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자를 고려하지 않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교육의 중심에 수요자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르떼 365]는 단지 ‘고객’의 소리를 듣고 반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성장을 이끌기 위한 질문 중 하나로 ‘수요자’를 짚어보고자 한다. 수요자를 중심에 둔 문화예술교육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전문가 좌담뿐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경험한 청소년과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도 마련했다. 수요자의 입장에서 ‘삶과 연계된 학습’ ‘배움의 주체화’를 지향하는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인지 돌아보자.
[기획 포커스]수요자 중심 | ① 전문가 좌담 ② 청소년 좌담 ③ 청년 좌담
이천 양정여고는 <곧은 래퍼>란 교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인기를 끌었던 TV 프로그램 <고등래퍼>를 따서 이름 붙였다. 보통 랩이라고 하면 상대를 깎아내리는 ‘디스’가 담긴 내용을 쓴다. 하지만 학생들이 희망적인 가사를 담아낸다는 의미로 프로그램명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고생 A. 평생 처음 알게 된 랩이 너무 재밌었다. 평소 글쓰기를 즐기는 것도 아닌 평범한 이과생이었다. 그는 고3 생활 이야기를 녹인 ‘고쓰리’란 제목으로 랩 가사를 쓰고 학교 축제 장기자랑 때 상까지 받았다. 이전까지 취미라고 하면 스마트폰 가지고 놀거나 웹툰을 읽는 게 전부였던 A양. 지금은 취미를 적는 난에 ‘랩 가사 쓰기’라고 당당히 쓴다. 평생 동안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취미를 얻어서 행복하다고 친구들에게 말한 그는 수능시험을 치르고 난 후 그 경험을 랩으로 써서 졸업식 때 발표할 계획이다.
문화예술교육은 거창하거나 재능 있는 학생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하다 지쳐 잠깐 짬이 나거나, 대학에 가서 여유가 생겨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내용에 공감하는 청소년들이 있을지,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그들의 진짜 생각이 궁금했다. 8월 25일 오후 2시. 합정역 근처의 한 카페에 가라현(계성고 3), 김시은(보성여고 2), 조은서(양정여고 3) 학생이 모였다. 평소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고 관련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해온 이들과의 좌담회 현장을 공개한다.

그동안 참여했던 문화예술 관련 활동이 있다면 얘기해달라
조은서 : ‘학교 안 예술학교’ 프로그램을 1, 2학년 때 참여했다. 지역사회나 예술가들을 학교에 초청해 드로잉과 재즈, 영상 제작, 캘리그라피 등을 배우는 내용이었다.
김시은 : ‘달꽃창작소’(청소년 교육예술연구소)라는 곳에서 ‘나’를 주제로 1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었다. 동네 해방촌 축제에 참여한 인연으로 마을라디오 <용산 FM>에서 ‘우리 입으로 전하는 세상의 이야기’라는 코너를 만들어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있다.
가라현 : 연극과 음악 분야에 관심 있어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우리가 외치는 망각댄스’(극단 신세계)에 참여했다. 작년에는 <파란나라>라는 공연을 펼쳤고, 올해는 <망각댄스>라는 거리극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는지 궁금하다.
김시은 : 교내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달꽃창작소라는 기관을 알게 됐다.
조은서 : 이전에 활동했던 학생들이 교내에서 홍보를 한다. 각자 하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학생 15명이 모이면 공식 동아리처럼 활동할 수 있다.
가라현 : 먼저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친구가 추천해주거나 SNS에 올라온 내용을 우연히 보고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그램을 선택할 때 무엇을 고려하나?
조은서 : 공부 외에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여했다.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다른 분야 교육에 비해 독특하고 재밌다. 감성과 오감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 그림을 못 그려도, 노래를 못해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김시은 : 프로그램 내용을 살펴본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재밌어 보이면 일단, 몸으로 부딪혀본다. 그 과정에서 나의 특성과 개성을 찾을 수 있다. 학교 특강에 온 선배 안미옥 시인을 만나 시와 사랑에 빠졌다. 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교내 소설반에도 들어가고 작가를 꿈꾸게 됐다.
