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이미지가 있었을까?’ 프랑스의 매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가 던진 이 알 듯 모를 듯한 질문은 생각보다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오래 전 인류가 그저 자연의 여타 생명체처럼 단순한 생명활동을 이어나가는 존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의 역사를 구축하게 된 근원적 동기를 묻는 뜻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다시 말해, 왜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처럼 그저 태어났다 일정한 시간을 살고 사라져버리는 자연의 생리에 굴복하지 않았을까? 왜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며 문화와 예술을 전개시켜 나가게 됐을까?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고, 신의 형상을 조각하고, 새의 지저귐을 음으로 바꾸고, 바람의 흐름을 몸의 율동으로 표현했을까? 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조각이, 음악이, 춤이 인간에게 당장 먹을 것을 제공하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미술전공자는 물론 미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책 《서양미술사 The Story of Art》를 비롯해 거의 모든 미술책들은 어떠어떠한 작품들이 있다고 시작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어떤 미술작품들의 존재와 그 의미를 논하기 이전에, 그것들이 애초 왜,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따져보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미술, 미술가, 작품 등 일련의 미술 개념이 기원전 3만년 경 단단한 돌에 풍만한 여체를 조각한 원시 인류에게 있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원시 인류는 그런 추상적이고 제도적인 미술 개념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지를 그리고, 새겼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우리가 ‘미술’이라 이름 붙인 특정한 문화 형식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문화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유무형의 것들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거기에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거대한 사회체제부터 최근 유행하는 자잘한 패션 아이템까지 온갖 것들이 속한다. 또 역사와 전통이 켜켜이 누적된 인류문화유산에서 지구상의 어느 조그만 지역에 이제 막 모여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소박한 습속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포괄한다. 우리가 쉽게 보는 듣고 즐기는 그림, 음악, 춤, 연극, 영화, 스포츠도 두말할 것 없이 문화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매우 뿌리 깊고 광범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앞서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란 인간 활동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자, 이상 위 세 논점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의 기원에 대해서, 미술작품 이전의 이미지에 대해서, 인간의 삶과 문화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직 인류 문화에 이미지, 가령 회화와 조각이 출현한 근원적 동기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헌데 그 답을 어쩌면 여러분은 서구 문화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 코린트의 시키온에 살았던 도공 부타데스(Butades of Sicyon)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연인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어 비탄에 잠긴 딸에게 부타데스는 벽에 드리워진 그 남자의 그림자를 따라 그릴 것을 권했다. 촛불 때문에 반대편 벽에 만들어진 연인의 실루엣은 지금 여기 있는 남자의 분신이자, 그가 전쟁에서 설혹 죽더라도 벽 위에서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따라 부타데스의 딸은 불에 탄 장작개비로 젊은 연인의 그림자 윤곽을 그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거기에 흙을 발라서 부조를 만들고, 다른 도기를 구울 때 그것을 함께 구워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Historia Naturalis》에서 전한 위 이야기는 ‘회화의 기원’과 ‘소조의 기원’을 담은 신화로 일컬어진다. 신화인 만큼 객관성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류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었던 동기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대신해서 더 오래 변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출현했다는 얘기다. 의미를 좀 더 확장해보자. 비단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간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변화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물론 세상 만물 또한 변전을 거듭하고, 생성과 소멸의 행로를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벽에 그린 사람의 얼굴, 돌에 새긴 인간의 몸, 도자나 청동으로 주조한 세계의 이미지는 실재를 대신해 그 자리에 그대로 반영구적인 삶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필멸하는 인간의 조건, 유전(流轉)하는 세계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 인류의 뿌리 깊은 열망을 담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전 만 오천년 경 라스코 동굴벽화가 그려진 이유, 기원전 삼만 년 경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조각된 이유, 고대 이집트의 멤피스가 벽화로 그려지고 금으로 만든 관 속의 미라로 남겨진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 아주 오래된 것들이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미적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감동을 선사한다. 그 점에서 시공을 초월한 이미지를 꿈꾼 옛 인류의 소망은 탁월하게 실현됐다.

 

글 | 미술평론가 강수미

시각예술, 미술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학과에서 박사학위(발터 벤야민 사유에서 유물론적 미학 연구)를 받았다. 2005년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기획으로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년 제 3회 석남젊은이론가상 (석남미술이론상운영위원회)을 수상했다. 지난 해 출간한 《아이스테시스》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철학 분야로 선정되기도 했다. 통찰력 있는 강의로 명쾌한 이해를 끌어내는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깊이 있는 문화예술 이야기, 미술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과 문화예술의 기원에 대한 전문가적 해석을 들려주고자 한다.