내는 능력이다.”
– 『도덕적 상상력』(존 폴 레더락, 2016) 중
레더락이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한 도덕적 상상력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상상해내는 능력’이다. 여기에 왜 평화의 여정에 예술이 결합되어야 하는지가 더욱 명확해진다. 예술은 단지 평화를 탐구하는 여정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도덕적 상상력 혹은 (필자의 언어로) 예술적 창조력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예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필연적인 조합일 수도 있고, 걸맞지 않은 관계이기도 하다. 예술을 통해 평화를 느끼고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화의 반대편에 복무했던 예술을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보아왔고, 현재까지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스브루크대학교에서는 많은 예술 활동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5리듬 댄스’와 ‘랄리쉬 씨어터’ ‘삶의 연극’ 사례는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평화를 위한 자기 탐구와 공동체의 회복
‘5리듬 댄스(5Rhythms)’는 미국의 무용가이자 음악가인 가브리엘 로스(Gabrielle Roth, 1941~2012)가 창조해낸 무용 기법으로 각각 다른 리듬에 맞춰 흐름(Flowing), 스타카토(Staccato), 혼돈(Chaos), 영혼의 노래(Lyrical), 침묵의 춤(Stillness) 등 다섯 가지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포, 분노, 슬픔, 기쁨, 자비의 다섯 가지 감정과 연동되어 있으며, 각각 인간의 성장 단계와도 연결된다. 또한 각각의 리듬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해석되며, 개개인의 자유와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열게 해준다. 인스브루크에서 5리듬 댄스를 경험했지만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이 있게 소개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춤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심지어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열린 몸과 마음으로 그 흐름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어떤 부분이 점차 치유되고 변화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 때문에 5리듬은 ‘댄스’를 초월한 것으로, 이 움직임은 치유이며, 명상이자 은유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 로스가 말한 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뿌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지구상의 존재들 가운데서 추상적 가치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존재는 (현재까지 알려진 한) 인간뿐이다. ‘평화’라는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며,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는 작업이다. 가브리엘 로스의 5리듬 댄스는 바로 그 과정이다.
‘랄리쉬 씨어터(Lalish Theaterlabor)’는 쿠르드 출신의 니가르 하십(Nigar Hasib)과 샤말 아민(Shamal Amin)이 설립한 실험적 퍼포먼스 집단이다. 이들 역시 인스브루크대학교 평화학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특별한 점은 언어를 통한 소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을 ‘몸과 목소리의 탐험’이라며, “노래는 리듬의 원천이자, 육체적 현존의 원천이고 또한 행동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노래를 부르지만, 가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울림과 에너지에 집중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상관없이 이들의 워크숍에서 자신만의 노래를 할 수 있다. 지난 학기 랄리쉬 씨어터의 워크숍과 그 결과물인 학생들의 공연을 보면서 평화학의 자기 탐구가 심리적, 정신적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통한 몸의 탐구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끊임없는 자기 탐구와 인간 본질의 회복, 이것이 필자가 배우고 있는 평화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랄리쉬 씨어터 워크숍
[사진 출처] http://www.lalishtheater.org/janner-marz-2018
인간의 본질로의 회귀를 위한 다른 예술 프로그램으로는 ‘삶의 연극(Theatre for Living)’이 있다. 이 연극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을 창시한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의 영향을 받아 캐나다 연극연출가인 데이비드 다이아몬드(David Diamond)가 설립한 극장이자,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다이아몬드는 10년 전부터 인스브루크 평화학 전공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데, 그의 연극 기법은 자기 자신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자신을 개인으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우리의 이야기를 내면 깊숙이 숨겨두기만 한다면 결국은 병들게 된다. 인간의 몸은 결국, 통합된 시스템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로 만들어지듯이, 공동체는 공동체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인들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공동체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이런 파편화하고 단절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삶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연극을 통해 잃어버린 개인,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의 사례는 모두, 평화학의 출발점으로서 개인이 자기를 마음만이 아니라 몸으로서 발견하고, 표현하며, 이를 공동체에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처음 평화학 수업에서 예술교육을 접했을 때는 놀라움과 신선함이 컸다면, 지금은 평화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 길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개인과 공동체를 다시 찾는 일, 이것이 필자가 배우고 있는 평화학의 토대이며, 이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예술은 그 놀라운 ‘상상력’으로 그것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화와 예술교육을 뗄 수 없는 유럽의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예술교육도 조만간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오는 매개체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관련링크]
5리듬 댄스 www.5rhythms.com
랄리쉬 씨어터 www.lalishtheater.org
삶의 연극 www.theatreforliving.com
오은영
오은영
(사)문화다움의 협력 연구위원이며, 현재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평화와 문화의 접점을 찾고 있다. 문화를 매개로 한 평화 구현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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