가라현 : 교내 프로그램은 하고 싶은 걸 선택한다.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내용이 나와 맞는지가 중요하다. 외부 프로그램은 다양한 연령대가 참여하다 보니 친구랑 함께 있어야 편하다. 거리가 가깝거나 문화 봉사 시간을 인정해주는지도 중요하다.(웃음)

김시은, 조은서, 가라현
그동안 활동했던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조은서 : 방학 때 컬러 테라피스트를 찾아가 하루 동안 그의 삶을 간접 체험한 적이 있다. 미술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느끼며 정책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교실 미닫이문을 열면서 학생들이 자꾸 다치는 걸 보고 문이 열리는 바닥 공간을 따라 선을 그리고 무지개나 그림을 그려 넣었었다. 그러면서 사용자를 편리하게 만드는 UX 디자인(user experience design, 사용자 경험 디자인)에도 관심이 생겼다.
김시은 : 고1 때 달꽃창작소의 미술연구 수업에 참여했었다. 한 가지 사물을 두고 자기만의 시선으로 그림을 표현하는 것이다. 손으로만 만져서 어떤 사물인지 그려보는 활동을 했는데 당연히 컵인 줄 알았는데 실제는 주전자였다. 그런 반전이 재밌었다. 중학생부터 40대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세대가 참여해 각기 다르게 표현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상상만으로 어떤 주전자일지 그리는데 플라스틱, 유리, 도자기 등 다양한 결과가 나왔다.
문화예술교육이 다른 분야의 교육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조은서 : 사회과학이 어떤 사안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분야라면 문화예술은 다각적으로 바라본다. 하나만 보면 깊이 볼 수는 있어도 전체를 볼 수 없다. 문화예술을 통해 내면을 끌어내 표현하면서 사고가 자유롭고 유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김시은 : 학교 수업도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일방적, 강의식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내용 자체에 대해 나 스스로와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단순히 지식을 받아들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내용을 깊이 고민하며 내 것으로 체화해내야 한다.
가라현 : 문화예술은 정답이 없으니까 어떤 걸 상상해도 다 맞다고 인정해준다. 각자의 생각이 모두 답이 된다. 국‧영‧수처럼 꼭 배워야 하는 과목이 아니라 노래, 연기, 악기 등 자신이 원하는 세 분야를 폭넓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각자 생각하는 문화예술이란? 우리 삶에 문화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가라현 : 문화예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이미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역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치는 오케스트라 공연처럼 내게 녹아드는 것이다.
조은서 : 학생들은 문화예술이 시간이 남아야 하는 것, 혹은 잘하는 사람만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문화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문과니까 과학 공부는 안 할래’는 할 수 있지만, 문화예술은 버리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사고방식을 넓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 잠깐 동안의 돌파구가 아닌, 활동 그 자체가 공부가 되는 셈이다.
김시은 : 문화예술을 안 한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지만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내 삶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 집 근처 독립서점에서 하는 워크숍에 참여해 직장인과 책 이야기를 나눴다. 그만큼 문화예술은 또래부터 아주머니 등 다른 세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장벽을 없애주기도 한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포함해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기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가라현 : 프로그램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을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를 2년째 하면서 직접 공연을 펼친다는 목표, 동기부여가 되니 더 열심히 참여하게 됐다.
김시은 : 관심은 있어도 참여할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SNS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오늘 같은 좌담회 자리도 의미가 깊다.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자체도 문화예술교육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조은서 : 학생들도 사회참여 하는 걸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피드백 받으려는 인정욕구도 강하다. 가라현 학생의 말처럼 활동 결과물을 나만의 추억으로만 남기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
조은서 학생은 “문화예술교육을 하며 편한 분위기 속에서 간식을 주는 것보다 자신들이 만든 영상으로 이천시청에서 상영회를 열었을을 때 학생들이 훨씬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실제 교내 재즈스쿨 프로그램에 참여해 근처 산부인과에서 산모를 위한 게릴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모두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과연 될까’ 하며 섭외를 망설였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이 직접 결과물을 보여주는 내용까지 꾸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문화예술교육 정보를 좀 더 다양하고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단발성으로 참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문화예술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갈 수 있는 기회, 인프라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컸다.
문화예술 분야는 단기간에 교육 효과를 내기 어렵다. 문화가 우리 삶 구석구석,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청소년들도 여러 통로로 문화예술을 접하는 게 중요하다. 감수성은 만드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어릴 적 감수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예술을 접한다면 아이들이 느끼고 그려낼 삶은 더욱 무궁무진할 것이다.
사진_이재범(pov스튜디오)
최화진
최화진
아이들을 좋아하고 교육 분야에 관심이 있어 한겨레 교육섹션 <함께하는 교육> 기자로 일했다. 기회가 닿아 가정 독서문화 사례를 엮은 책 <책으로 노는 집>을 썼다. 현재는 교육 기획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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