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피터 싱어는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 의사, 변호사, 정치가, 교육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자원 불균형에 반대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걷지도 다리를 뻗지도 못하게 가축을 가두어 두는 것에 반대하십니까? 이렇게 생산된 베이컨과 달걀을 사면서 공장식 축산에 일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술 역사의 한 시기에 예술가, 예술교육자, 문화예술교육자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예술가는 일반적인 사회적 기능과는 상관없이 일반인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창조적 세계를 만드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일상의 문제나 사회의 문제는 크게 상관이 없다. 오로지 색채, 질감, 선, 면만이 의미를 일으키는 실체여서 순수성을 침범하는 사회적 현실은 철저히 배제해 나가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 환경 문제, 동물 복지의 주제는 저녁 식사 중 논평은 할 수 있지만 예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학자, 변호사, 정치가의 일이지 예술가나 예술교육자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래리 쉬너는 순수예술의 허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원래 시공을 초월한 걸작 문학이 되기 위해 쓰인 것도 아니었고, 확고히 결정된 글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대중 공연을 위한 가변적인 대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문학 선집에서 뽑아 읽고,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전시장에서 감상하고, 연주회장에서 바흐의 수난곡을 듣는다. 이런 행위들은 미학적 감상을 위해 자율적인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예술 개념을 옛 사람들도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갖게 만든다.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우리의 문화가 야기한 이 혼돈 상태를 타파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순수 예술의 범주가 사라질 수도 있는 근대의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래리 쉬너의 지적에 대해서 공감한다면 당신은 이미 일상에서 직면하는 무수한 삶의 문제를 접하고 풀어가며 사회참여적 예술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사회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면서 문화정책가, 영재교육 전문가, 창의교육 전문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현재 자본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자산을 운용하고 배분하는 곳과 새로운 기술 장비와 커뮤니케이션 도구, 홍보 및 마케팅 전략을 발명하는 곳이 아닌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새롭고 창의적이며 눈길을 끄는 아이디어들이 있는 곳이자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예술계와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아닌가? 창의적 활동이 어디에서 축적하고 누구의 실질적 필요에 조응하는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동시대인은 이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합니다. ‘새로운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 새롭지 않은 것은 전통이고 구습이고 과거이고 없어져야 할 것이고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이 예술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유일무이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창조력이다.’
수지 개블릭이 이러한 접근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합니다. ‘모더니즘 미학은 미술을 삶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지속시키는 급진적 개인주의 내지 그 개인주의의 칙령에 초점을 맞추면서 관객의 역할을 유리된 구경꾼-관람자 역할로 한정 짓는다. 예술은 연결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접속의 미학(Connective Aesthetics) 측면에서 존재를 그것의 전 차원에 걸쳐 개방함으로써 예술은 접속과 치유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예술이 물질 생산의 계기보다 관계 생산의 계기로 옮겨야 된다는 것은 창의성이 어떤 과정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인간과 삶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면서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연결하고 비어있는 것을 상상할 때 사회적으로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창의력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삶의 문제해결과 연결된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파블로 엘겔라는 예술의 경계에 대해서, 예술 창작의 방식에 대해서 예술가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대화의 가치에 대해서 예술계는 왜 무심한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대화를 힘의 구조와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 제한된 불완전한 소통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예술적 전통이 아니라 교육적 전통에서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해석학이나 존 듀이의 실용주의나 위르겐 하버마스와 리처드 로티의 신실용주의, 파울루 프레이리의 교육학 토론을 해방의 과정으로 생각한 사람들의 노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군의 예술가들과 문화예술교육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관객과의 대화는 마케팅 차원에서 고려이지 예술 창작의 과정으로 볼 수 없다. 관객은 작품의 창작 과정을 엿봐서는 안 되고 완성된 작품을 통해서 완결적으로 만나야 한다. 예술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적 스킬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파블로 엘겔라는 최근 예술가들이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는 상태를 ‘확장된 장에서 교육학’이라고 말합니다. ‘근대적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서 예술가의 예술적 활동이 교육 행위와 결합됨에 따라 첫째는 교육 행위 자체가 창의적인 수행성이라는 것, 둘째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공동으로 예술 환경을 구축함으로써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셋째는 예술 지식이 예술 작품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라는 것’ 이라고 합니다.
상호 대화로서 교육 행위를 이해하고 참여자의 관심과 욕구에서 출발해서 다양한 활동을 촉진한다는 것에 예술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사회문화예술교육의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버트람 제섭은 예술 장르나 형식과 참여자 반응에 대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오페라가 최고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것이 최고라고 느끼지 못하는 권태로운 오페라 관객은 자기가 훌륭한 오페라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즉 그에게는 예술로서의 오페라가 존재하는가? 만일 그가 쉬운 대중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면, 심미적인 면에서 볼 때 그에게는 웅장한 오페라보다는 차라리 대중음악이 더 낫지 않을까? 자신이나 타인에게 자기가 정말로 즐기지 못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기만과 어리석음은 그 어떤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많은 예술교육자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술교육이 필요하다. 클래식, 오페라, 미술, 무용은 교양을 높이고 통속성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나의 악기를 배우거나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하다 보면 예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많이 경험해본 만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메리 제인 제이콥은 공동체의 경험과 무관하게 예술적 형식을 교육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전통을 넘어서서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가를 드러내는 것에 따라 위상이 부여되어 온 20세기 미술과 다르게, 또한 예술에서 자기표현이라는 서구 모더니스트의 목표의 정반대에서, 세계 속에서 미술의 입지가 관객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가고 그들을 참여하게 하는 노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면 어떨까?’라고 합니다. 공동체의 참여에서 출발해서 문화예술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그 과정의 결과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에 동감한다면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의 다른 대답에 대해서 모두 공감하고 동감하고 하나씩 예술적 교육적 실천을 하고 계신다면…….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현암사, 2016, 84쪽
『예술의 탄생』, 래리 쉬너, 들녘, 2007, p.12
『예술과 인간가치』, 멜빈 레이더, 버트람 제섭, 김광명 옮김, 이론과 실천, 1987 p.122
『Art as Experience』, John Dewey, Penguin Putnam, 1980, p.15
이광준
이광준
생태, 지속가능성, 문화자치와 연관해서 공간, 시장, 장소의 문화적 재생과 관련해서 10년째 활동 중이다. 현재는 석유탱크 5개를 재생한 문화비축기지의 기지장으로 있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관해서 사회적기업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별별솔루션’, 시민문화공간 문화예술교육, 시민문화예술교육 ‘시시콜콜’의 컨설턴트로 활동을 했고, 제주에서 생태문화예술교육 계획을 수립했다.
supsara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